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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
                        창 12:1-3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우리가 지금 사는 곳으로 옮겨 살게 된 데는 마지못할 어떤 사연이 있어서? 어떤 꿈이 있어서?
2.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게 된 동기는?  목적은?
3. 누가 “복 받았다”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는 화가 되는 경우는 없을까?
4.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떤 사람이 “화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반대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떤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5. 행불행을 결정하는 요인은? (사람이 화의 근원일까? 복의 근원일까?) 
6. 창조이야기는 사람을 저주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까? (창조이야기의 목적은?) 
7. 성경에 처음 나오는 창조이야기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이야기는 그 내용에 있어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별개의 이야기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창조 이야기에 남겨진 어떤 문제를 아브라함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일까?
8. 아브라함을 이민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 이라고? (종교의 목적은?)
9. 모든 종교에는 복을 비는 기복행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특정 종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은 무엇일까?
10.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는데, 이 말은 그가 복의 근원이었다는 말일까? 화의 근원이었다는 말일까? 화의 근원이었다면 어떤 잘못이 있었을까? 
11. 그가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12.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와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같은 말일까?
13. “복의 근원”이 된 이는 세상에서  박해받는 일은 없을까? 왜 그럴까?

이민들의 사연과 꿈

아브라함이야기를 한갓 옛이야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뜻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역사상 언제나 있는 이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동물들은 물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도, 새 땅에서 번식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들이 옮겨 자라게 한 데는 어떤 원인(동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대륙 지방에서 한 반도로 옮겨 산 데도 그랬어야 할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북미주에는 원주민이 소수로 밀리고 이민자들이 다수가 되었습니다. 원주민들도 아세아대륙에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다 어떤 사연이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북미주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그 조상들이 노예로 팔려 강제로 실려 왔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듯 노예로 끌려왔답니다. 노예 상인들의 욕심이 동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최근에는 한 반도에서 뿌리 내렸던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다른 나라로 옮겨 사는 예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어떤 사연이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고, 이상과 꿈이 동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살던 곳을 떠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왜 떠나게 되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예를 들면 공주의 양자였던 모세가 수십 년 동안 이집트를 떠났던 것은 살인자로서 도망쳤어야 했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불가피한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성경에는 이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습니다만, 조상 때 우르 지방을 떠나 그곳으로 갔던 이민 가정으로서, 그 곳에서는 뿌리내릴 수 없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이야기에서는 어떤 사연 때문에  떠났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떠났다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12:2-3).

여기에는 보통 이민들이 갖는 꿈과 이상과 비슷한 것이 있으면서도 전연 다른 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가 “큰 민족이 되고” “복을 받아 이름을 떨치게”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났다면, 꿈을 따라 가는 이민자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복을 받는다” “이름을 떨친다”는 등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이상”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복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화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연 때문에 또는 꿈이 있어서 유럽을 떠나 북미주에 건너온 이민들이 원주민들의 문화와 인종말살정책에 성공하고 그 땅을 차지했다면, 원주민들에게는 화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북미주에 온 모든 이민의 후손이 “우리 조상이 북미주로 이민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노예로 끌려온 희생자 흑인의 후손이 “우리 조상이 북미주에 노예로 끌려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희생자 흑인이 아닌 가해자 백인의 후손이 “우리 조상이 북미주에 와서 흑인의 조상을 노예로 끌어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돈을 번 경우 경쟁자는 물론 많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치부했어도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기 사는 원주민들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옛 땅에서 눌림을 당하던 약자가 새 땅에 가서 남을 누르는 강자가 되는 것은 옛 땅의 잘못을 새 땅에서 재연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닐까요? 남 죽이고 빼앗는 강자됨이 하나님의 복일까요? 비록 아브라함이 살던 땅에서 변두리 인생으로 약자였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서는 약자를 누르는 강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런 것이 아닌 것을 이 성경 이야기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곧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고만 하신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셨다고 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12:2,3). 이점이 보통 이민들이 품을 수 있는 꿈과 다른 점입니다. 이점이 성경의 아브라함이야기의 특징입니다. 남에게 화의 근원이 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화의 근원이 됨은 저주받음이고, 복의 근원됨이 축복받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상을 좇아서 인생의 길을 떠나되, 화의 근원 이 아니고, 복의 근원 이 되는 것이 나그네 인생의 가장 이상적인 최종목표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락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원인 역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빈 라덴이냐, 사담 후세인이냐, 죠지 부쉬냐, 아니면 세 사람 전부냐(군수 업으로 돈벌이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겠지만, 또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고,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사람이 화의 근원인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자들도 자녀교육에 바치는 정성은 지극합니다. 자녀들 장래의 행복을 위해서 자녀교육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이나 교역자들 중에는 자녀 교육이나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라고 보고,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만 잘 기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식들의 행복과 그 집안의 행복이 이런 부모들이 생각지도 못할 다른 곳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습니다. 예를 든다면, 자식과 집안의 행복과 불행이 자녀의 배우자가 될 어떤 아이가, 지금 어디서,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가정교육을 받고, 어떤 교회에서, 어떤 종교(또는 종교 울타리 밖)에서, 사회에서 어떤 친구들과 어울려서,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 지에 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불행의 절대적인 요인이 어떤 사람이(어떤 며느리만이 아니고 어떤 사위가) 들어오느냐(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느냐)에 달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되지 못한 사람이 들어오면(또는 만나면) 부부만 불행한 것이 아니고, 그 집안에 화의 근원이 들어온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배우자로 들어올 사람이 반드시 화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31. 기도 -며느릿감 선택(기준) 이야기- 창세기 24장> 역시 미지수이긴 한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자식만이 아니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두고도 “자식은 애물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어떤 자식을 두고 “그놈이 그 집안에 복덩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사람이 화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 창조이야기에서 사람이 복의 근원? 화의 근원?

불행한 일이 생길 때, 그 원인으로는 1) 질병을 포함해서, 지진, 태풍, 해일 등 자연적인 원인에서 생기는 경우가 있고, 2) 사람이 화의 근원일 경우가 있는데, 성경 창조이야기에서는 자연적인 재해까지도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저주받았다는 에덴동산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원인이 된 이 저주는 자연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첫 가정에도 불행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생 아벨의 한 맺힌 피가 땅을 저주하고,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람 지으신 일을 후회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시기 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조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바벨탑이야기로 마감되는데 여기까지 인간이 화의 근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복의 근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첨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그저 “축복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우리말 번역에는,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개역, 표준),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공동), 또는 “너는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현대어) 등 여러 가지로 달리 번역되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이 복을 전달하는 자이어서 “복의 전달자”라는 표현이 맞는 말이긴 하겠습니다. 그런데 3절을 번역할 때 모든 번역본들이 다같이,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의 근원”이라는 표현이 무방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화의 근원”이 되는 경우와 대조되는 표현이어서, 이 “복의 근원” 이라는 표현도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어 번역에는 “祝福의基” 또는 “祝福의源”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적인 재해도 인간 때문이라는 뜻

앞으로 전 세계에 물난리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 원인인 화의 근원이 대기 오염 등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재난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는 성경의 입장에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바다 속 깊은 지각의 충돌에서 생기는 지진과 해일 등 사람이 원인이 아닌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성경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고 있을까 하는 질문도 해보게 됩니다. 성경이야기가 생겼을 때는 물론, 성경이 글로 쓰일 때에도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었으니,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이 성경이야기에는 없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야기의 본뜻은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열쇠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연적인 원인에서 생긴 불행을 포함한,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하지, 자연이 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조이야기에서도 사람의 죄가 홍수심판을 초래했지만, 그 후 새 세상을 가져오는 일에는 노아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다고 한 것입니다.
                         
창조이야기와 아브라함이야기와의 관계

이런 것을 보면 이 창조이야기는 “사람이 저주다,” “사람은 축복이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1) 첫째, “사람에게는 화의 근원이 될 가능성도 있었고,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그리고 상실하게 된 이유)을 말하고 있으면서, 여기서 끝나지 않고, 2) 둘째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상실되었던,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창조이야기 중 에덴동산(타락)이야기는 주로 인간이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어떻게 상실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말하고 있고 <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1) -복의 근원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화의 근원이 됨-, 10.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창조이야기 중 노아이야기는 잃어버린 복의 가능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18. 홍수 이야기, 19. 무지개 이야기> 그리고 창조이야기 다음에(창세기12장-50장까지)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야기에는 화의 근원이었던 사람이 복의 근원으로 회복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로 장자권을 두고 화의 근원이 되었던 야곱이 후에 참회하고 형과 화해함으로 복의 근원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와<33. 축복(2)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화해->, 요셉의 10형들이 화의 근원이 되었다가 후에 참회해서 <36. 꿈(3) -꿈을 죽인 형들과 꿈을 살린 동생의 화해-> 복의 근원됨을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될 집안의 며느리 감을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 기준을 고안해 낸 엘리에셀이야기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31. 기도 -며느릿감 선택기준 이야기->

그래서 아브라함이야기와 그 이후의 성경이야기들은 창조이야기와 무관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고 창조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상실)에 대한 해답(회복)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속되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복 받음보다 복의 근원됨

앞 장에서 성경의 아브라함이야기의 목적은 한갓 특정 민족의 시조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이야기는 무엇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이 아브라함을 이민자로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주셨다는 말씀에 있다고 보입니다. 곧 지금까지 살아온 그곳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곳으로 가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창12:1-3)이라고 하셨다는 말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복을 비는 기복행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복을 받는다”라기보다는, “복의 근원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복을 끼치고 전해 주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이 점이 성서종교의 뛰어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이스라엘민족을 선택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선민사상의 핵심도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다른 민족을 살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만이 아니고, 이슬람교에서도 아브라함을 저들의 선조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며, 두 민족이 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다는 이 말씀이, 곧 각각 다른 민족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일 것입니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나라의 교인들도 최신식 무기를 동원해서 타민족은 살상해도 좋다는 식의 전쟁찬성론 일변도로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구일일(911) 살생이 어떤 연유에서 감행되었다고 해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정당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식의 종교는 그 정신에 있어서 성경 이야기의 수준에 못 미쳤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민족의 부모든 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달라지도록 모든 종교는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 자식은 죽지 않고, 남의 자식은 죽어도 좋다는 식의 기도는 어느 종교인의 기도이건 바른 기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 수상의 야수꾸니 신사 참배가 문제 되었지만, 그 일본 종교가 지난날에 자기나라 자식들이 총칼을 들고 나가, 동남아의 모든 백성들을 죽이고, 중국인도 죽이고, 조선민족도 다 죽여도 된다는 식의 입장을 취했던 점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그 종교가 남의 민족도 위한 종교가 된다면, 수상이 한 두 번의 신사참배가 아니라, 아예 신사에 가서 살림을 차리고 거기서 정무를 본다고 해도 다른 민족들이 항의할 이가 없고 오히려 환영할 일일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 민족만이 아니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경지에 이를 때까지, 모든 종교는 종전의 입장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기도이건,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이점은 31. 기도 -며느리 감 선택 기준이야기-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라야 바른 기도일 것입니다. 내 자식이 다른 민족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라는 기도 이외에 바른 기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종교인들의 기도는, 성장한 자식을 둔 이들은 물론, 특히 아직 어린 아이를 가지신 이들과, 앞으로 아이를 갖게 되어 태 교육부터 시작할 기회를 가진 이들의 자식을 위한 기도는, 자기들만이 아니고 다른 민족을 위해서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라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고, 그 결과가 삼사십년 후에 어떻게 나타날 지 믿음으로 기다려 볼 일이겠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생은 다 이민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도, 죽어서 죽음후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다 이민이라는 뜻으로 봐도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이민자가 되게 하신 목적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심이라는 이 성경 이야기는 성서종교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나그네 인생이고, 이민자 인생인 모든 이들의 목적이 다릅니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도 많습니다. 이민에 대한 창조주의 목적은 화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는 일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살아온 곳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곳으로 가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떠나기 이전에, 이미 복의 근원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과거에는 화의 근원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복의 근원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아담의 후예라는 점에서 응당 화의 근원이었겠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화의 근원이 되었을까?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1) 과거에 그가 해서는 안 될 어떤 악행을 행해서 화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일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난 다음에 화의 근원이 되었던 일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왕실에 들여보내서, 자기 목숨도 보존하고, 재물도 얻었는데, 이 일이 왕실에 화를 불러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전연 무근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배다른 엄마의 딸이어서 반은 누이이긴 한 것이었답니다. <25.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던 이야기> 이런 경우라도 결혼한 부부로서는 부인이라는 외길만 있는 것이지, 누이라고도 해도 된다는 것은 “뱀”의 합리화인 것입니다.

2) 화의 근원이 될 어떤 악행을 직접 감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몸 둔 그 공동체에서 어떤 잘못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심지어 전연 모르고 함께 끼어들어 화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악의가 있어서만이 아니고 어리석어도 화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됨에 요청되는 두 가지 조건

하나님은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 아브라함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1) 지금까지 살아온 곳(과거에서)을 떠나, 2) 이제부터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곳으로(제 길을) 가면이라는 두 조건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3.“떠나라”>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와 복의 근원됨 

새해가 되면 서로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누구나 하는 말로 빈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담감도 책임감도 없이 가벼이 할 수 있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새해에 복의 근원이 되십시오!”라고 인사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은 “당신은 손해를 보고, 나는 이익을 보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복의 근원됨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남에게 “새해 복의 근원이 되십시오”라는 인사는 자신이 “새해에 나는 복의 근원이 되려고 합니다”는 결의와 각오를 먼저 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을 알기에 먼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새해에 화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 되는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쯤 되어서도 남에게는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해에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는 말은 “당신은 화의 근원입니다(아니면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해부터는 부디 복의 근원이 되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됨과 박해

“복의 근원”이 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기성 체제에서 혜택을 누리는 소수는 전체에게 화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화의 근원이 된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된 사람을 박해하게 마련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 이를 자기들에게 해로운 존재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 틀에 처형당하신 것은 예수님이 “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복의 근원”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사회에서 화의 근원이 되어 있는 사람들(당시 교권을 장악한 제사장 등)에게는 예수님이 “화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처형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창12:3)라고 해서, 복의 근원이 된 이를 축복하지 못하고 저주하는 일이 있게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 이를 축복하는 사회는 이미 복 받은 사회이고, 복의 근원이 된 이를 저주하는 사회는 이미 저주받은 사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사회를 축복 받은 사회로 바로 잡는 첫 발걸음이 우선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지만 화의 근원인 듯 오해받는 길뿐이었기에 예수님은 이 길을 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12:3)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들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떠난 다음에 어떤 일들이 생기고 어떻게 처신했느냐?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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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2004.01.31 17:14
    목사님, 지난 주 설교문도 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성찰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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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정섭 2004.02.02 00:30
    목사님의 귀한 말씀 마음에 잘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올 한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복 많이 지으시고, 복 많이 나누시는 한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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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정희 2007.10.07 20:22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복의 근원, 나를 만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는 사람...그렇군요. 복을 받으려는게 아니라 복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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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4. `보여주실 땅`으로 가면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둘째 조건-

    Date2004.04.12 By이재형 Reply2 Views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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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3.“떠나라”?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첫 조건-

    Date2004.03.13 By이재형 Reply3 Views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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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03. `룻기` 이야기 -`도중하차`식 성경해석의 문제 (예2)-

    Date2004.02.23 By이재형 Reply1 Views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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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2. `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

    Date2004.01.31 By이재형 Reply3 Views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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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04. 과부의 헌금 이야기 - `우물안 개구리`식 성경해석의 문제(예 3)-

    Date2004.01.20 By이재형 Reply0 Views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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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1.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아브라함, 아내들, 그 후손들 이야기

    Date2004.01.17 By이재형 Reply1 Views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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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 바벨탑 이야기 -힘과 혼돈-

    Date2004.01.10 By이재형 Reply0 Views2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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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9.“무지개”이야기 -새 세상을 위한 언약-

    Date2004.01.03 By이재형 Reply0 Views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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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8.“홍수”이야기 -폭력 세상의 마감-

    Date2003.12.27 By이재형 Reply0 Views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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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7. 왜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을까?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2)-

    Date2003.12.20 By이재형 Reply0 Views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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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6. 화난 마음의 계획은 다스려야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1)-

    Date2003.12.14 By이재형 Reply0 Views2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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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5. `임신의 고통과 해산의 진통`? -에덴동산 바깥세상에서-

    Date2003.12.06 By이재형 Reply1 Views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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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4.“하나님의 형상”?

    Date2003.11.30 By이재형 Reply1 Views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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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3.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네가 어디 있느냐?`-

    Date2003.11.22 By이재형 Reply1 Views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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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06. 성경에“악마”의 말도 -거룩한 책이라는 선입관에 잡힌 성경해석의 문제 (예5)-

    Date2003.11.15 By이재형 Reply1 Views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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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0.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2)-

    Date2003.11.08 By이재형 Reply0 Views2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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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2.“한 몸 됨”?

    Date2003.11.02 By이재형 Reply4 Views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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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Date2003.10.18 By이재형 Reply2 Views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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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1) -복의 근원될 가능성 상실과 화의 근원-

    Date2003.08.24 By이재형 Reply1 Views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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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0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Date2003.08.19 By이재형 Reply3 Views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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