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2003.12.01 22:27

예수님의 기원

조회 수 8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예수님의 환희                                          눅 23: 39-43, 이사야 2: 1-5
      선한목자장로교회,4/6/03
시작하는 말
2000 여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서 세 젊은 청년이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했다. 가운데에는 갈릴리 청년 예수, 그 양편에는 폭력범으로 판결이 된 두 청년 십자가에 달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피투성이가 된 저들의 모습은 처참하기만 했다.
갑짜기 예수님 왼편에 달린 청년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를 향한 비꼬는 말이었다.
그랬더니 예수님 바른 편에 달린 청년이 바른편에 달린 자를 향해서
“너도 꼭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도 두렵지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어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 분이야 무슨 잘못한 것이 있다는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합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드릴 수가 없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형수들이 어떻게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사형수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우리를 아끼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그렇게도 명확하게 묘사해 준다.
이 두 사형수는 정치범이다. 십자가란 정치범을 사형하는 무서운 형틀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젊은이는 다윗 왕국의 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한 열심당원임의 틀림이 없다. 죽음을 앞둔 이 두 열심당원과 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에서 우리는 구원에 관한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된다.

1. 비방하는 첫째 사형수
먼저 첫째 사형수의 삶의 자세를 보자. 그는 다윗 왕국 회복에 대한 신념이 철저한 사람이다. 야훼를 섬가는 저들이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여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화를 이룩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다윗 왕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예수를 빈정대는데서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이 사형수의 신념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 이사야 2 장의 메시아 사상이다. 이 예언에 의하면 시온 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야훼의 성전이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 밑에 조수처럼 몰려 들 것이란다. 그 때 수많은 민족들이 모여 와서 말하기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이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서 배우고 그 길을 따르자.
그가 민족 사이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으리라.“

이 사형수는 이 예언을 굳게 붙잡고 사는 충성스런 유대인이다. 그는 온 인류가 시온 산에 와서 야훼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말씀에 따르는 때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될 때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시대가 온다고 믿었다. 다시는 칼을 들고 싸우는 일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인가. 요즈음 평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야훼의 전이 서 있는 시온산이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야 한다. 그리고 만국이 그 밑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와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든 민족을 제압해야 한다. 이것이 이 청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야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로마가 시온 산 위에 군임하고 있다. 로마 총독이 야훼의 성전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로마군을 못살게 군것이다. 그는 죽는 순간 직전까지도 이 소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갈릴리 청년이 메시아라고 하면서 로마 군병의 손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린다니 이것이야말로 치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앞 둔 순간에도 그를 조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 둘째 죄수
둘째 사형수도 그와 꼭 같은 소신으로 살아왔었다. 어떻게 하든지 힘으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땅 위에 평화가 온다고 믿은 것이다. 그 역시 당당하게 골고다 언덕에 올랐다.
그리다가 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을 했다. 그는 그의 등에 채찍질을 하는 로마 군병들을 향해서 적개심을 가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 우는 여인들을 보고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셨다. 그를 조롱하는 말들이 그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느님에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신다. 저들이 그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런다고 변명을 해 주신다. 이 모든 것을 봤을 때 그는 틀림이 없는 선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아무 죄도 없이 이 무지 목매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와 같이 애국 애족한다는 무리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자기와 같은 무리들의 과오 때문이다.자기들과 같은 무리들의 무지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들의 무지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한 새로운 존재로 돋보였다. 그야 말로 하느님의 심정을 품은 메시아로 보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그는 동료 열심당원을 꾸중하면서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돌아선 것이다.

3. 예수님의 반음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얼굴에는 환희의 물결이 차 넘쳤다. 이 청년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그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던 힘의 철학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깨닫고 삶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한 생명이 깨닫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돌아선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그렇게 기쁘게 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은 목자처럼 그는 마음에 환희를 느낀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처다 보는 젊은이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들어 가게 될 것이다” 라고 대답을 하셨다.
여기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이 죄수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그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미래에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 질 때 그 때 그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놀라운 삶의 진리가 있다. 구원이란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거슬려 죽음의 길로 가던 자들이 깨닫고 돌아설 때 하느님은 그대로 그들을 품에 안아 주신다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목전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멀리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탕자가 깨닫고 돌아오자 하느님은 그를 품에 안아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다. 따라서 이 사형수도 죽기 전에 깨닫고 돌아섰기에 그 순간 예수님과 더불어 영훤한 생맹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에는 기쁨의 물결이 파도친 것이다.

맺는 말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히 힘의 철학이 난무하고 있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었다는 말이다.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혔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보라.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무리들 때문에 간 곳마다 죽음의 참상이 전개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기가 막힌 것은 이 힘의 철퇴를 휘두르는 자들이 자기는 하느님 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저들을 사용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화의 왕국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다윗 왕조의 메시아 사상과 그 모습이 그렇게 같다. 그리고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 악의 축이라고 한다. 자기는 선하고 반대편은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을 위해서 폭력을 써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란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난 자들을 통해서 이룩된다.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사는 자들을 통해서 이룩된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인류의 구원이 이룩된 것처럼.

Title
  1. 예수님은 생명에 이르는 길

    Date2003.12.10 By문영환 Reply0 Views95
    Read More
  2. 부활의 의미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0
    Read More
  3. 예수님의 환희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2
    Read More
  4. 예수님의 선언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5
    Read More
  5. 예수님의 눈물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79
    Read More
  6. 예수님은 생수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9
    Read More
  7. 예수님은 생명의 빵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93
    Read More
  8. 예수님의 기원

    Date2003.12.01 By문영환 Reply0 Views86
    Read More
  9. 동역자의 심성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3
    Read More
  10. 땅 위에 하느님의 뜻이 창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79
    Read More
  11. 사람의 계산과 하느님의 계산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7
    Read More
  12. 가장 용서하기 힘든 일 [문동환 목사]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7
    Read More
  13. 문동환 목사님 설교 코너 개설

    Date2003.11.02 By운영자 Reply0 Views8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