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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역자의 심성     
빌 2: 5-11, 롬 12:9-21
      선한목자장로교회, 2/11/03

    하느님은 계속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사 후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도 이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땅 위에 있을 때 붙어 하느님의 창조대업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탈란트 비유가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다섯 탈란트 받은 사람과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갑절씩을 남겨 주인에게 바쳤다. 주인은 그 부지런히 일한  두 종을 보고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긴다. 네 주인의 기쁨을 나누자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하면서 그 땅에 묻어두었던 한 탈란트를 주님에게 돌려드렸다. 그리자 주인은 분노하시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을 알았다면 최소한 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기라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분노하시면서 그 한 탈란트를 빼었어 열 탈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고 그를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하느님이 우리를 생명을 살리는 그의 일의 동역자로 택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야기에서 열심히 일한 종들은 다 꼭 같이 배나 남겼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자들을 주인은 착하고 신실한 자이라고 칭찬을 하시면서 창조주의 기쁨을 나누게 하신다. 그런데 한 탈란트를 받았던 종을 향해서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중하시고 그의 것을 빼앗고 그에게 중한 처벌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주인은 이 한 탈란트를 받았던 종을 “악한 종”이라 했는가? “게으른 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악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이 질문의 대답이란 그들에게 매겨진 일이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탈란트를 받았던 종은 생명의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한 종이다. 따라서 생명 살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 이렇게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악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열심히 일을 해서 배나 남긴 종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열심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그것이 “착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생명을 살리는 착한 일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일에 성심껏 동참한다면 반드시 이윤을 남긴다. 그것은 하느님과 동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세와 내세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 그 얼마나 고마운 부르심인가? 그러나 이 일에 정성을 다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교회당에 들락날락 하여도 창조주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고 어두운데서 슬피 울게 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그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랑”이다.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그가 주시는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면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동업을 하는 자의 자세이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말은 흔해 빠졌다. 간데 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는다. TV을 봐도 영화관에 가도 모두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길거리에서도 공원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데 세상은 생명에 차 넘치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질투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다. 한숨과 눈물로 병들어가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이에 대해서 바울 선생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속고 있다’ 라고 바울 선생은 한탄을 하셨다. 그 거짓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많은 사랑은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다. 무엇이고 사랑하는 척하고는 그 대가를 받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장사속 사랑이다. 많은 경우 ‘연애’라는 것이 그런 사랑이다. 내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종종 학생들과 상담을 했다. 한 번은 한 학생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자기가 어떤 여학생을 사랑하여 그를 극장에도 데리고 가기도 하고 좋은 식당에도 데리고 가기도 하고 선물도 사주기도 했는데 그 여학생이 그것을 따먹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극장에도 데리고 가 주고 음식도 사 주고 선물도 사 주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랬다고 머리를 끄덕거리었다. 주었으면 준 것이지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문제다. 결국 이 주었다는 것은 준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미끼로 던진 것에 불과하다.  장사속 사랑이다.

    많은 경우 우리들의 사랑은 받기 위해서 주는 장사 속의 사랑이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장사속 사랑이기에 자기에게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길 때는 떠나버리고 만다. 많은 결혼 생활도 그래서 파탄이 난다. 결혼 할 때는 상대방이 나에게 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한다. 그리고 결혼한 뒤에는 서로 상대방에서 이것저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주는 것엔 인색하고 달라는 것이 많을 때는 그 결혼에는 파탄이 온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다. 그가 나에게 여러 가지로 유익할 것 같으면 가까이 가서 친절하게 사귄다. 그러나 장사 속이 맞지 않을 때에는 서로 갈라져서 원수가 된다. 나는 정치계에서 이런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랑은 자기애의 연장선상에서의 사랑이다.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 그 가장 좋은 예다.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자기 사랑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정말 자녀들을 한 독립한 인간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들의 삶이 자주 독립해서 멋있게 뻗어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부모들의 꿈을 자녀들에게 둘러씌워서 그들이 못다 한 것을 자녀들을 통해서 이룩하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 자녀들의 주체성을 죽여버리고 그들의 정상적인 성장에 지장을 준다. 소위 “치마 바람”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요즈음 미국에서 “애국심”이라는 것을 몹시 강조한다. 이 애국심도 자기애의 연장이다. 다른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염두에도 없다. 요즈음 미국의 Patriotic Act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국익만을 강조한다. 한국군을 이랔에 파병하는 일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 국익을 더 얻으면 된다고 말한다. 억울하게 죽어 가는 젊은이나 이락 국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줄지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기 나라만 잘되면 그것으로 전부이다. 이런 자기애의 연장이 인류 사회에 커다란 폐해를 준다. 이런 사랑이란 다 거짓 사랑이다. 하느님은 이것을 악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참 순수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바울 선생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신다. 악한 것이란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선한 것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이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오갈 때 생명은 피어난다. 그러나 생명을 무시하고 이를 천대할 때 생명은 죽어간다. 화초를 길러본 사람은 이것을 잘 안다. 애환 동물을 길러 본 사람도 이것을 잘 안다. 그들을 사랑으로 돌볼 때 저들은 신나게 자란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랑을 만나보기란 그렇게도 힘든다. 참된 사랑이란 순수한 사랑을 받아보아야 자라는 것인데 우리를 둘러싼 사랑이란 거이 다 장사속 사랑이 아니면 자기애의 연장에 불과 하다. 반면에 간 곳마다 생명을 죽이는 미움과 질투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우리 눈에는 으르렁거리는 이리 때들 밖에 보이지 않고 우리 머리는 자기를 생각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저자에서 놀이하는 어린이들에게 비유하셨다. 저들이 결혼식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을 추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곡을 하여도 아무도 울지 않는다고. 자기 욕심이 눈을 가리고 마음이 둔화되어 생명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냉형 동물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우리는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을 수 있는 심정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살과도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에 변화가 있기 위해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부닥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참된 사랑이 무엇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받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오게 된다. 그 예수님의 심정이란 무엇인가?

    빌립보인서 2 장에 기록된 원시 교회의 예수 찬가에 그의 심정이 아름답게 표현이 되었다.

    그는 본래 하느님과 같은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 되려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위      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      라고 고백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심으로 하느님에게 수많은 열매를 돌려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는 그렇게 자기를 낮추셨는가? 그것은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참된 삶을 위하여 자신을 주시지 않으실 수가 없으셨다. 그들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어 깊이에서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태 복음서 9 장 35-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모든 촌락을 돌아다니시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무리들의 질병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병들고 시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발 벗고 나서서 그들을 사랑을 돌보셨다. 그렇게 함으로 한 생명이라도 건지면은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처럼 동리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를 버리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갈릴리에 있는 가난한 농민은 물론 지중해 연변의 천민들까지 에스겔 골짜기의 군대처럼 늠늠한 생명체로 부활한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그의 뜨거운 심정에 부닥쳐야 한다. 그래야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새로운 심정의 소유자가 된다. 그래야 우리들도 생명을 살리는 열매를 맺고 창조주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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