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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공감하지 않기: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에 대해

(욥기 5: 8, 17~18)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겠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신다.

  1. 공감(共感)에 대하여

그 동안 공감(共感)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사건은 신이 인간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공감은 영어로 sympathy 라고도 하고 empathy 라고도 합니다. 두 단어 모두 그리스어로 (슬픈)감정, 연민을 뜻하는 pathos에서 유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접두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Sym은 togeth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가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외마디의 탄성과 함께 인상이 찌푸려 지는 일이 있습니다. 같은 일을 같이 느끼는 것이 sympath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ympathy는 동감으로 많이 번역 합니다. 반면 em은 in, into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주일날 말씀 드렸던 공감은 바로 empathy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고통을 공감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설픈 공감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육체로 있는 한 타인을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어느 정도의 공감이 가능합니다.

  1. 다름에 대하여

요즘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성향이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각만큼은 모두 동일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이 다를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물리적인 세계도 저마다 다 다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색깔로 보입니까? 누구의 눈에는 흰색바탕에 금색 줄무늬로, 누구의 눈에는 청색바탕에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드레스로 보입니다. 같은 사물을 두고도 보는 것이 다릅니다. 흰금으로 보는 사람은 청검으로 보는 사람의 눈이 잘못된 것처럼 생각할 것이고, 청검으로 보는 사람들은 흰금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이 잘못 된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에 대한 실험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증명 되었습니다. 똑같은 100의 고통을 주었을 때도 어떤 사람은 80으로 어떤 사람은 120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삶의 속도도 다릅니다. 민달팽이처럼 가는 사람이 있고 치타처럼 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타의 눈에 민달팽이는 비정상적으로 느리고 게을러 보입니다. 반면 민달팽이의 눈에 치타는 매사에 성급합니다. 그러나 민달팽이는 민달팽이의 속도로, 치타는 치타의 속도로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늘, 특히 한국 사회는 초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빠름이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치타는 살아남고 민달팽이는 도태시켜 버립니다. 민달팽이가 없고 치타만 살아 남다 보니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와 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잠깐 멈춰 서서 뒤돌아 보고 반성하고 재정립하는 민달팽이와 같은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의 기준과 입장에서 쉽게 조언을 합니다.

  1.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욥의 친구들

욥의 환란을 당하고 있을 때 욥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 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보고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 썼습니다. 그렇게 칠일 동안 욥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당시 유대인들이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감한다고 생각한 욥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자신을 보내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 하나님 또한 원망했습니다.

욥 만큼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불리는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누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짜증스럽겠지만 안 할 수가 없네.”

그러면서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욥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신 변론하며 욥을 나무랍니다. 다른 친구들도 하나 같이 하나님을 변론하며 욥을 꾸짖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친구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소발의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어찌 미칠 수 있으며, 스올보다 깊으니 네가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소발의 이런 말들은 이 후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대사와 매우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이렇게 보면 위의 소발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같은 의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인간인 욥이 판단하고 있는가 꾸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을 칭찬하기는커녕 꾸짖으십니다. 그 세 친구들을 꾸짖으시며 욥이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하겠노라고 합니다. 저는 욥의 친구들에 말이 틀렸다기 보다 친구 앞에서 그들이 취한 행동과 태도를 나무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은 공감하는 척 하면서 욥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면서 욥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변론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변론할 위치나 됩니까? 그리고 욥을 비난할 위치나 됩니까? 이들은 공감하는 것 같지만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1. 가짜 공감이라는 독

가짜 공감에서도 가장 나쁜 말이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내가 너보다 더 심한 것도 경험해 봤는데~”라는 말입니다. 한때 MB가 습관처럼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이런 말을 습관처럼 꺼내며 어설픈 조언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같은 경험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같은 경험이라 저마다 느낌도 다르고 강도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은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죽는 것을 봐도 고통을 느낍니다. 반면 재미 삼아 벌레를 죽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영역마다 감정선의 촘촘함이 다르고 감정선의 탄력이나 흡수도도 다릅니다. 대체로 이성이 발달한 반면 감정선이 굵고 단단하고 띄엄띄엄 하면서 넓게 퍼진 사람들은 감정선이 촘촘한 사람들을 볼 때 “나약하고 피곤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감정선이 예민하고 촘촘한 사람들이 단단하고 넓은 사람들을 보면 “둔하고 몰인정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1. 공감할 수 없음을 알 때 공감이 시작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어떤 시인은 인간을 저마다 떨어진 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나의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타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고 느낄 때 공감도 시작됩니다.

저마다 다름을 인정할 때 타인을 내 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폭력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공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본능은 욥의 친구들처럼 계속해서 내 중심에서 타인을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거리를 두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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