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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울타리

(마태복음서 8:21-22) 제자 가운데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마태복음서 10:35-38)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3:14-15) 내가 그대에게 가기를 바라면서도, 편지로 이런 지시를 보내는 것은, 만일 내가 늦어지더라도,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대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1. 누구집 아들이니?

중학교때 이진식 목사가 살던 동네로 이사를 가서 같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예전부터 다니던 교회를 계속 다니셨고 저만 이진식 목사와 같이 다녔습니다. 거기서 성인이 될 때까지 다녔으니 저에게는 가장 추억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좋지 않았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 교회가 오래전부터 가족, 동네 이웃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다보니 누구의 자식, 누구의 부모라는 혈연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있다보면 교회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네가 어느 집사님 아들이구나?”, “어느 장로님 딸이구나?” 하며 안내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면 바로 옆에 있던 저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교회에서 아무의 아들도 아닌 저에게는 어른들이 그렇게 인사해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막 고등부를 올라오면 당연한듯이 이과인지 문과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저희 교회는 동네 사람들이 많다고 했죠? 제가 있던 동네가 나름 학구열이 높은 동네라 그런지 실업계를 가는 학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두들 인문계를 간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제가 실업계라고 말하면 “아 그래.” 하고는 대화가 끊깁니다. 상대방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기도 하고 실업계 고둥학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할 말이 없었겠죠.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즐거운 기억일리는 없습니다.

아는 집사님이나 장로님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인문계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당연한듯 이과냐 문과냐 물어볼수도 있지요. 이런 말들과 행동에는 악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선의로 하는 것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소속구분을 통한 유대감 확인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나치게 소속감을 강조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가족, 우리 가문,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동문등과 같이 소속을 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속력을 뒤집어 보면 학연과 지연으로 이루어진 배타적 공동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배타적 공동체가 힘이 강할수록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도 강해집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분위기를 살펴서 모이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하게 됩니다. 설혹 바른소리리 할지라도 눈치가 보여 못하게 되는것이죠.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내부고발자가 양심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배신자가 되어 버립니다.

 

  1. 가족은 하나님의 교회

성경에 보면 서로 상반되는 말씀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과 가족의 관계인데요.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가족이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보면 가족의 반대와 부딪치게 되고 원수가 될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자신보다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8장에는 제자 가운데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도록 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헌신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는 가족조차 걸림돌이 될수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에는 바울이 자신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 불신자보다 악한 자라고 비판합니다.

이렇게 가족에 대한 태도가 상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바울이 서로 뜻이 달라서 그런 걸까요? 저는 그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황이 다르고 적용되는 대상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구자는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과 그 무리는 세상에서 조롱당라고 멸시당할수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집니다. 롯의 딸들과 사위들이 옷을 조롱했던 것처럼 무시당할 수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예수님에 비해서 관리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아볼로나 디모데 같은 다음 세대 지도자들은 더욱 관리자에 가깝습니다만 예수님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교회가 생기고 집사, 장로와 같은 직분자가 생깁니다. 바울은 직분자들이 먼저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교회도 잘 다스리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가정의 개념을 부부와 자녀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모이는 교회로까지 확대시킵니다. 디모데전서 3장을 보면 하나님의 가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족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교회에서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엮인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이십니다. 성경에도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로 오신 구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라는 사람들은 세상을 품을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같은 신앙고백으로 모인 무리라고 하지만 그 울타리는 낮아야합니다. 누구든 쉽게 들어올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사람이 되면, 교인의 주가 특정 목사나 사람이 되면 많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보게 되면 결국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끼리 모인 집단은 우리와 남을 구분하고 울타리를 높게 칩니다. 공동체가 커질수록 울타리도 높아지고 이중, 삼중의 울타리가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목사, 장로와 일부 사람들은 특권층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들 마음에 맞고 자신들에게만 충성라는 사람들로 인맥을 구성하고 영향력을 키웁니다. 마치 암세포와 비슷한 방식으로 증식합니다. 이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아집과 독선,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한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사람들은 정상세포가 아닌 암세포가 자라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암세포는 자기증식을 위해 다른 세포들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잠식합니다. 오만한 교회들이 뭉쳐서 암세포처럼 커져서는 자신들이 가장 쪽수가 많다는 이유로 장자교단이니, 적자교단이니 하는 교만한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치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싸잡아서 비난합니다. 바르지 않은 교리를 따르는 이단의 무리까지 자매와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교리는 누구의 기준인가요? 바로 장자교단이라 자칭하는 자신들의 교리가 절대적인 기준이 됩니다. 이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누구든 에큐메니칼 운동을 호의적으로만 말해도 낙인을 찍습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라고 떠듭니다. 정작 그들은 다른 교단들 앞에서 막힌 담을 쌓습니다.

예수님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 이방인도 품으셨습니다. 당시 차별 당하던 여자와 아이들도 품으셨습니다. 반면 복잡하고 차가운 교리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은 구분하고 나누고 담을 쌓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닮아있을까요? 아니면 바리새인을 닮아 있을까요?

  1. 우리 사이에 은혜와 사랑의 보혈이 흐르게 하라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우리는 우리의 가족, 교회에서 맺은 자매형제들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야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사랑의 피가 흘러야합니다. 나의 기대와 이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매와 형제를 바라보면 서운하거나 노여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섭섭하고 실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 가족,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과의 사이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울타리가 낮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는 어느 공동체든 울타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특정 공동체는 특정 울타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공동체는 울타리가 높지 않습니다. 울타리가 높지 않아 때로는 다른 공동체와 협력하고 상생합니다. 흐르는 강물과 시내처럼 구석구석 흘러서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반면 특권과 배제를 통해 울타리를 높게 치는 공동체는 고여서 썩은 물과 같습니다.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거나 잠식해서 같이 썩은 물로 만듭니다. 저희 교회는 낮은 울타리를 가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흐르기를 원합니다. 이웃과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망설임 없이 따르는 제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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