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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칸인은 없다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 벌칸인은 없다

스타트렉은 스타워즈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SF드라마입니다. 우주함선 엔터프라이즈를 타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호에는 인간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계종족도 함께 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벌칸족과 인간족의 혼혈인 스팍(Spock)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부함장이자, 일등항해사이자, 과학장교이기도 합니다. 벌칸족은 지능과 신체 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인간과는 달리 감정을 완벽하게 제어해서 어떤 상황이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인물이 닥터 맥코이입니다. 의료장교인 맥코이는 하프벌칸인인 스팍과 달리 감정과 연민이 풍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다치면 상황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고 구하려 듭니다. 반면 스팍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위중한 상황이면 과감하게 부상자를 포기하고 나머지를 살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타적인 맥코이와 합리적인 스팍은 앙숙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드라마가 워낙 인기가 있다보니 영미에서는 냉정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스팍’ 혹은 ‘벌칸인’이라고 놀리기도 합니다. 이런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는 데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한몫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적 판단과 결정을 하는 데 감정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결과는 우리의 상식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고로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은 감정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적활동들은 모두 가능합니다. 즉 벌칸인과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상황을 판단하거나 행동을 결정할 때 감정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즉각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실제 실험에서는 예상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감정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느라 시간만 허비할 뿐 어떤 결정도 행동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결단하고 이행하는 데에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맹자는 일찍부터 그런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했습니다. 맹자는 어린 아이가 우물이 바로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누구든 유불리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아이에게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사람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판단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다양한 감정과 그에 따른 느낌이 없는 벌칸인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단과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외계인이라 인간과 다른 체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인간만큼은 감정없이 행동이 불가능합니다.

 

  1. 감정이 풍부한 그리스도

중세시대의 예수의 초상에서는 예수의 감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인성보다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그려진 것인데요. 그렇다면 왜 감정없이 무심한 표정이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되었을까요? 플라톤 철학 더 나아가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중세학자들은 변함없는 것이 참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상정할 때 “부동의 원동자”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들의 운동에 원인이 되지만 그 스스로는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임이 없는 존재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불변의 존재”라고도 합니다. 반면 변화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생성과 소멸이 있는 것은 피조세계에 국한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의 변화무쌍한 감정 또한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단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적인 예수 얼굴에는 감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은 감정이 매우 풍부한 분이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슬퍼서 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두려움에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시고, 아이들을 귀여워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편법으로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 자신을 업신여기던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서는 분노하셨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그를 닮아서인지 감정이 풍부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그랬습니다. 반면 감정적이기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자도 있긴 있었네요. 예수님의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료를 부을 때 아깝다고 정색하면서 그 돈이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다고 말한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이네요.

그래서 저는 믿음이 깊다는 핑계로 슬픈 일 중에도 슬퍼하지 않고 기쁜 일 가운데도 근엄하기만한 종교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철인과 같은 모습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그들은 얼핏봐서는 엄청난 내공의 믿음을 지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아집으로 똘똘뭉친 옹고집쟁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말만 강력하지 삶은 변변치 않습니다. 교인에게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1. 때에 합당한 감정과 표현의 지혜

그렇다고 감정이 풍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슬픈 감정만 풍부하다면 그 사람은 우울증 환자일 것입니다. 기쁜 감정만 풍부한 하다면 조증 환자, 시와 때도 없이 기쁜 감정과 슬픈 감정을 넘나든다면 조울증 환자겠죠. 바른 행동과 결단을 이끄는 지혜로운 감정은 때와 상황에 알맞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들을 어릴 때부터 잘 발달시켜서 상황과 때에 합당한 감정을 느끼고 잘 표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많은 아버지, 우울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감정이 바르게 성숙하지 못합니다. 가정환경뿐만 아니라 사회나 문화도 우리 감정이 성숙하게 자라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에서는 남자가 우는 것을 꼴사납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십년 전 경상도는 더 심했습니다. 저도 우는 것을 매우 절제했던 기억이 납니다. 울지 않는 저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한 것이 아니라 딱딱해졌다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강한 것은 오히려 대나무처럼 유연해서 부러지지 않습니다. 반면 딱딱한 것은 오히려 깨지기 쉽고 한번 깨지면 다시 붙이기도 어렵습니다.

감정발달에 있어 중요한 시기에 감정이 바르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지만 다 커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그 한번의 경험으로 사람이 확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주님을 만나 거듭난 사람은 불행한 과거가 만든 나쁜 흔적들이 지워집니다. 한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있고 천천히 서서히 지워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감정과 느낌에 솔직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감정이 없는 독한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풍부하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도 잘 합니다. 인간들에게 진정한 구세주는 예수님처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타인의 기쁨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이 있으니 세상에 슬프고 괴로울 게 없다는 사람들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가 되기 쉽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기 보다 믿음 없는 사람으로 비난하기 쉽습니다.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감정을 느끼고 적절하게 표현하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사람과 사람사이에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웃들에게 편안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바른 감정을 통해 바른 행동과 결단이 뒤따른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혜는 책이나 지식 혹은 날카로운 이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마음, 경우에 합당한 감정, 적절한 느낌들이 우리를 지혜로운 결단으로 이끕니다. 여러분들도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감정이 왜곡되거나 증폭되거나 은폐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표현에 있어서도 슬픈데 화를 내거나 화가 났는데 웃고 있거나 즐거운데 무표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듯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수십년을 반복해온 삐뚤어진 감정과 표현들은 고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분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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