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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용서하기 힘든 일        롬 7:18-25, 시 130: 1-8
     
-문동환 목사

선한목자 장로교회, 10/12/03


세상에서 가장 용서하기 힘든 일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흔히 원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에게 해를 기친 원수를 용서하는 일이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크게 생각하고 보면 원수를 용서하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이웃의 생명을 아끼는 심정이 있는 자라면 원수의 패망을 보고 오히려 마음 아파할 뿐 그의 심판을 기뻐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당했을 때 느꼈었다. 그가 암살 당한 것을 받아야 할 벌을 받았지 하고 속시원하게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용서하기 힘든 일이란 자기를 용서하는 일이다. 우리들의 잘못을 통해서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우리는 자책감을 느낀다. 우리의 잘못이 이웃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때 우리 가슴은 쓰라려 온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내 남편에게, 혹은 내 아내와 자식, 혹은 우리 이웃에게 쓰라림 아픔을 줄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자책감은 더욱 크다. 그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우리들의 영향권 밖으로 나갔을 때는 우리의 자책감은 더 심해진다. 그리고 이런 자책감은 우리들의 삶을 좀먹듯 먹어간다.

한 평생 사는 동안 그런 과오를 겪어 보지 않은 자가 없다. 어떤 경우는 미처 알지 못하고 그런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나의 욕심 때문에 혹은 뒤틀린 감정에 사로잡혀서그런 과오를 범하는 수도 너무나 많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흔히 자기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 때의 정황이 그랬으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책임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지!” 하고 말이다. 그런 비참한 자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포자기하고 함부로 살아버리기도 한다. “나란 별수 없는 존재. 인제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자기 홀로 있는 종용한 시간에는 이 자책감이 되살아난다. “왜 내가 그랬던고? 그가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나 때문에 그가 결정적인 희생을 당한 것은 아닌가?” “이 죄 값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극히 적은 자 한 사람이라도 범죄케 했다면 차라리 망돌을 목에 매고 물에 빠지라고 했는데”하고 고민을 한다.

나는 감옥 독방에 있으면서 이런 죄책감에 몹시 시달렸다. 감옥 독방에 있으면 흔히 과거 일들이 아지랑이처럼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과거의 즐거웠던 일 보다 잘못했던 일들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그 때 왜 내가 그렇게 했던고?”하고 말이다. 그들이 받았을 상처, 그로 말이 암아 그들이 받았을 삶의 피해 등을 생각할 때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한 일 가운데 내가 앞으로 잘못했다고 화해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일들은 그런 화해가 불가능하게 된 것들이다.  내가 상처를 준 자들이 이미 죽었거나 내가 접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例 하나만 들어보자.

내가 서울 사직 동에 있는 수도교회에서 약 6 년간 강단을 맡아 설교를 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기에 설교를 하면서 당회장으로 교회의 중요한 일 만을 처리하고 남아지는 젊은 전도사가 돌보았다. 당시 나는 부자나 강자는 흔히 하느님의 일에 역행한다는 해방신학에 젖어 있었을 때이기에 정부와 결탁하여 자기 부만을 챙기는 기업가들을 질책하는 설교를 많이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교회에는 사장 급이 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돈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들이 몇이 있었다. 그들의 불평은 “우리들은 험한 세파와 씨름을 하면서 피곤해 있는데 위로하는 말을 듣고 싶은데 교회에까지 와서 힘든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서 위로의 말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들을 위로할 말이 없었다. 예수님 까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다“라고 말씀하셨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더니 내가 그들의 그릇된 것만을 꾸중을 하고 그들이 치열한 투쟁 장에서 겪는 고민은 전연 이해해 주지를 못했었다. 저들은 투쟁이 격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크리스쳔으로 그런 삶을 살려고 했을 때 우리 성직자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고민과 투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해해 주지 못하면서 그들을 질타하기만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사랑의 행위는 아니다. 그들을 찾아 그들의 쓰라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과 더불어 그 문제들과 씨름했어야 하는 것인데 인정사정 없이 그들 어깨에 무거운 짐만을 지원 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생각했을 때 괴롭고 마음이 아파 왔다. 특히 그 중 한 분은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밖에도 나를 괴롭힌 여러 가지 과오들이 가시 넝쿨처럼 내 마음을 휘감아 밤잠을 설치는 때가 많았다.  그리면서 나는 시편 130편이 마음에 떠올랐다.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애원하는 소리 귀기울여 들으소서.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이를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사람 치고 이런 고민을 겪지 않는 자가 땅 위에는 없다. 하느님이 이런 우리들의 죄과를 살피신다면 이를 감당한 자가 없다. 바울 선생도 그래서 이렇게 비명을 올렸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
누가 나를 이 죽음의 육체에서 구해줄 것인가?“ 라고.

그가 그렇게 애써서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절감을 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 선생도 같은 고민을 했다. 그가 설교를 했을 때나 공중 기도를 했을 때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만 정성을 다하려 했으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를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역시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
누가 나를 이 죽음의 육체에서 구해 줄 것인가?“라고 한탄을 했다.

이렇게 진지하게 자기와 싸운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남에게 심한 해를 끼친 내가 어찌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갸?

이에 대한 복음은 무엇인가? 시편 130편을 쓴 시인은 이런 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라는 신앙고백이다.

그 만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것을 바로 잡아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의 용서하심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 명확하게 나타났다. 보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돌아서기만 하라. 하느님 나라가 문전에 도달했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탕자의 비유 역시 이것을 말한다.  아버지 품을 떠나 도야지 팥 껍질로 충복을 하려든 그가 자신의 무모했던 과거를 자책했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가 깨닫고 돌아서자 그는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한 형보다 더 하느님의 아들다운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보라. 갈릴리 지방에 있은 죄인 취급을 받아 자포자기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삶에서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마나 돌아서자 다 새사람으로 재생하지 않았는가? 사도 행전을 보면 돈 가진 자들이나 사제들까지도 돌아서서 새 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 중에도 으뜸가는 바리새파 사람인 바울 까지도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라는 찬사를.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다시 받아 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고마운 심정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과오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을 받아드리는 것이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그러나 돌아선다는 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랑의 삶이 뒤따르지 않는 돌아섬이란 빛 좋은 개살구와도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 선생도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반드시 사랑의 삶을 강조하셨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할 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심지어 남을 위해서 내가 불 속에 뛰어든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드려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삶에 생명의 열매가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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