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9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예수님은 생명에 이르는 길    요 14:1-9, 사 1:11-17
      선한목자장로교회, 12/7/03

시작하는 말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라고 하셨다. 많은 생명을 살리면서 대해에 이르는 생수라고 하셨다. 그 대해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시다. 그 신비로운 생명의 대해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 대해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그 길을 알지?” 하고 물으셨다.
    이 생명의 대해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이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물음이다.
어느 문명권에 있어서든지 이것이 제 일차적인 물음이었다. 따라서 많은 성인, 철인들이 그 길을 밝히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갈릴리 산골짜기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길이다.”라고 선언을 하셨다. 그야 말로 그 생명의 대해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도가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되었을 때 모두 그의 가르침을 “새로운 길”, New way 라고 불렀다. 이 새로운 길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다른 옛 길과 어떻게 다른가?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이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1. 멸망으로 가는 길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당시의 세계인 지중행 연변을 통치한 것은 로마제국이었다. 동시에 헬라 문화가 그 세계를  지배했다. 그 헬라 문화가 제시하는 길이란 어떤 것인가?
    헬라인들은 영원한 진리를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동양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도”가 된다. 저들은 이 이데아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 ‘이데아’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이 이끄는 대로 가야 한다고 저들은 믿었다. 이 이성이란 사람, 특히 남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저들은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이성을 총 동원해서 논리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의 근원인 이데아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헬라철학의 틀을 형성한 푸라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림자와 같이 무의미한 것,이데아의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 저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저 세상의 이데아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아리스도텔레스는 이데아는 현실의 세계에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데아와 하나가 되는 길이란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이성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현대 문명의 모태인 과학이 탄생을 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의 철학의 흐름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성이다. 저들은 히로애락을 조성하는 감성은 배격했다. 감성의 파도가 일면은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이성을 토대로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이란 첫째로 구원이란 나의 이성으로 이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살리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맥력적이나 한계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 무한대한 하느님의 세계를 파악하겠다는 것은 오만이다.
    둘째로 이 길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길이다. 내가 이성으로 이데아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나의 구원이 일차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이란 여유 있는 사람, 사고력이 있는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길이다.
감성이 강한 여성들이나 목 구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란 이 길을 추구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와 같은 철학이란 노예들의 피땀 위에 구축이 된 헬라 귀족들의 길이었다.
    셋째로 이 철학은 현실의 세계를 무시한다. 현실은 무의미한 것, 변화 무상한 현실이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에 지장이 된다고 보았다. 현실을 잊어버리고 이데아의 세계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무시할 때 이 현실이란 악령의 무대가 되어 우리들의 삶은 더욱 비참하게 된다.
    넷째로 문제되는 것은 감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는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감성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뿌리와 직결해 있다. 여기에 한 슬피 우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 여인의 삶의 깊이에서는 악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여기에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추는 어린이가 있다고 하자. 그 춤추는 어린이의 삶의 배후에는 그를 기쁘게 하는 따뜻한 사랑이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느낌의 근원을 살펴봄으로 삶을 깊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감성을 무시하는 이성은 우리를 냉혈동물로 만든다. 이성의 열매인 과학과 그것이 빚어낸 물질문명을 보라. 감성을 배제할 때 그것은 인류에게 큰 비극을 초래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본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천지엔 다른 한 삶의 길이 있었다. 그것은 힘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힘 가진 자를 야수로 만들고 약자들을 그들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저들은 그들의 손으로 만든 제국을 절대화하고 그 위에 군임한 황제를 신격화했다. 그리고 민중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저들은 스스로를 평화의 옹호자라고 자처했으나 그 평화란 강자들을 위한 평화요 밑바닥에 있는 자들은 불안과 공포로 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암담한 암흑 속에 사는 민중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곳을 찾았다. 이렇게 된 저들은 각가지 잡신을 섬기게 되었다. 혹시 저들이 그들의 수호신이 되어주기를 바래서이다.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도 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세세한 조목들까지를 지켜야 한다고 믿고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 민중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웠다. 사제들은 절기마다 성전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면서 실제로는 저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로마 세력에 아첨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희생을 당하는 것은 인구의 90%가 되는 농민들이다. 저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보면서 젊은이들은 비수를 품고 일어섰다. 로마 지배자들은 물론
그들과 협력하는 자들을 행해서 테로 행위를 감행했다. 그리면서 저들은 다윗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와서 로마를 처 물리치고 다윗 왕국을 회복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패망을 초래했을 뿐이다. 이 많은 길들은 다 죽음에 이르는 길들이었다. 


2. 예수님은 생명의 길

    이렇게 암흑이 천하를 뒤덮었을 때 갈릴리 산골짜기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가르치신 길은 이 모든 길과 전연 다르다.

* 저들의 길이란 나의 이성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오만한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이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로 얻는 선물이다.
* 자들의 길이란 홀로 가는 개인주의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더불어        가는 화해의 길이다. 세리와 창녀,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걷는 길이다.
* 저들은 땅 위에 것은 다 없어질 허무한 것. 저 세상의 이데아만을 행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 위에 삶이란 중요한 것, 하늘나라도 이 땅 위에서    시작해서 영원에 잇닿는 것이리라고 가르쳤다.
* 저들의 길이란 감성을 배제한 차디찬 이성만으로 추구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의 길은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사랑의 길이다. 서로 어우러져 노    래하고 춤을 추는 잔치의 행진이다.
* 저들의 길이란 폭력에 의존하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고 섬김의 길이다.
* 저들의 길이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앞만 챙기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가진 것을 나누는 길이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버리는 길이다.
* 저들의 길이란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하면서 이방인을 천시하는 길이다. 그러나 예    수님의 길은 온 인류를 꼭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하나가 되는 길이다.
* 저들은 종교의식이나 교리를 중요시하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이란 생명을 살    리는 것을 중요시하는 길이다.
* 저들의 길이란 잡신들을 모시면서 두려워 떠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를 모시는 길이다. 
* 저들이 가는 길은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신 길이란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자가 적다.
* 저들이 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길은 부활의 길, 생명    의 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이다.

맺는 말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은 어떤가?  모두가 생명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 중심적으로 사는가? 아니면 “나” 중심적으로 사는가?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가? 아니면 지배하면서 살려고 하는가? 나누면서 살려고 하는가? 아니면 독점하면서 살려고 하는가?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으면서 살려고 하는가? 아니면 세상이 아무리 비참해도 “난 몰라”라는 무관심으로 사는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룩되게 하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내세 복낙이 관심의 초점인가? 온 인류를 다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로 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다.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이 가신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Title
  1. 예수님은 생명에 이르는 길

    Date2003.12.10 By문영환 Reply0 Views92
    Read More
  2. 부활의 의미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0
    Read More
  3. 예수님의 환희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79
    Read More
  4. 예수님의 선언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4
    Read More
  5. 예수님의 눈물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76
    Read More
  6. 예수님은 생수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8
    Read More
  7. 예수님은 생명의 빵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90
    Read More
  8. 예수님의 기원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5
    Read More
  9. 동역자의 심성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0
    Read More
  10. 땅 위에 하느님의 뜻이 창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78
    Read More
  11. 사람의 계산과 하느님의 계산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4
    Read More
  12. 가장 용서하기 힘든 일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4
    Read More
  13. 문동환 목사님 설교 코너 개설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77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