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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하느님의 뜻이 창 <2: 18-23, 계 21: 1-5>

문동환 목사
-선한목자장로교회, 26/10/03



지난 목요일 성서 공부시간에 '저는 천당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여신도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 대부분의 교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천당"이라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하늘 나라에는 교회당과도 같은 큰 전당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직 물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여기의 "하늘"이라는 말도 아직 현세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끝없이 확장이 되는 우주 어느 곳에 하늘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 부분의 교인들이 천당이라고 할 때 그것은 죽은 후에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하는 질문이다.

1. 고난받는 이들의 소원

이것은 우리 대부분의 크리스쳔들이 가지는 관심사이다. 특히 땅 위에서 고생을 많이 한 크리스쳔들이 이에 더 관심이 있다. 남자 교인보다 여자 교인들이, 특히 여러 가지 고생을 겪은 노인들이 이에 더 관심을 가진다.

천국에 대해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나는 오랜 동안 노예 생활을 한 흑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저들은 죽음을 괴로운 세상에서의 해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백인들에게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당 간다"라는 말을 들자 천당이야말로 저들이 가야 할 도피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저들은 천당을 바라보면서 그 괴로운 삶을 이겨나갔다. 그들의 영가를 보면 이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내려오네. 불 수레가. 날 데리려 내려오네.
내려오네. 불 수레가. 날 데리려 내려오네.
천당에 가 본 일이 없어도 난 들어서 잘 아네.
천당에는 거리들도 황금이래요.
내려오네, 불 수레가. 날 데리려 내려오네.
(Swing low. Sweet chariot.)


오호 자유. 오호 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
지금 얽매었으나 나는 결국 자유 하리.
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Oh freedom. oh freedom )

도주하리. 도주하리. 예수님에게로 도주하리
도주하리. 도주하리.
난 여기에 오래 있지 않으리.
(Steal away to Jesus)

고생 많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말하자면 고해 같은 세상에서 해방이 되는 죽음에서 그들은 구원을 본 것이다.


2. 특권자들의 고백

그런데 놀랍게도 성서 안에서 이 땅의 삶이란 "허무한 거"이라고 고백하는 자란 가진 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뿐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솔로몬이 지었다는 전도서는 "헛되다. 핫 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왕위에 높이 앉아 가지각색의 영화를 다 누려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느껴진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솔로몬뿐만이 아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각가지 영예를 누린 자들은 거이 다 그런 고백을 한다. 땅 위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를 이룩한 자들이란 헬라인들이다. 저들은 노예들의 피땀 위에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었다. 그런데 이 헬라문화를 창출한 철인들의 결론이란 땅 위의 모든 것이란 그림자와도 같이 헛되다고 보았다. 참된 것은 저 세상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헛된 비극에 다름이 없다고 그들은 표현했다. 영웅호걸들이 날개를 뻗어 하늘에 올라가는가 하면 화살에 맞아 비참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저들은 신을 질투심이 많은 심술꾸러기라고 보았다. 사람이 신나게 되는 것을 질투해서 추락시킨다는 것이다.

인도의 부라만 족의 철학도 그랬다. 부라만 족이란 인도 캐스트 가운데 가중 으뜸이 되는 캐스트이다. 그런데 그들의 철학도 삶이란 공허한 것, 구원이란 이에서 해방을 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의 해탈도 같은 철학 위에 수립이 되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이 세상은 허망한 곳이라고 보아 이에서 해방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땅 위에서 영화를 누린 자들이 이 세상을 헛된 곳이라고 하면서 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다. 그러나 저들의 삶을 그 심층에서 살펴본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 지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솔로몬의 삶을 주시해 보면 우리는 이를 알 수 있다. 다윗의 애첩에게서 나 총애를 받은 그는 권좌에 눈독을 드린 형들을 다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좌에 오른 그는 앞날의 안전을 위해서 형들을 서정 없이 다 시해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정책에 따라 힘을 길러서 주변 민족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종으로 삼아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을 남길 도성들을 지었다. 성전과 자기 궁전을 삼엄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과정에 사울의 전통을 이어받은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도 혹사를 당했다. 아내 천 명 식이나 두고 즐기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동양에서 가장 지혜가 있는 왕이라고 칭송을 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삶이란 언제나 간장과 초조 가운데 살았다. 제 나름으로 힘을 기른 형들을 시해했을 때 그들에게 속했던 무리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주변의 민족을 짓밟았을 때 그들이라고 수수방관하고 있을 까닭도 없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했을 때 그들과의 사이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군을 길러서 이 모든 세력을 억압하려고 애쓰는 그는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반란이 생겨서 그를 괴롭힌 것을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힘을 길러서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 할 때 그의 자식들 역시 힘과 영광을 삶의 목표로 삼고 무자비한 투쟁을 일 삼게 된다. 다윗의 아들들이 왕좌를 위해서 투쟁한 것이 이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르호보암의 삶의 자세도 이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를 보내어 진정서를 냈다. 새로 등극한 왕은 부왕 솔로몬처럼 우리를 학대하지 마시고 자비롭게 대해 달라고 말이다. 이 진정서에 르호보암이 한 대답을 보라. "내 아버지의 허리는 내 새끼손가락만 하다. 내 아버지가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다스렸다면 나는 쇠 채찍으로 다스리리라." 이런 자식들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우리 속담에 "맞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자나 때린 사람은 다리를 가두고 잔다" 라는 말대로 강자들의 마음이란 언제나 불안 가운데 긴장하고 있다. 그리다가 죽음에 부닥치게 되면 허무하기 그지없게 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한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핼라 철학도 인도 철학도 이런 강자들의 서글픈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들의 주변을 둘러보아도 알 수 있다. 폭력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았던 전두환의 삶을 보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백담사로 쫓겨 가드니 노태우 대통령과 같이 감옥사리 경험도 했다. 그리다가 석방이 되어 편히 죽는가 했더니 최근에는 그의 집과 가구들이 다 경매에 붙여지게 되는 서글픔을 겪고 있다.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모습도 이와 꼭 같다. 그 엄청난 무력으로 이락을 침공하여 삽시간에 후세인을 쫓아내고 새 이락을 창출한다고 했을 때의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부시 대통령까지도 요즘의 새 역사의 주역은 럼스펠드라고 그를 추켜 올렸었다. 그런데 작금의 럼스펠드의 얼굴을 보라. 불안과 초조에 물들고 있지 않은가. 저들 역시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탄식을 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3. 소망에 찬 고난의 백성

그런데 성서를 살펴보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고난에 고난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은 것이다. 강자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쫓겨나 떠돌이가 된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을 통해서 민족과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사는 세상이 올 것을 믿으면서 눈을 감았다. 애굽에서 탈출한 노예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서 과부, 고아, 나그네까지 안심하고 사는 평등공동체를 꿈꾸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죄인 취급을 받은 갈릴리 농민들은 저들 사이에 탄생한 신생의 잔치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믿으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요한 계시록 21장에 그려진 새 예루살렘은 그 꿈이 이룩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려 본 것이다. 그 도성에는 황금 길과 진주 문들이 있다고 그려졌으나 그것이 그 도시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 도시의 참 모습은 도시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보좌이다. 그 도시 주민들은 언제나 하느님과 같이 산다. 그리고 그 보좌에서 비치는 빛이 온 도성을 밝혀서 다시는 해도 달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진리의 빛이 어제나 환히 비쳐서 목사도 교사도 필요가 없다! 는 말이다. 거기에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깨우쳐주신 어린양이 계시지 않는가. 그리고 그 보좌에서 생명 강이 솟아서 도시 한 가운데로 흐르고 그 양편 가에는 철마다 열매를 맺는 생명과일 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다. 그리고 그 나무 잎은 만병통치약이 된다. 생명이 차 넘치는 새 예루살렘이다.

거기에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 세계의 여러 민족들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서로 싸우기를 일삼든 저들이 그곳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이란 싸움에 이긴 전승패가 아니라 변하여 새 마음이 되어 백성을 정의롭게 다스린 것에 대한 훈장들이다. 이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 위에 내려온다고 계시록은 말한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 나라가 땅 위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런 도성을 보여준 하느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하고 선언을 하신다. 그는 세상을 계속 새롭게 재창조하신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고난에 고난을 겪은 저들이 이런 아름다운 소망을 가질 수가 있은 것인가?

그들은 일찍 붙어 하느님은 선하신 분, 사랑으로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가 창조하신 삶이란 신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고해와도 같은 세상에 산 저들이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그것은 고난을 받은 자만이 생명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생명이 소중한 것을 아는 자들이 한데 모이면 거기에 사랑으로 서로 주고받는 이름다운 친교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코이노니아에서 삶의 진미를 맛보게 되고 그런 삶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이 진리를 창세기 2 장에 있는 환희에 찬 아담의 찬가에서 본다. 창세기 2 장에 보면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에덴 동산을 마련해 주신다. 그리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안 되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내시어 해와를 만드신다. 그 해와를 본 아담의 얼굴에서는 해바라기와도 같은 웃음의 꽃이 환히 피어오르면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다" 라고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아무 막는 담 없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란 자기만 생각하는 강자들에 세계에는 있을 수 없다. 약하다고 서러움을 당하는 약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경험한 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삶이요 이와 같은 삶 뒤에는 창조주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게 된다. 저들에게 있어서 이 믿음이야말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요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퍼지고 퍼져 인류사회가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예수를 중심으로 한 갈릴리 공동체는 이것을 그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라고 믿었다.



맺는 말

사후에 가는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이냐는 질문이 아직도 남는다. 이 물음의 대답은 "사 후의 하느님 나라는 땅 위에서 누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땅 위에서 벌서 하느님과 같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육신을 가진 대로 말이다. 죽은 다음에는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영으로 하느님과 같이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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