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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1 22:43

예수님의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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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환희                                          눅 23: 39-43, 이사야 2:1-5
      선한목자 장로교회, 4,5,03
시작하는 말

    골고다  언덕 위에는 십자가 틀 셋이 석양빛을 등지고 외롭게 서 있었다.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 군인들도 떠들썩했던 구경꾼들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처진 몸들은 어서 숨이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리는 것이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죄수들을 지키는 병정들의 발자국 소리 뿐이었다. 가운데 달린 죄수는 나사렛 청년 예수, 그이 좌우에 달린 두 죄수는 푝력범이다.
    얼마 있다가 왼 편에 달린 죄수가 침묵을 깨뜨렸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예수를 비꼬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바른 편에 달린 사형수가
    “너 사형을 받는 주제에 하느님도 두렵지 않아? 우리가 이런 벌을 받는 것은 우리 죄 때문이지만 저 분이야 무슨 죄가 있어?“ 라고 꾸중한 뒤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형수들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심정을 그렇게도 명확하게 묘사해 준다.
    이 두 사형수는 정치범이다. 십자가란 정치범을 사형하는 무서운 형틀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사형수는 다윗 왕국의 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한 열심당원임의 틀림이 없다. 그들의 삶의 자세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1. 비방하는 첫째 사형수

      먼저 첫째 사형수의 삶의 자세를 보자. 그는 다윗 왕국 회복에 대한 신념이 철저한 사람이다. 다윗 왕국을 회복함으로 땅 위에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와야 한다. 힘으로 이방 나라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하여야 한다. 이렇게 믿는 그는 사랑만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아니꼽게 보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빈정거린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사야 2 장에 있는 메시아 예언이다. 그 예언에 의하면  시온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야훼의 성전이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 밑에 조수처럼 몰려 들 것이란다.  그 때 수많은 민족들이 모여 와서 말하기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이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서 배우고 그 길을 따르자.
    그가 민족 사이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군사 훈련도 하지 않으리라.“

  그는 온 인류가 시온 산에 와서 야훼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말씀에 따르는 때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될 때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시대가 온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인가. 요즈음 전 세계를 휩쓰는 평화시위자들의 소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온산이 모든 산 위에 우뚝 서야 한다. 야훼의 전이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야 한다. 그리고 민족들이 야훼의 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것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와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든 민족을 제압해야 한다. 이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야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로마가 시온 산 위에 군임하고 있다. 로마 총독이 야훼의 성전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 선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것이 바로잡혀야 한다. 그래서 이 청년은 다윗과 같은 영웅을 대망하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로마군을 못살게 군 것이다.
    그런데 이 갈릴리 청년이 메시아라고 하면서 이렇게 로마 군병의 손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린다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 둔 순간에도
그를 조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 둘째 죄수

      둘째 사형수도 그와 꼭 같은 소신으로 살아왔었다. 어떻게 하든지 힘으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땅 위에 평화가 온다고 믿었다.
    그리다가 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을 했다. 그는 채찍으로 몰아 부치는 로마 군병들을 향해서 적개심을 가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 우는 여인들을 보고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셨다. 그를 비방하는 말들이 그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하느님에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다. 저들이 그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린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봤을 때 그는 틀림이 없이 선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아무 죄도 없이
이 무지 목매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는 확실히 자기와 같은 무리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자기와 같이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야 말로 하느님의 심정을 가지신 분, 우리를 위해서 야훼가 보내신 분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깨달은 그는 동료 열심당원을 꾸중하면서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 깨닫고 돌아선 것이다.
3. 예수님의 반음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얼굴은 해바라기처럼 환해졌다. 이 청년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던 힘의 철학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깨닫고 삶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이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에는 환희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은 목자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그 그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여기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이 죄수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그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 질 때 그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놀라운 삶의 진리가 있다. 구원은 먼 훗날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순간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과 통한다는 것이다. 이 사형수도 죽기 전에 깨닫고 돌아섰기에 그 순간 예수님과 더불어 영훤한 생맹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에는 환희의 물결이 파도친 것이다.

맺는 말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히 힘의 철학이 난무하고 있다. 이 힘의 철학이란 죄의 뿌리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힘의 철학이란 죽음이라고 하는 악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보라.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무리들 때문에 간 곳마다 죽음의 참상이 전개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힘의 철퇴를 휘두르는 자들은 자주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한다. 자기는 하느님 편이라고, 하느님이 저들을 사용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화의 왕국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 악의 편이라고 한다. 자기는 선하고 반대편은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을 위해서 폭력을 써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푝력으로 오지 않는다. 평화는 폭력의 죄악성을 깨닫는 자들을 통해서 이룩된다.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처럼 참된 평화란 사로 자기를 주는 사람을 통해서 온다.
    내가 폐병 요양원에 있을 때 Miss White 이라는 여성을 만났었다. 그는 60 이 넘은 은퇴한 교사로 나보다 일찍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녀가 내 관심을 끈 것은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환자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즐겁게 사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자주 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나는 무엇이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Miss White이 지혜로운 말로 그들을 지도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로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웃는 얼굴로 경청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내가 너희들보다 더 안다는 기색이란 전연 없었다. 선생들이 흔히 가지는 권위주의적인 흔적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진지라는 것을 느꼈다. 평화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남에게 주는 자를 통해서 온더나느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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