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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창 3:6-13 







이 성경이야기에 대해서 두 가지 종류의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길 수 있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성경이야기를 지금도 해당되는 상징적인 뜻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의 본뜻을 찾으려는 질문들입니다.

문자적인 이해에서 생기는 질문들

- 왜 이런 나무는 만드셨을까?
- 왜 이런 뱀을 만드셨을까?
- 그런 뱀이 있어도 넘어가지 않는 여자를 만드셨으면 되었을 텐데?
- 그런 여자의 말을 듣지 않도록 남자를 만드실 수도 있었을 텐데?
-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 그때만 있었고 지금은 없는 나무일까?
- 결국 이런 나무, 이런 뱀, 이런(넘어가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벼라 별 대답을 다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대답이 정답이라고 할 근거는 성경에서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듯한 대답을 생각해낸다고 해도, 이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가지 질문, 곧 “한 몸 되어야할 인간이 예나 지금이나 한 몸 되지 못하는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가?” 또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나?”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열매를 하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했을까?
2.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말고, 선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만을 두어서 그 열매를 먹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3. “선하다,” “악하다,” “좋다,” “나쁘다”는 우리의 판단  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4. 이 성경이야기에서 선과 악을 안다고 할 때 “안다”는 말의 뜻은?
5. “선과 악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지식과 함께 더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6.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직후(저주받기 직전)에 인간이 한 행동은? 이때 하나님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은? 그 뜻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

앞 장에서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간이 제 길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다스림을 뜻하는 “말라”가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창조말씀의 의도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 성경이야기에서는,

- “말라”는 제한조건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등장시켰을까?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선을 알아 선을 행하고 악을 알아 악을 행하지 않게 하는 나무란 말일까?
- 그렇다면 왜 먹지 말라고 했을까? 
- 아니면, 선을 알아 선을 행하는 것은 좋지만, 악을 알아 악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이 나무 열매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했을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만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이 성경이야기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우리 선악판단의 객관성 문제,
2) 선과 악을 아는 인간 지식의 한계성 문제,
3) 선악을 아는 지식문제보다 신의를 지키는 의지문제.

1) 선악판단의 객관성 문제

“선과 악”(good and bad)이라는 말은 “좋고 나쁨” 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더 많습니다. 갑이 좋다는 것을 을은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파가 생길 경우 한 편이 좋다는 것을 다른 편은 나쁘다고 하게 마련이듯,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혼돈, 공허, 어두움”등의 표현대로, 성경은 “맨 처음부터 인간이 처한 환경은 잘못 되어 있었고, 인간도 맨 처음부터 잘못된 불완전한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인간이 처한 현실과 인간 자신의 잘못됨에 대한 이야기만이라면 성경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안에서 바로 되기를 바라는 갈망(구원의 문제)을 큰 줄거리로 다루고 있기에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갈망은 “잘 되기를 바라”는 잘못된 갈망, 곧 욕심들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속기 쉽습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잘못된 갈망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좋지 않게 되어도, 내게 좋게 되는 것을 “잘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00교 한 평신도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지나는 동안 보고 느낀 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성직자님들을 많이 모셔보았는데, 그 중에는 “잘사신” 분도 계셨고, “못사신” 분도 계셨다는 말로 체험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하는 이야기에서 이분의 “잘사는” 또는 “못사는” 성직자라는 표현을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을 알게 되어, 속으로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사신 분을 “잘사신” 분이고, 재정적으로 궁핍하게 사신 분을 “못사신” 분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짐이 적은 분은 “잘사신” 분이고, 짐이 엄청나게 많은 분은 “못사신” 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관심이 주로 물욕에 치우쳐 보인 분은 “잘못” 사신 분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이분이 말한 성직자들이란 사유재산권 포기를 선언한 분들이었음). 이분은 분명 바로 생각하고 바로 살려는 분이었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피곤을 덜어주는 평신도 “성직자”였다고 회상됩니다. 

성경에는 잘못된 현실 이야기와 그 속에서 바로 되기를 바라는 갈망에 대한 이야기 두 줄기가 흐르고 있는데, 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갈망이라는 말과 “잘” 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분명히 다른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성경이야기의 목적인 것입니다. 내 욕심대로 되는 것을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판단의 오류를 각성시키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 “잘”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그 방향설정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각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의견에는 각자의 욕심과 편견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아 반성정도가 아니고, 그렇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특히 일 맡은 이들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 되는”것으로 착각하고, 그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아집을 부리거나, 남을 설득시키려고 드는 날에는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혼돈의 아픔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우리에게, “좋다”는 길이 아니고, 모두에게 바로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게 “좋은”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바로 되는 길 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성경이야기의 목적입니다. 나에게만이 아니고 남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길이라야,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남에게는 좋고, 모두에게도 좋고,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해로운 길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에는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 욕망들을 관철시키려는 데서 어려움이 생겼다는 내용들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창3:6)라고 한 것도, 사람이 자기에게 “좋게”보이는 대로, 자기 욕망대로 행한 결과가 실낙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잘못된 욕망들 속에 파묻혀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을 찾아내어야만, 성경 이야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인 진주를 캐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님도 “좋다, 나쁘다,” “선이다, 악이다”는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악하게 되지 마십시오,” “선하게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갈6:7 공동 번역), 또는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표준 새 번역),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갈6:7)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잘못 심는 것만이 아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잘못 심은 것도 거둘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악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젊은 부자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마19:16-17)고 반문하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선을 알겠느냐는 뜻입니다. 마가 누가 두 복음서에서는 심지어 그가 예수님에게 “선하신 예수님, 제가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예수님을 선하다고 불렀을 때도 같은 반문을 하셨답니다(막10:17-21, 눅18:18 -22). 그리고 “무슨 선한 일을?”라는 물음에 대하여서는, “돈만을 섬겨 온 네가 어찌 선한 일을 묻느냐? 시시한 소리 작작하고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에게 빼앗아 온 것이나 다 돌려주라”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해 오던 그 잘못을 중단함이 옳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2) 선과 악을 아는 인간의 지식 문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말을 영어로는 선과 악의 지식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했습니다. 지식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히 모든 학문분야의 지식이 인간 문제해결에 절대적인 공헌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인간의 선악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앞에서 본대로 선악을 아는 인간의 지식에는 인간(“뱀”)의 간교함이 들어갈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곧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이성과 같은 것이 못되고, 불완전한, 흐려진, 타락한 이성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 이야기에서 “먹는다”는 말은 “몸으로 체험한다,” “몸으로 체험해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만을 체험하거나, 악만을 체험할 수가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세상 모든 일 자체가 다 악과 선이 함께 섞여있는 것입니다. 100% 선 만인 절대선이나, 100% 악 만인 절대 악이 흑백으로 분명히 나눠 있는 것으로 체험할 수가 없고, 선속에 악이 있고, 악속에 선이 함께 섞여 있는 혼돈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함께 체험하되, 그것도 선을 먼저 체험하고, 다음에 악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먼저 악을 체험해서 악을 알고, 그 다음에야 선을 알게 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처음부터 선을 체험할 수 있다면 부모들의 고뇌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선을 알 때는 이미 악을 체험하는 불행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이치를 감안하면, 나무 이름도 “선악과”가 아니고, 순서를 바꿔서 “악선과”라고 함이 더 타당한 표현이겠습니다.

선을 알게 하는 나무와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이렇게 악을 체험한 다음에야 선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불완전성은 에덴에서 쫓겨난 다음이 아니고, 이미 에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당하는 모든 불행스러운 일들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어온 것들이라는 말인데, 선과 악을 안다는 지식만으로는 그 해결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선악을 아는 지식의 문제가
  신뢰관계를 지키는 의지(심성)의 문제로

“뱀”과 대화를 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직후,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대목이 나오기 직전에, 인간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이 행동에 따른 하나님과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열매를 먹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게 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고 대답했답니다. 다시 하나님이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시자, 그 남자는 핑계대기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창3:6-12)라고 했습니다.

“뱀”이 말한 대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몸을 가렸고,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다는 것입니다. 벗은 몸이라는 것을 안 것을 보면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야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3:22-14) “눈이 밝아져 벗은 몸인 것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신뢰관계가 상실된데 대한 죄책감을 뜻하는 말이랍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지키지 못한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불행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사람이 신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모자라는 심성의 문제라는 것이 성경의 주제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약이 몸을 해친다는 것을 알지만(지식은 있지만), 그 해로운 버릇을 끊을 의지가 굳지 못함이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대기 오염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저지른 결과인 고통과 아픔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있는 의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어서 먹었다”고 핑계를 대었다는 말은 한 몸 되었어야 할 저들이 상대를 원망하는 관계로 소외되었음을 뜻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도 저들과 하나님과의 신뢰관계가 깨진 것을 뜻하는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하나님과의 신의를 지킬 의지가 굳지 못한 때문이었음을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복의 근원이 못되고 화의 근원이 된 것도, 한 몸 되어야할 인간이 예나 지금이나 한 몸 되지 못하는 불행도,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 하는 불행도, 선악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마땅히 할 일을 하고, 마땅히 하지 말 일을 하지 않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가 지식의 문제 보다 성품의 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점이 성경다운 점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식이 있는데도 성품이 바르지 못함에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더 큰 문제는 알아도 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품격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현대인을 비교해볼 때, 지식 면에서 누가 더 월등할까요? 자동차 운전 지식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보다 더 많이 아실까? 컴퓨터를 쓰실 수나 있으실까요? 학위를 취득한 현대 전문가들보다 모든 전문 분야에서 예수님이 더 많이 아실까요? 사회 모든 면에서 가장 큰 사기꾼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닐까요?

바울 사도님도 인간의 문제는 품격의 바로 됨과 잘못됨에 달린 것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5:3-5). 우리는 환경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요건이 갖춰져야 희망이 있는 것으로 보는데, 바울 사도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품은 그런 성품(품격)을 갖출 때, 희망이 있게 된다고 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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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2003.10.21 17:32
    목사님, 다시 뵙게 되서 반가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번 말씀 다시 잘 보았습니다. 지난 번 여름 수양회 때 들은 기억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캘거리를 다시 방문하신다는 약속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현될지 예상을 못했습니다. 목사님의 결단과 캘거리 교회를 향한 관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힘과 용기가 됩니다. 만남은 항상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이 "적"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스승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새삼스럽습니다. 저희 교회 또한 목사님을 통해서 성서의 새로운 세계로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저는 요즘 유명했던 은퇴한 종교철학자로부터 개인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만나 저의 논문점검도 받고, 종교 전반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 중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통해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로 부터 인간의 갈망 (craving; 갈애)의 본질을, 유교로 부터 도덕적 실천을, 이슬람으로부터 종교적 실천의 삶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은 다른 종교 뿐만 아니라 철학으로부터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기독교가 Karl Marx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된 것도 바로 만남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됨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등의 질문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실재"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듯, 하지 말아야 되는 "말라"라는 금지는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실존적 삶이 처절하게 배어있는 "탄식의 언어"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이것들은 개인적 행동의 규율이 아니라 바로 함께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제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요? 김창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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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범식 2003.10.28 14:59
    목사님, 오래 간만입니다. 이번 글을 읽으며 우선생각나는것이 Reagan 의 Evil Empire 와 Bush 의 Axis of Evil 이라는 말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의 말치고는 너무나 단세포적인 단어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나마도 자신의 말이 아니고 speech writer 가 써준 말이라고 합니다. 9.11 직후에 서슴치 않고 crusade 라는 말을 쓰고 나서는 말입니다.) 말라나무,금단의 과수,선악의 나무, 지혜의 나무, 생명의 나무 등등으로 알려진 이 나무와 히부리 성전의 이 대묵에 대해 저는 제멋대로 다음같은 엉뚱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우선 "선 과 악"이 100% 정확한 번역인지? "good and evil" 은 단지 도덕적인 또는 종교적인 "선 과 악" 뿐만 아니라 넓은 뜻으로 "좋은 것과 나뿐 것" 이라고 해서는 안되는지? "좋은 것"="(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바라는것", 예를 들면 우리가 자랄때 늘 보고 듣던 수, 복, 강, 녕 같은것. "나뿐것"="인간이 원하지 않거나 기피하고 싶어 하는 것", 예를 들면 고통, 질병 또는 더 나가서 홍수, 한발, 지진 등등. 착한것과 악한 것, 전쟁과 평화. 인간이 사라가며 격는 여러가지 일 (어쩌면 모든것)을 다 "good and evil" 에 포함시킬수 없는지? 만약에 위와같은 해석이 가능하다면 다음 같은 연역을 할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와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도산에서 순진 무구하게 아무 근심도 고통도 모르며 영원히 살게 해주셨는데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금단의 과실을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현세 (불교에서 말하는 속세)에서 살면서 좋은 것 나뿐것 (우리말로는 쓴 맛 단 맛, 불교의 인생무상)을 다 겪다가 흙으로 도라가는 숙명 (원죄, 업보)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다른 동물과는 달리)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인해 좋은것을 알게됐고 그것을 갈망하게 됐고, 거기서 탐욕이 생기고 악 도 생기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을 겪고, 또 그 지혜로 인해 하느님께 죄를 지게되고 그 벌로 병도 들고 때로는 천재이변도 당하고. 석가무니는 병, 노, 사 를 보고 고민하며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답을 찾으려고 출가했고 거기서 불교가 탄생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을 때, 고난을 겪을때 "왜?" 하고 묻게되고 거기서 종교도 생겨나는것이 아닌지? (우리는 그럴때 "팔자", "조상의 탓"으로 돌리지요.) Hebraism 은 "말라나무"로 답한것이 아닌지? 다른 종교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때 고통 고난 즉 evil 만을 다룬것이 아니고 good 와 함께 묶어서 둘 다 인간이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영역을 감이 침범함으로서 받게 됐다고 하는 사상인것 같습니다. 또 하나 제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Hebraism 에서는 고통 고난 같은 evil 을 도덕적인 또는 종교적인 evil 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든 것이 아닌지? (예를 들면 나병환자를 죄인취급하든 따위.)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으로 그 잘못을 가르쳐 주신것이 아닌지? (말이 종 빗 나갑니다만 Reagan 은 AIDS 환자들보고 그들은 그들이 진 죄값을 응당 치루어야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만 더 보태고 싶십니다. "왜 이런 나무를 만드셨을까?" 라고 묻지 말라고 하셨지만 "왜 전지 전능하시고 무한정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분이 지배하시는 이 우주에 고난과 악을 허용하시는지?" 하는 물음은 영원한 것이고 그 답을 모색하는 것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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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3.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네가 어디 있느냐?`-

    Date2003.11.22 By이재형 Reply1 Views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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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06. 성경에“악마”의 말도 -거룩한 책이라는 선입관에 잡힌 성경해석의 문제 (예5)-

    Date2003.11.15 By이재형 Reply1 Views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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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0.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2)-

    Date2003.11.08 By이재형 Reply0 Views2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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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2.“한 몸 됨”?

    Date2003.11.02 By이재형 Reply4 Views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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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Date2003.10.18 By이재형 Reply2 Views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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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1) -복의 근원될 가능성 상실과 화의 근원-

    Date2003.08.24 By이재형 Reply1 Views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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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0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Date2003.08.19 By이재형 Reply3 Views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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