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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1 22:42

예수님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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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언                  요 19: 28-30 ,10:7-11
    선한목자 장로교회, 4/16/06
시작하는 말

사람의 一生의 價値란 그이 삶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느냐에서 볼 수 있다. 엘리아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하느님이 그이 삶을 그렇게 높이 評價했다는 것이다. 말틴루터 킹 목사는 刺客의 銃彈에 쓰러지기 前에 “나는 約束의 땅을 보았다” 라고 宣言을 했다. 그렇게도 黑人 解放을 渴望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前 歐羅巴를 휩쓸었던 나폴레온은 쎄인트 헬레나라는 孤島에서 “十字架에 달리신 갈릴리 靑年은 全 世界를 품에 안았는데 나는 홀로 이 孤島에서 죽는구나!“ 라고 탄식했다. 힘만을 믿은 豪傑의 末路를 보여주는 悲劇이다.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最後를 마치셨는가?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十字架에 달린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를 弟子 요한에 매낀 뒤 “tetelestai” 라고 말씀하시고 殞命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끝났다”(It is finished) 라는 헬라 말이다. 이 “끝났다"라는 말의 意味는 여러 가지로 解釋할 수 있다. ‘지루하고 괴롭던 삶이 끝났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奴隸로 고생한 흑인들은 당하는 苦生이 너무 甚해서 삶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저들은 죽음을 解放이라고 생각했었다. ”오! 장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라는 흑인 영가는 죽음을 찬양하는 노래다. 그러나 福音書를 보면 예수님은 苦難을 避하려고 하신 흔적이 없다.
무슨 큰 失手를 한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은 이젠 끝났어” 하고 말한다. 생에 아무 所望이 없는 者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의 삶이란 순간순간 意味로 가득 찼었기 때문
그렇다면 예수님이 “끝났다”라고 하는 말씀의 意味는? 그것은 어떤 目標를 향해서 努力하던 일이 끝났을 때 하는 말이다. 노력하던 일이 完成이 되었다는 말이다. 밀켈란젤로가 로마의 베드로 大寺院 天仗에 몇 달을 두고 全 世界를 놀라게 하는 聖畵들을 그렸다.  그가 計劃한 것을 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붓을 놓으면서  “인제 다 끝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동안 꿈을 가지고 그리던 그림이 完成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意味다. 그가 一生을 두고 애쓰신 일이 完成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룩하시려고 애쓰신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十字架에 달림으로 그것이 完成이 된 것인가?

1. 하느님의 경륜을 이룩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태초 붙어  經綸하신 것을 完成하신 것이다. 요한 복음서 첫 머리에 있는 “말씀이 하느님과 같이 계셨다. 그 말씀이 肉身이 되었다“ 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예수님은 하느님의 經綸을 안고 이 世上에 오셔서 그것을 完成하셨다는 말이다.
그 하느님의 經綸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요한복음서 10 장에 말씀하신 “너희로 삶을 살되 더욱 豊盛하게 살게 하려 함이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로 이 世上에서 신나고 보람찬 삶을 살게 하려고 히신다. 家庭에서 식구들과 오순도순 살고,  동리에서 이웃들과 和睦하게 살고, 나라와 民族들이 서로 위하고 아끼면서 신나게 살게 하려 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경륜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슴 설레는 宣言이다.
이런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창세기 1 장에 있는 創造說話에서 본다. 하느님은 創造하시면서 계속 “좋다, 좋다, 참 좋다”라고 감탄하셨다. 우리의 삶이 참 좋아야 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經綸을 우리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約束에서도 본다. 삶에 필요한 땅을 마련해 주고, 後孫들이 繁盛해서 和睦하게 살고, 民族들이 서로 祝福하면서 사는 그런 未來를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은 世上을 將亡城이라고 하는 生覺과는 完全히 다르다. 물론 이 世上에 罪와 惡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채 알지 못함으로 각 가지 悲劇을 招來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完成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숨을 거두시기 전에“다 이루었다고 宣言을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것을 完成하셨는가?

2. 물을 葡萄酒로

요한 복음서는 2 장 첫머리에 물로 葡萄酒를 만든 기적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 보면 예수님이 가나에 있는 한 잔치 집에 가셨다. 기쁨이 차 넘쳐야 하는 結婚 잔치에 가셨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세상은 잔치집과도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잔치 집은 初喪집과도 같았다. 손님들은 꾸역꾸역 모아드는데 그들을 신나게 하는 葡萄酒가 떨어진 것이다. 잔치 집은 뒤숭숭하고 不安했다. 이 모인 무리들을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世上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기뻐해야 할 세상이 不安과 恐怖에 차 있는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말이다. 서로 責任을 相對方에 轉嫁하면서 分爭을 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런 破興된 잔치 집에 오셨다. 이런 세상이 다시 기쁨에 찬 잔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것을 이룩하셨는가?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平凡한 물을 葡萄酒가 되게 함으로 잔치 집에 삶에 기쁨을 넣어 주셨다. 나날이 있는 일들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삶에 기쁨과 보람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病든 자를 만져 주시고, 외로운 자를 찾아 주시고, 빵을 떼고 葡萄酒를 부어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초상집을 다시 잔치 집으로 만드신 것이다.  사랑으로 말미암는 삶의 奇蹟을 이룩하셨다. 그래서 간 곳마다 기쁨에 찬 하느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2. 악의 勢力과의 對決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하실 일이 完成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擴散이 되는 것을 본 惡魔의 勢力은 있는 힘을 總動員해서 이 새 生命運動에 抗拒했다. 그 勢力은 엄청났다. 로마 帝國이 저들을 抑壓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威力을 등에 업은 大司祭들과 사두게 파 사람들, 백성들의 삶을 左右하는 律法을 손에 든 바리새파 사람들, 심지어 여우와도 같은 헤롯 당까지 합쳐서 攻擊해 왔다.
따라서 어린양과도 같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랑이 重要하다고 해도 暴力을 당할 수 없다고 저들은 느끼게 되었다. 權力 편에 加擔해야 하는 것이 지혜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嚴然한 삶의 現實이라고 저들은 보았다.  예수님이 잡혔을 때 모두 逃亡을 간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런 軟弱한 羊과도 같은 무리들의 牧者였다. 따라서 그는 몸으로 양들을 지키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삯군은 逃亡을 가지만 善한 牧者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이 權力과 正面으로 衝突하시게 되었다. 사랑이 權力보다 强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밀 알 한 알이 썩을 때 오십 배 백 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그의 善하신 經綸이 이룩되고야 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던지기로 決心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요한 복음 서 2 장에 있는 둘째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대 사제가 도사리고 앉은 聖殿을 肅淸했다. 結局 그는  大司祭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빌라도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十字架에 달려서 쓰라린 苦痛을 당하실 뿐만 아니라 무리들에게 誹謗과 嘲笑까지를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苦難을 人類를 사랑하는 心情과 하느님을 믿는 믿으로 다 이겨내셨다. 이렇게 해서 世上에 오신 目的을 다 이룩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목숨을 거두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는 宣言을 하실 수 있었다. 그 偉大하고도 고마운 宣言을 말이다.
이 “다 이루었다” 라는 宣言에 대한 하느님의 應答이 사흘만에 일어난 復活 事件이다. 닫혔던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사셨다. 그리고 어둠의 勢力에 두려워서 떨고 있던 弟子들이 새사람이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트는 새날을 일깨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 죽음의 세력을 분쇄한 승리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맺는 말

그러나 이 惡의 勢力은 오늘도 우리 周邊에 남아 있어서 우리를 不安에 떨게 한다.  우리들의 家庭에 風波를 일으키고 우리 社會에 혼란을 招來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紛亂을 일으켜서 수많은 生命을 無慘히 짓밟는다. 심지어 敎會에 까지 들어와서 風波를 일으킨다.우리는 이와 같은 악의 횡포를 보면서 쉽게 우리는 물에 빠져간 베드로처럼 두려워 떤다. 쉽게 체념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은 敗殘兵의 發惡에 불과하다. 決定的인 戰鬪는 이미 끝난 것이다. 사랑의 勝利는 確保된 것이다. 人類 歷史를 보라. 惡의 勢力은 결국 敗北하고 만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正義가 勝利하게 마련이다. 창을 쳐서 보습을 마들고 칼을 쳐서 낫을 만드는 平和의 날이 오고야 만다. 그러기에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落心하지 말자. 험한 風波가 우리 周邊에서 波濤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꾸준히 사랑의 길을 걷자. 結局 勝利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룩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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