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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자들의 시각으로 보라

(욥기 3:20-26) 그런데 어찌하여 고달픈 자에게 빛을 주시고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어 보물을 찾듯 파헤치다가

묘지의 돌만 보여도 반갑고 무덤이라도 만나면 기뻐 소리친다!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느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1. 고통 당하는 자들의 시각으로 보라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본 회퍼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명망있는 정신과 의사였고 가정은 화목하고 유복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던 본 회퍼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수용소 생활 2년 만에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쓴 유작 옥중서간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경험이 남아 있다네. 우리는 특히 이번에 세계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아래로부터 보는 법을 배웠다네. 즉 소외된 자들, 범죄 혐의자들, 학대받는 자들, 힘없는 자들, 억압받는 자들, 매도당하는 자들의 시각으로―요컨대, 고통당하는 자들의 시각으로 보는 법을 말일세.

본 회퍼는 당시 양심있는 독일 학자들이 그랬듯이 양심을 지키면서도 미국에 망명하여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아끼던 라인홀드 니버 교수가 유니온 신학교에 교수자리를 마련해 두고 본 회퍼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본 회퍼는 처음 초대장을 거절하지 않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아 무거웠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서슬퍼런 나치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는데 자기는 이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기복신앙에 물든 미국 교회와 사회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독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고통 당하는 자들의 자리에서,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혹독해져가는 감옥생활 가운데 이런 시를 써서 친구에게 보내시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내가 성에서 나오는 영주와 같이 침착하고, 활기차고, 단호하게 감방에서 나온다고 종종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같이 간수들에게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고 종종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한결같이, 웃으며, 자랑스럽게 불행의 나날들을 견뎌낸다고 종종 말한다.

그렇다면, 남들이 말하는 모두가 정말 나인가?

아니면, 스스로 아는 내가 단지 나인가?

새장의 새와 같이 불안하고, 그리워하고, 병들고,

마치 손이 목을 조르는 것과 같이, 쉬려고 버둥거리고,

빛깔과 꽃과 새소리를 동경하고,

따스한 말과 이웃사랑을 목말라 하고,

위대한 일에 대한 기대로 뒤척이고,

멀리 있는 친구의 걱정으로 무력하게 가슴이 떨리고,

기도와 생각과 일에 공허하게 지치고, 어지러워, 모든 것들과의 작별이 준비되어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혹은 저것인가?

다인가? 남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신 앞에서는 가증스럽게 비통해 하는 약골인가?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쟁취한 승리로부터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패잔병과 같은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와 같은 나의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조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임을!

 

고통과 두려움을 통해 그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1. 불평의 기도

오늘 본문인 욥기 또한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고통 당하는 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 욥기입니다. 욥기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역사서로 읽지 말고 문학으로 읽어야 합니다. 욥이 실존인물이냐? 욥이 살던 우스땅은 지금으로 보면 어디냐? 욥의 친구들은 어디 사람이냐? 하는 질문들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연대기로 보면 다른 성경들 보다 훨씬 앞에 배치되어야 하지만 시편, 잠언, 전도서, 다가와 함께 문학의 장르로 묶여있습니다.

이 성경이 쓰여진 시기는 약 B.C 7세기말 바벨론 포로기로 봅니다. 욥이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의 구전전승으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성경저자가 지금의 욥기를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우그에 욥이라는 의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입니다. 하루는 하늘나라 회의가 열렸는데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탄이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 당신이 축복을 많이 해주니 당신을 잘 섬기는 것 아니냐? 그가 받은 것을 앗아간다면 그도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다.”

이 말로 내기가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때부터 욥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그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재산도 다 사라지고 부인은 욥과 하나님을 저주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그리고 병까지 걸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가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그의 저주가 그의 잘못에 있을 것이라며 질문을 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결론은 이 책의 백미라 할수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욥의 친구들을 나무라시고 욥에게는 이전 보다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사실 줄거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거부감이 들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의 초점은 이 내용이 아닙니다. 바로 고통받는 욥의 불평이 오늘의 초점입니다. 고난이 시작 될때만 하더라도 욥은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질병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친구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욥은 하나님께 따져묻고 불평합니다.

먼저 욥기 3장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저주합니다.

드디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욥기 3:1-4)

이 내용을 시인 스티브 미첼은 훨씬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망할 놈의 생일, 자궁에서 나를 밀어낸 망할 놈의 밤.

날에 암흑이 있기를.

그날이 창조되지 말았기를.

날이 공허 속으로 다시 빠져 들기를. (욥기 3:1-4)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피조물인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는 내용은 예레미야서에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욥이 친구들과의 언쟁이 격화되자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을 직접 원망합니다. 친구들도 책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신랄합니다. 그리고 모순된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  강도들은 집에서 안일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히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까지 자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욥기 12:5-6)

사실 친구들의 변론은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인에게 저주를 내리겠느냐? 저주가 있다는 것은 그만한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께 따질 수 있겠느냐? 하는 말들입니다. 이런 논리는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도 교회 사람들을 통해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정의에 편에 서서 변론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자이자 수호자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욥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때에,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욥기 42:7)

참 이상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변호하기 바빴습니다. 반면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의 말이 맞고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고 합니다. 욥의 말처럼 이 세상은 때로 의인이 피를 흘리고 악인이 영화를 누립니다. 고통과 시련은 하나님의 징벌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원망만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한 내기에서 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셨습니다.

욥기에서 욥이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고단한 포로생활 중에서 이 글을 쓴 저자 조차도 하나님의 사람들, 무고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시련의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인생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쏟아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도 기도의 한 방편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일부 목회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고통받는 이웃들 앞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그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을 변론하는 모습들을 종종 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욥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욥의 말이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하실 것입니다. 고통받는 자와 함께 울고 함께 하나님을 원망이라도 하고 불평이라도 나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옳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종교인들처럼 옹졸하고 속 좁은 분이 아닙니다. 신성모독은 고통 가운데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우리를 부르시고 희생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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