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교회 연혁 및 고 문형린 장로의 글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 1990년 7월 12일)

 

 

아래의 글은 캘거리 한인연합교회를 창립하신 고 문형린 장로님의 1990년 글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창립 5주기 회고담을 통하여 캘거리한인연합교회의 태동과 전개과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역사 기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출처: 문형린, "연합교회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복음] 제 3호 (1990): 7-12.

 

어제의 괴로움이 내일의 기쁨인 것을 믿고 연합교회 발족이래 특기할 만한 것만 내가 본 그대로 적어 본다.

1985년 5월은 본 교회가 탄생한 달이다. 본 교회 창립멤버들을 격려하고 교회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하객이 초청되지도 않았고 우리 교회 출범을 위한 세심한 행사 준비도 없었다. 다만 연합교회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 고 안병식 형제와 에느먼턴의 이재형 목사님 (창립에배인도), 오충열 장로님, 박종삼 장로님 등 4분이 외부 인사로 참석해 주셨고 예배 후 간단한 다과와 사진 촬영이 있었고 조직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이미 많은 다른 교단의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던 당시 칼가리 형편으로 보아 "또 하나의 교회"로 밖에는 인식되지 못할 연합교회의 출범은 축하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우리교회가 출범한 것이 침례교회가 발족한지 불과 한 해도 안되는 데다가 이 새로 생긴 두 교회가 모두 한인장로교회에서 나온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된 것이니 그 장로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 도저히 우리 교회 발족을 축하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연합교회의 발족 동기는 교인이 마땅히 하여야 할 사회참여의 길이 기성교회에서 조직적으로 막혀 있었고, 신앙의 생활화나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인 사회악 제거나 사회정의를 위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는 교회가 칼가리에 하나도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이나 동조하는 생각이 대화나 공중기도에 나타나면 불신앙, 잘못된 신앙, 심지어는 빨갱이 사상 운운하는 극단적인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그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즉 복음주의와 사회정의 운동을 겸하면서 억눌린 자들과 착취당하는 자들을 대언하며 무서운 권력자들과 맞서 싸워 온 이상철 목사님이 에드먼턴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칼가리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증거의 말씀 듣고 깨달을 기회를 마련하고자 당시 우리가 속해 있던 한인장로교회에 장소사용 허가를 요청했던 것이다. 당회의 조직적이고 기술적인 지연작전 후의 거절로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허비당하고 그 후 안동식 장로의 호의로 그 분의 식당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는데 며칠 뒤 그것마저도 압력으로 취소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당황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렸는데, 낙스연합교회의 그랜트 도오손 목사의 호의였다.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겨우 장소를 얻고, 전화로 청중들을 초청하여 예정대로 일을 무사히 치른 후 소문에 들으니 이 모든 방해 공작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토론토의 어느 총회 시무목사가 칼가리의 그 교단교회에 전화하여 이상철 목사의 칼가리 방문 목적이 연합교회 발족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경고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나의 심정은 값싼 분노가 아니라 연합교회에 부여된 사명감 바로 그것이었다. 급히 "구유회"의 동지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에드먼턴 연합교회[에] 후원을 요청하여 창립예배를 본 것이 그 다음 주일이었다.

 

"구유회"는 그 때 이미 3년 반쯤 되는 자리잡힌 모임으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으로 예수님이 비천하게 태어나신 구유에서 그 이름을 빌어쓰고 있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으니 "구유회"가 그것을 하기로 하고 돈을 모아 한국의 양심가족 돕기와 칼가리 교민들의 의식화운동을 하였는데, 이 의식화운동의 도구로서 한국의 명령계통에서는 오는 부패와 탄압의 손이 미치지 않는 카나다 신문, 즉 "민중신문"을 보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여건하에서 치밀한 계획없이 서둘러 발족한 우리 초창기 교회의 교인 중 다수가 "구유회" 회원이었고 구유회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반작용을 일으켜 여러가지로 연합교회를 비방내지는 경계하는 눈초리가 있었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의 그것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끼리 그것을 감수해야 했고 또 그 어려움은 우리가 견딜만한 정도의 것들이었고, 견디고 난 후 우리는 전보다 더 강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시는 섭리요 계획임을 우리는 배우게 되었다. 즉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인내를 배웠고 인내를 통해서 연단되는 주님의 예정하신 축복의 길을 걷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첨부된 가정 별 교인명단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합교회는 창립이래 3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성장해 왔다. 얼핏 보면 성장했다기보다는 위축되어 왔다고 해야 마땅할 정도로 이 명단은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

Chuck Richey 목사님이 지도하시던 15개월 [동안], 설교는 Richey 목사님이 하시고 서능필 집시님과 본인이 번갈아 가며 격주로 통역을 담당하였고 주일학교는 오정화 양이 주로 맡았다. 홍종천 집사님은 예배인도와 수요성경공부를, 그리고 그 부인은 피아노 반주를 각자 맡았다. 교인이 적은데다가 대부분 교인들은 경험이 없어 주저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교인 모두가 자기 정성껏 봉사하여 제직회, 여전도회, 주일학교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Richey 목사님 (그 분은 당시 칼가리노회장이었다) 을 통하여 연합교회의 역사(1925년에 드디어 25년에 걸친 연합 운동이 결실을 보아 장로교, 감리교, 조합교 3교단이 합하여 연합교단이 탄생되었다는 것과 지금도 계속 성공회 측과 연합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등), 조직, 회의, 신조, 교리 등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거나 혹은 그 이상 (이념)에 동조하는 우리들에게는 연합교회의 교인됨이 큰 기쁨이었지만, 예전에 한국에서 듣고 해 보던 교회생활과 차이가 있고 그것에 불편을 느낀 기성신자들에게는 이 교회의 교인됨이 후회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 떠났고, 또 새로운 분들이 들어옴으로 교인수와 내용에 변동이 생긴 것이었다. 그 중에는 아예 우리 교회에 나올 계획이나 가능성도 없었지만 우리 교회의 발족을 위해서 처음 몇 주 참석해 준 분들도 계셨고 이사가고, 오고, 출생, 사망 등의 불가항력적 요인들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한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다니거나 혹은 안다[니]거나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들의 이유만큼이나 다양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연합교회에서 같이 일하며 형제, 자매임을 누나며 지내던 그 시절과 뒤에 헤어져야만 했을 때의 슬픔을 통해서 배운 피차간의 교훈은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수 없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교회는 성장을 계속 하였고 따라서 사람들이 바뀌게 된 셈이다. 도움을 준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받아본 사람들만이 아는 특혜요 그것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규칙적으로 하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이외에도 전도활동, 구제활동도 우리 형편대로 해 보았고, 다른 교회에서는 허용되지도 않는 활동도 좀 해 보았다. 즉 함석헌, 한용상, 박대선 (전 연세대 총장) 제씨 같은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들의 말씀을 남들과 같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초 교파적 활동을 기회가 왔을 때 포착, 실시했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기회가 그 이후 지금까지 다시는 없었다.

 

연합교회의 두번째 목사님이신 김유락 목사님 목회기간 동안엔 제법 활동이 시작되었다. 제직회, 여전도회, 주일학교의 조직이 강화되었고 주일 예배 성경공부가 언어의 장벽이 없으므로 더욱 재미있게 되었다. 이 때는 이미 홍종천, 서능필 두 집사님이 우리 교회를 떠난 후였으므로 반주자와 지일학교 반사 부족의 이중적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자발적 반문활동과 이에 대한 교인들의 호응으로 한 때에는 교인 명단에 나타난 것처럼 연합교회 역사상 (짧은 5년이지만) 가장 큰 수적인 교세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는 중에는 한국의 기성 교회에서 익힌 예배 형식이나 성찬식같은 예식이 연합교회의 그것과 좀 다르고 성찬식 참석자격의 범위도 다르다고 하는 것 같은 조그만 문제들이 (어떤 이들은 큰 문제들이) 일부 교인들 중에서 불만의 요인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생긴 불만은 계속 성장하였고 결과적으로 교인들 사이에 일종의 긴장감이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이 긴장감이 절정에 달하여 폭발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을 나는 부활교회 사건이라 부르겠다. 제일장로교회에서 갈려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작하는 교회가 부흥회 목적으로 미국 L.A. 에서 이름난 김광신 목사를 초청 부흥회를 가진 것이 1988년 초여름이었다. 그 분의 설교 테이프가 그 일 이전에 칼가리 교민들 사이에서 이미 돌려진 적이 있었고 본인도 들었지만 여러가지 성령의 은사를 믿는 자들에게는 부어줄 뿐아니라, 방언의 은사 정도는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게 해주실수 있다는 분이시다. 따라서 칼거리 주민들이 약간 참석한 가운데 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 본 교회 교인들도 몇 분 끼어 있었다. 방언은사 받아 기뻐하는 교인들과 나머지 일부 교인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따라서 곧 닥쳐 온 주일 설교 중에 목사님이 이 문제를 거론 하셨다. 즉 방언의 은사[를] 받아 가뻐하는 일이 있는 것은 좋으나 그런 은사를 베풀어 주신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 일어날 본 교회를 포함한 교회들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살펴보면 그 방언의 은사가 참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요지였다. 예배 후 심한 마음의 상처를 느낀 조원도, 문경린 집사 가정이 실망을 하고 교회를 나가니 그 후 연쇄반응으로 몇 가정이 이에 합류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김목사님은 교회를 떠나시기로 작정을 하셨고 힘들게 노력하여 후임자를 구하였는데 그 분이 유증서 목사님이시다. 유증서 목사님이 부임해 오시자 마자 닥친 문제가 전부터 계속 되어오던 가정불화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교인 가정이 문제였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분들이 교회를 떠나고 그 여파로 몇 가정이 더 떠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오영판 집사님은 한국에 정착하시노라 떠나셨고 교회의 큰 기둥역할을 하시던 송경식 집사님은 가족을 데리고 예정대로 신학공부 하시기 위하여 토론토로 떠나셨으니 남아있는 교인들 사이에는 참으로 가련한 신세가 된 느낌마저도 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유증서 목사님의 복음적 신앙생활을 위한 열심있는 성경공부와 교회 생활 전반에 걸친 조직확립을 위한 새로운 가르침으로 제직과 교인들은 제법 바쁜 교회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1989년 여름 인근의 한인장로교에 다니시던 유증서 목사님의 사위되시는 윤영수 집자님이 가족과 함께 우리교회에 나오게 되니 교회가 새 활기를 얻게 되었다. 음악적인 그 가정의 자도력으로 성가대까지 조직되어 교인수는 적고 할 일은 많아 대부분 1인 2역 또는 1인 3역의 더 바쁜 생활로 접어 들었다. 1990년 3월 지금까지 후진해 오던 새 목회자를 모셔오는 일을, 노회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단하기로 제직회에서 결의하였다. 이 때 윤영수 집사님은 매우 못마땅하게 느껴 회의 도중 연합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가족과 함께 본 교회를 떠났다. 한국에서 모셔오기로 추전해 온 새 목회자는 유증서 목사님의 장남이며 또한 윤영수 집사님의 손아래 처남이기도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3주 있다가 유증서 목사님도 6월말까지의 예정을 바꿔, 일찍 떠나시니 이 때는 부활 주일을 1주 앞둔 1990년 4월 8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남은 교인들은 단결하여 형제애를 더욱 굳히며 앞길을 인도해 주실 성령의 역사와 자비를 매우 간절히 바라며 인내로 연단 중이다.

 

이상은 우리교회 창립이래의 중요 사건들을 역사적 기록 목적으로 살펴 본 것이나 그 동안 우리 교인들이 배운 적어도 내가 배우고 느낀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극히 작은 우리 교회에 새 교인이 들어 올 때마다 느끼는 즐거움이란 참으로 천국잔치에 묘사된 그것이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소중한 모습 놓치지 않을세라 귓속말로 속삭이며 누군가 하고 묻기도 하며 여러가지로 관심을 보이며 살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눈물없인 기뻐할 수도 누구에게 감사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는 가정을 대하거나, 소식에 접할 때의 광경 또한 장관이다. 한국식 장례식장 바로 그것이었다. 송경식 집사님이 신학공부 하러 떠날 때, 우리는 글자 그대로 희비쌍곡선을 그렸다. 연합교단의 우렁찬 목사가 되어 졸[고]있는 뭇 심령들에게 정신이 번쩍 나게 뛰어다니며 활약하기를 비는 간절함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우리를 저버리고 가야 하는 야속함이 엇갈린 심정이란 참으로 어떤 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쁨과 슬픔, 감사와 아쉬움을 함께 삼키며 그 분의 장도를 빌어 보내고 나니, 우리의 처지는 참으로 하나님께 맡겨진 신세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이 진리를 이제야 깨닫게 된 것도 같았다.

 

이와 같이 흥분과 마비를 번갈아 맛보며 지내오는 동안 뒤늦게나마 발견한 기쁜 소식은, 우리의 철없던 자녀들까지도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맛보고 희망과 절망의 고개를 같이 넘으며 자라서 어느덧 신앙의 동지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시다. 고맙기 한이 없다. 어느새 아이들도 벌써 자라서 훌륭한 믿음과, 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공의와, 형제의 신의를 위하여 기도할 줄도 알고 역설할 줄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또 하나의 사랑과 은혜의 표시가 아니겠는가.

 

원체 교세가 작으니, 외부로부터 철없는 사람들의 방해내지는 부정적 선전공세가 때때로 들어 온다. 우리가 할 수 일이란 이해와 용서, 인내와 기도, 그리고 겸손으로 억울한 수모를 당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할 때 주시는 마음의 평화로 위로를 받으며 주님이 우리를 교육하심을 깨달았을 땐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용솟음쳐 오르는 새 힘과 새 기쁨에 차 그 얼마나 많은 밤을 재촉했던가? 주님 위해 헌신하는 많은 성도들이 그 어떤 체험과 훈련을 거쳤는지 가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이것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조심도 해 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무조건 보인 순종이 귀한 믿음이라 한다. 우리들이 어려움 당할 때 걱정과 슬픔을 겪은 것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기 때문인가, 아주 없었기 때문인가? "무릇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니…" 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작은 교회의 큰 힘이 되어 왔다. 5년 전에 불러 모아 주신 창립멤버들을 교회 발전에 필요한 대로 채워주시고, 우리의 형제요 동지되는 에드먼턴 연합교회 이재형 목사님의 새로운 가르치심으로 신앙의 새 무대를 이루어주시니 이것이야말로 새술을 새 푸대에 넣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심적으로 고난받는 모든 교우들에게 지금 우리와 같이 있[든]지, 떠나 있[든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령의 끊임없는 격려와 인도하심이 항상 같이 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