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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규율

(야고보서 1:25)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잠언 26:14)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만 붙어서 뒹군다.

(잠언 26:16)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1. 자유를 위하여

제가 요즘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일정 명령을 시행하고 나면 자동으로 전투도 하고 아이템도 먹고 해서 계속 손을 대지 않아도 성장하는 게임입니다. 보통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접속해서 여러가지 명령을 시행해주면 됩니다. 보통 한번 접속해서 명령을 수행하는데 10분이면 됩니다. 이 게임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게임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작은 시간을 들여도 꾸준히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게임에 중독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 많고 중독성이 강한 게임은 일부러 피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아는 선배의 자취방에서 처음 접한 게임이 있었습니다. 삼국지 공명전이라는 게임인데 장기말처럼 적절한 위치를 선점하여 전투를 치르는 게임입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데다가 게임도 너무 재미 있어서 금방 빠져 버렸습니다. 그 선배가 주말에 자신은 고향에 내려가니까 자기 집에 와서 게임을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주말 아침이 되자 마자 선배에 집을 찾아갔는데 문이 잠겨 있는 겁니다. 선배가 깜빡하고 문을 잠그고는 열쇠를 주고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게임이 너무 하고 싶은 나머지 문 옆에 나 있는 작은 창을 빼서 힘겹게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게임을 할 수 있었는데요. 제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문이 열린 채로 나가기도 그렇고 다시 창문 틀로 나가기도 번거롭고 해서 주말 내내 밖을 나가지도 않고 게임을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일요일 밤이 다 되어가는데 게임의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까지 이틀 밤을 꼬박 새고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죽어도 안 합니다. 한번은 성격 테스트를 해보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유’라고 나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삶에 있어서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키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이런 성격에 당시의 한국이 저에게 맞을리 없습니다. 강한 규율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교육방식과 문화는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왼손잡이 인데 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지, 왜 꼭 교복을 입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으로 글쓰기나 젓가락질은 워낙 어린시절 받은 훈육이라 거부하지 못했지만 머리가 굵어진 이후 제 삶은 저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교에서 청바지를 입고 다니다가 교감 선생님에게 붙들려 맞기도 하고, 형식적으로는 자유지만 암묵적으로는 전교생이 하던 방학 보충수업도 저는 맞아가며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저항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새로운 환경이 다가오면 다시 새로운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제 삶의 에너지에 반은 저항하고 싸우는데 쏟아 부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캐나다에 있는 것도 이런 저의 성향이 이곳까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삶을 돌아보면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하는 사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자유로운 노예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지켰다고 생각한 지난 날들이 정말 자유로웠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의 게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 서요. 그런데 게임에 빠지고 나니 게임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안 하면 안되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다는 게임도 마찬가집니다. 하루에 10분씩 두 번만 하는 것이지만 지난 일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한 다기 보다 안 하면 안되는 의무감 같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작년 초에 제가 여러분에게 대놓고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한 해를 마감하면서 되돌아보니 빼먹고 안 했던 주가 꽤 많았습니다. 게임은 매일 안하면 안되는 사람이 기도는 중보기도는 일주일에 한번 하는 것도 빼먹다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것도 전도사라는 사람이요. 이렇게 보면 저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원하는 저의 모습은 이런게 아닙니다. 제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전도사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저는 남의 간섭이나 지시를 받지 않고 제가 원하는 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15~24)

바울은 우리 속의 악이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악은 무엇일까요? 뿔이 달린 사탄이 우리 마음에 나타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일까요? 저는 신비의 차원까지는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악은 순리를 거스르거나 왜곡하는 역리가 악이라고 상정하겠습니다. 물리법칙과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질량을 가진 우리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자신이 날 수 있다고 믿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바람대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의 바램은 순리에 맞지 않습니다. 역리입니다.

이상구 박사가 우리의 뇌는 우리의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가진 음식을 먹고 싶도록 자극한다고 합니다. 만약 단백질이 필요로 하면 평소 그 사람이 먹던 음식 중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음식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두부나 돼지고기 수육을 어릴 때부터 먹었다면 단백질이 필요로 할 때 두부나 수육이 먹고 싶어 집니다. 그러나 햄버거나 소시지를 어릴 때부터 먹었다면 단백질이 필요할 때 햄버거나 소시지가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햄버거나 소시지는 다량의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와 함께, 많은 양의 지방과 탄수화물, 1급 발암물질인 아질산나트륨 등 좋지 않은 것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 몸의 순리를 왜곡하고 나쁘게 하는 것이니 몸의 입장에서는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그러진 세상에 살면서 반성없이 욕망에 따라 되는대로 살다 보니 역리를 쫓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잠언의 본문처럼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들은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좋지 못한 습관을 반복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바울의 고백처럼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역리인 줄 알면서도 역리를 행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역리로 행하는 것들이 당장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크푸드는 먹는 즉시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합니다. 더욱 강력한 것들로는 마약이 되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값비싼 대가를 치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죄의식을 가집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습관이 되어서 쉽게 끊어내지 못합니다. 죄의식을 느끼면서 나쁜 습관을 반복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소위 똑똑한 인간은 나쁜 습관을 끊기보다 죄의식을 없애는데 머리를 씁니다. 역리로 행하는 것을 합리화하는데 자신의 논리를 동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 본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잠언 26:16)

그래서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일수록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정교하게 합리화를 하고 있어서 남의 충고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합리화하는 횟수가 늘고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스스로가 핑계를 진실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 아래서는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고 기도하는 시간에는 스스로를 속일수가 없습니다.

 

  1.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

참 자유는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순리가 나의 의지와 부딪히지 않는 순간 참 자유를 누립니다. 다시 몸을 들어 이야기하자면 잠을 자야 할 때 잠을 자고 운동을 해야 할 때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해야 할 때 식사를 하고 물을 마셔야 할 때 물을 마시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고, 노여워해야 할 때 노여워하는 것이 순리이자 자유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는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진리를 다시 순리로 바꾸어 봅시다. 순리를 알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베테랑 운동선수의 예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운동에 적용되지만 제가 좋아하는 농구에 비유하겠습니다. 농구에서 중요한 룰은 공을 손에 쥐고 세 걸음 이상 걸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상대 선수를 먼저 밀치거나 해도 안됩니다. 상대방의 링에 공을 넣으면 득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인을 벗어나거나 해도 안됩니다.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룰이 있습니다. 이 룰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농구를 하면 얼마나 부자유스러울까요? 그러나 마이클 조던을 생각해 보세요. 마이클 조던은 이 수많은 룰 속에서도 춤을 추듯 공을 가지고 달리고 방향을 바꿉니다. 그리고 어느 위치에서든 슛을 쏘아 득점을 얻습니다. 마이클 조던 까지는 아니더라도 농구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런 룰이 체화되어야 합니다. 체화 되기 위해서는 룰이 우리 몸에 숙달되어서 무의식 중에도 룰을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많은 반복을 통한 습관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룰이 체화 되었을 때 우리는 농구라는 경기에서 참 재미와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사회, 그리고 이 우주와 지구라는 코트 위에 있습니다. 이 코트를 마음껏 누리려면 이 코트에 적용되어 있는 순리를 체화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순리가 무엇이고 역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습관들을 생각해보세요. 순리에 따른 습관들입니까? 역리에 따른 습관들입니까? 그것들을 잘 살펴서 역리로 쓰는 습관들은 끊어 내버리고 순리로 따르는 습관들을 만들어 나갈 때 진리에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아주 작은 것부터 순리에 따르는 습관들을 반복해서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역리에 따르는 습관들을 끊어버리세요.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공자가 말하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았으나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단계에 이를 것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40이 되어서는 불혹(不惑) 즉 역리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나이 50이 되어서는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나이 60이 되어서는 이순(耳順) 즉 사려와 판단력이 깊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고 나이 70이 되어서 종심(從心) 즉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도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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