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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Green Grass Of Home

(누가복음 15: 18~24)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1. 교회를 교회라고 하면 이미 그러한 교회가 아니다.

오늘은 교회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함께 모이지 못하다 보니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더 자주 듭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교의학에서 말하는 교회론 교리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교의학에서 교회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위의 소제목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이 소제목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문장에서 따온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 제가 이전에도 인용한 적이 있어서 기억하실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뜻을 풀자면 이러이러한 것이 도라고 정의를 하면 이미 그것은 온전한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는 교회론인데요. 저는 교회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정의를 내리게 되면 이미 그 정의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교회는 선교를 위한 훈련소라 정의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전도와 선교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을 이웃에게 전한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서는 선교에 소극적인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쉽습니다. 쑥스러워서 노방전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은 사람, 바쁜 직장일이나 가정일로 교회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 믿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교회는 어려운 이웃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데 큰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헌금을 통한 금전적 기부뿐만 아니라 무료급식봉사, 이발봉사, 간병봉사 등 교인들의 다양한 재능을 통해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 중 형편이 빠듯한 사람, 최저시급으로 일하면서 주일 하루만 쉬는 사람들은 이런 봉사가 큰 부담이 될수도 있습니다.

만일 예배와 성례가 교회의 핵심이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례에 진심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신자, 시험에 빠진 자,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한때 기쁨이었던 예배와 성례가 무거운 의무, 혹은 형식주의로 느껴질수있습니다. 반면 예배와 성례를 교회의 본질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예배나 성례에 지각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할 수 있을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교리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사를 가서 교회를 옮길때에도 자신이 원래 소속된 교단이나 교회가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교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다 보니 자기 교단의 교리를 정립한 신학자를 마치 오류가 없는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교리의 적용에 대해서는 매우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선 교단이나 교리에 크게 상관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유명한 부흥강사를 초청합니다. 헌금회수율이 높은 부흥강사는 교단을 초월해서 인기가 많습니다. 반면 공산주의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반응을 일으킵니다. 한국의 최대교단이라 자부라는 장로회 합동의 경우 목사의 권위로 동성애자들을 추방할 수 있다는 결의안까지 채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예전에 연예인 홍석천씨가 방송에 나와서 한국연예인중 최초로 커밍아웃했을 때 겪었던 고생담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커밍아웃하고 나서 모든 방송은 다 끊겼고 가깝다고 여겼던 친구들도 다 떠났다고 합니다. 세상에 누구 하나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이 비난과 모욕을 홀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교회와 하나님은 자신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커밍앙웃하고 난 첫 주일날 교회를 들어서는데 수많은 교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야했습니다. 어느 친구하나 자신에게 다가와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교회를 나와야 했다고 이야기를 하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를 올려다보며 역겨운 표정을 지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배와 성례, 선교, 구제, 교리, 친목 이 모든 것들은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어느 하나를 교회의 정의로 못박아버리면 교회의 본질에서 오히려 벗어날수도 있습니다.

 

  1. 굳이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래도 교회를 다니면서 최소한 교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교회론을 짧게만 설명드리고 넘어 가겠습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원하시면 저를 따로 만나시거나 유튜브를 찾아보시면 아마도 교회론 강의가 많이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교회에 대해 칼빈은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교회로 나눕니다. 유형의 교회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교인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유형의 교회 안에는 다양한 여러 직제가 있고, 직제에 따라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에 따라 예배를 인도하고 참여합니다. 그리고 운영, 재정, 선교 등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반면 무형의 교회는 하나님 아래 있는 성도의 영적 교제를 말합니다. 칼빈은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교회를 이야기하면서도 예정론을 포함시킵니다. 유형의 교회는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무형의 교회는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교제와 소통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칼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교회를 나누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흔히 무교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짜 무교회주의자가 아님을 알수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해 그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과 같은 분들은 무교회주의자라기 보다 무형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본 분들이라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분은 한마디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 분들입니다. 더 들어가서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무형의 교회뿐만 아니라 유형의 교회를 포함합니다. 또한 유형의 교회에서 치러지는 성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톨릭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죄라 믿습니다.

반면 반대편 극단에서는 신과 나의 일대 일 관계가 중요하지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들어서 이런 추세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본인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가나안 성도’라 부릅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나안 성도는 2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도 있겠지만 한국교회에도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설문조사를 보면 성도답지 못한 성도들, 독선적인 목회자, 지나친 헌금과 헌신 강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공동체 모습, 개인적인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들이 이유라고 합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해서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인터넷, 유튜브, SNS의 발달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설교, 찬양, 특강, 성경공부를 자기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저도 실존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공동체 보다 개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성경도 보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믿음을 지켜 나간다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이웃들을 대할 때 하나님 대하듯 하며 성도와 교제하듯이 한다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성직자들이 교회 출석이 필수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에 억지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러한 생각도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무교회주의자라 불리는 분들도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을 우리 성도로 비유하셨습니다. 가지들은 서로 연결되어서 붙어 있을 때만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지체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 말합니다. 몸의 각 부분들 즉 지체는 성도들입니다.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연락하고 돕지 않으면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 소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관계안에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밴쿠버 View 세계관신학대학원에 계시는 최종훈 교수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공있는 분의 글이라 깊이도 있고 공감가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먼저 ‘작고 건강한 교회’라는 말이 신화에 가깝다고 합니다. 특히 이민교회가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녀세대의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니 다양한 요구를 작은교회가 다 수용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안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책에서는 작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대안으로 분명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특정계급을 대변하는 전문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좋을 거라 말합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적인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상적인 작은 교회가 가능하려면 돈 있고 여유있고 자녀가 없거나 출가한 사람들 중 뜻있는 사람들만 모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도 큰교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사상적 배경과 관심사를 가지고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특정 계급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작은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중에는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는 분들이 큰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생계와 육아에 바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신도 중심으로 사역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 작은교회를 나오기 꺼려하는 이유중 하나가 작은교회에서는 직분이나 일을 맡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정체성, 어떤 교회관을 가지는 것이 좋을까요? 앞의 내용들을 잘 생각해 보셨다면 대충 감이 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어떤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명한 교회론이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성보다 기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 사랑과 은혜로 세워졌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 모두 죄인이었을 때에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부름받았습니다.

교회론과 전혀 상관없는 탕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삼은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탕자 아버지의 집과 같은 곳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탕자 자신은 죄를 짓고 돌아올 때 아버지의 종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의 형도 그를 지나간 죄인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탕자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기 전 아버지의 집은 죄인으로서 종노릇하며 섬겨야 할 곳이라 생각 했습니다. 탕자의 형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동생과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종처럼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은혜와 사랑으로 자신의 집에 들이고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몰론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그를 부른 것입니다. 탕자의 형이 불만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따질 때에도 아버지는 아버지는 은혜와 사랑으로 아들을 대합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집을 제법 너그러운 이익집단 정도로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의 집이 사랑과 은혜의 집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었을 때에 주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교회에 부르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홍석천씨가 교회에서 그런 일를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과도 같습니다. 실향민이 추억이 많던 고향집을 떠올리듯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은혜와 사랑이 있는 본향이 떠오르는 것이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말씀전에 들려 드렸던 ‘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노래가사는 이렇습니다.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내가 열차에서 내려서 내다 본 옛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이고.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그곳에선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마중나왔네요.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길 아래에선 금발 머리에 체리같은 입술을 가진 메리가 달려오고 있어요.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우리 집의 푸르고 푸른 잔디의 느낌은 이렇게나 좋군요.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그래요, 그들 모두 팔을 뻗으며, 즐겁게 웃으면서 저를 만나러 올 거에요.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우리 집의 푸르고 푸른 잔디의 느낌은 이렇게나 좋군요.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칠은 갈라지고 메말랐지만 저의 옛 집도 여전히 서있고,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저기엔 내가 놀던 늙은 오크나무도 있어요.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금발 머리에 체리같은 입술을 가진 귀여운 메리와 함께 길을 따라 걸어요.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우리 집의 푸르고 푸른 잔디의 느낌은 이렇게나 좋군요.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the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의 회색벽들이 저를 감싸고 있었고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저는 깨달았죠, 그래요, 전 그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에요.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그곳엔 간수와 슬픈 얼굴의 늙은 신부가 있어요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팔짱을 끼고 우리는 동틀 녘을 걸을 거에요.

Again I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저는 다시 우리 집의 푸르고 푸른 잔디를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그래요, 그들은 모두 늙은 오크나무 그림자 안의 저를 보러 올 거에요.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우리 집의 푸르고 푸른 잔디밑에 저를 눕히면서.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고향집으로 향하는데 엄마와 아빠가 마중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들도 모두 웃으며 찾아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알고보니 이 행복한 일들이 꿈이었고 상상이었습다. 정작 현실에서는 사형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형집행을 할 늙은 간수와 마지막 고해성사를 해줄 신부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죽어서 자신의 고향집 잔디가 펼쳐진 풀밭 늙은 오크나무 아래 묻힙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이웃들이 찾아옵니다.

이 노래 가사처럼 세상에서 살다가 결국 한번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의 인생은 사형수와 같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사형수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떠올릴수있었던 가장 행복한 기억이 엄마와 아빠가 있던 고향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한번 살다가 갈 인생들에게 은혜와 사랑이 있는 고향집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향이나 집에 대한 추억이 좋지 않으신 분은 와닿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다운 교회를 만나고, 그 안에서 성도간의 진실된 교제가 있다면 그 경험이 곧 고향의 경험, 엄마와 아빠의 집과 같은 경험, 하나님 나라의 경험과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거듭 난 사람은 어린시절의 불행한 기억들에서도 해방됩니다. 어린시절의 불행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라는 든든한 기반 위에 빛과 소금이 되는 미션들이 섰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저를 비롯해 저희 모두가 부족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 그리운 본향을 비슷하게나마 체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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