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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상을 품은 사람들이 바라는 공동체
  -둘째 돌판 이야기의 뜻-   
출34:1-9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백성들이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출33:5).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 뜻은?)
2.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해서 삼천 명이 죽는 일이 생 긴 직후(출15-29), 모세는 하나님에게 백성을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대신 자신을 책에서 지워주시라고(벌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출32:32-35) (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모세가 해야 할 더 중요한 일로 무엇을 시키셨다고?(출32:34, 33:1-2)
3.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모세가 한 일 두 가지는?(출32:15-20)
4. 여기 두 번째로 한 일은 무엇을 뜻할까?
5. 첫 번째로 한 일은 무엇? 왜 그랬을까(이유는)? 이유가 무엇이든, 모세가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유는?
6. 산에서 내려온 후(하나님이 시켜서) 모세가 세 번째로 한 일은? 하나님이 무엇을 해 주시기 위해서? 이일의 뜻은?
7.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물었다고 했는데(출33: 13), 왜 그랬을까? 노예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달라졌다고? 아니면?
8.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도 주의 영광(얼굴)을 보여 주시라고(출33:18) 청했는데, 왜 그랬을까(이유는)?
9.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출33:19-23)에,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왜(무엇 때문에) 볼 수 없다고?
10. “지나가신 다음 하나님의 등만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뜻은?
11. 모세가 처음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에게 보인 것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잘못된 종교뿐이었는데(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종교는 볼 수 없는 것일까? 볼 수 있는 것일까?
12. 하나님의 얼굴이 안보여도(안 보이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계속 앞으로 걸어가시는 (그래서 그 등이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뜻은?
13. 하나님의 얼굴은 안 보인다고 했는데, 사탄의 얼굴은 (아무에게나) 보일까? 사탄의 지나간 다음 그 등은(누구에게나) 보일까? 
14. 세상이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겠는데, 이렇게 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15.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이상이 실현된 공동체를 이루었을까? (모든 종교의 이상과 현실이 같을까?)
16. “보이는” 공동체(현실)의 불완전함을 체험할 때, 이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은”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으로 이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산다면, 이런 자세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17. 이런 자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잘못된 “보이는  공동체”를 목격했을 때) 모세가 취한 처음 행동과 같은 것일까? 또 하나님이 그에게 시켜서 한 행동과는 같은 것일까?
18. 둘째 돌 판 이야기에서 참된 공동체는 어떤 것이라고 하고 있을까?
19. 십계명과 율법을 중심에 둔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라는 것일까?
20. 모세, 사도 바울,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신(바라신) 공동체를 참된 공동체로 볼 수 있겠는데, 이런 분들의 행동에 공통되는 점은 무엇일까?
21. 이분들이 바라시는 바와 이런 분을 인도자로 모신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같았을까? 같지 않았을 때, 이런 사람들을 대한 이분들의 행동에 있어서 비슷한 점은? 다른 점은? 

가. 금송아지를 숭배한 다음에

금붙이를 귀하게 여기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제 너희는, 너희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버려라”고 하셨고,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다고 합니다(출33:5). 사람이 무엇을 값있게 여기느냐하는 가치관과 하나님 신앙과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어서(갈6:7), 좋지 않은 것을 값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으면 좋지 않은 것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후회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지난날에 값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었는데, 오랜 후에 그것이 그렇게 값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사람의 성장과정은 잘못된 가치관을 바른 가치관으로 수정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출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출32:9-10)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백성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자 재앙을 거두셨다고 했습니다(출32:14).

그 후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첫째 돌 판을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고, 이어서 3000명이 살해된 사건이 생깁니다(출32:15-30). 이때 다시 모세는 백성을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대신 자신을 책에서 지워주시라고(벌해달라고) 청합니다(출32:32). 하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출32:33-34)라고 하셨고, 그 후에 이 일 때문에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출32:35)고 했습니다.

여기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내용을 보면,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에 대해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로 모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출32:34,33:1-2) 이는 모세에게 처음부터 맡겼던 그의 사명을 이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 잘못된 현실(종교) 앞에서 모세가 한 일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춤추는 백성들의 모습을 목격하고(잘못된 현실 앞에서)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다 화 김에 한 일이었습니다.

(1) 첫째는 손에 들고 있는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린 것이고(출32:19),

(2) 둘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한 것이었습니다(출32:19-20).

이 둘째 일은, 이런 물을 마시면 질환이 생기는 데, 받아야할 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금을 부어 만든 수송아지는 백성들에게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신으로 되어 있지만,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부술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곧 잘못된 종교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람이 이런 잘못된 종교를 허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일은 모세가 할 옳은 일이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2) 잘못된 현실 앞에서 이상을 버림

그러나 모세가 한 첫째 일은 백성을 인도하는 일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돌 판을 내던져 깨뜨려 버린 것은 모세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이상을 버린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상(하나님의 말씀)의 돌 판을 내던져 깨뜨려버린 것은, 잘못된 백성도 아니고, 잘못된 현실도 아니고, 모세 자신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현실에 직면한 모세자신이 좌절하고, 화를 참지 못해서 스스로 이상을 버린(죽인)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노동 감독관을 쳐 죽인 살인 사건에 맞먹는 잘못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잘못했어도 모세는 하나님에게 받은 그 이상의 돌 판을 손에 들고 있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인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버린 그 이상은 그가 돌 판에 새겨 넣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새겨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꿈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잘못된 꿈(이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꿈이 후에 수정되어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잘못된 꿈이었다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말하는 이상(십계명과 율법의 기본 정신)은 모세가 일생을 다 살 무렵에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한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3) 버렸던 이상을 되살릴 둘째 돌판

(3) 그가 산에서 내려온 후에 한 세 번째 일입니다.
“너는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처음 돌판 위에 쓴 그 말을, 내가 새 돌 판에 다시 새겨 주겠다”(출34:1)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했어야 할 일은 앞에 말한 둘째 일(잘못된 금송아지 우상 종교를 부시는 일)만이 아니고, 자신이 깨뜨렸던 돌 판과 같은 것을 다시 깎고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우상을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는”것과 같이 잘못된 종교를 허무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새 돌 판을 깎고, 그것을 들고 산 위로 올라가고, 다시 새겨주실 참 신앙공동체의 이상을 들고, 잘못된 세상 현실로 내려오는 일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내려와도 산위에서 받은 하늘의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이 세상에 내려오셔도 끝까지 하늘의 것을 가지고 계셨기에, 십자가를 거친 후 그의 이상의 부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어렵고 잘못되었어도 울분과 좌절감에서 이상을 버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상을 지키겠다고 결의하는 마음 판(비판의식과 의지의 마음 판)을 다시 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역사의 진화와 퇴화과정

역사는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진화과정이 될 수도 있고,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퇴화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현실 앞에서 바른 비판의식과 바른 이상이 지켜질 때 역사는 진화하고, 바른 비판의식과 바른 이상이 버려질 때 역사는 퇴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 이야기는 역사를 퇴화시킨 것이 바로 아론을 인도자로 삼은 군중의 잘못된 “금송아지 종교”였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왕이 11차례나 거절하는데도 끝까지 참아냈던 모세가 잘못된 종교 앞에서는 화를 참지 못했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나. 잘못된 종교(현실)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임

세상에는 이런 “금송아지 종교”가 판을 치게 마련이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공동체가 보일 뿐, 참된 신앙공동체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회의하게 되는 경지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1) “하나님이 계획(뜻)을 알려 주십시오”

이때 모세가 드린 기도 중 독특한 것으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주를 섬기며, 계속하여 주님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부디 저에게 주(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십시오”(출33:13). 여기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길”과 같은 말입니다. 광야에서 떨기나무 불꽃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음성에서 노예해방이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는 것을 체험한 후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그런 모세가 백성들의 잘못된 선택 앞에서 이런 간청을 한 것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신앙)에 회의가 생겼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시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출33: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간청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33:18)라고. 여기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얼굴”과 같은 말로, 하나님의 얼굴이 안 보였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이 안 계신 듯 느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노예해방운동을 인도하고 있었는데도, 하나님이 안 계신 듯 잘못된 현실과 잘못된 종교만 압도적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회의하는 경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15:34)라고 하셨다는 것과 같은 경지입니다.

요즘(2007/8) 알려진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캘거타의 극빈자를 위해 일생 헌신한 수녀 테레사 여사가 돌아가기 전까지 50여 년간 믿음에 대한 회의로 고뇌를 겪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수십 년 동안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고뇌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출판될 그녀의 서한집에 그리스도를 “부재자”(the Absent One)라고 일컬었고, 자신의 웃음은 모든 것을 감추는 “마스크”라고도 했답니다. 또 “남모른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겐 믿음이 없다” “내 속에 이토록 무서운 어두움이 깔려있어, 모든 것이 죽음인 듯싶다. 내가 일을 시작할 무렵부터 이러했다”라고 써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허락해야 하는데, 우리 의사를 물어봄 없이 쓰시도록 해야 한다”고 한 말 그대로 일생을 사신 분인데도, 이런 고뇌를 겪은 것입니다. 극빈자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없애는 일이 병행되었어도, 저들을 돕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 부조리는 묵인된 채 구호하는 일만을 해나갈 때, 끝없이 펼쳐지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회의를 느끼게 됨은 당연지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름 받았던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은 이분의 의지에 “성스러움”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회의를 느끼기도 하는 감정보다, 회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얼굴을 보여주시라는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3) 얼굴이 안 보이고
  지나가신 다음 등만 보이는 하나님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려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출33:19-23).

여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부름 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얼굴)은 볼 수 없다(회의에 빠지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바위틈에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가리시기 때문이다(역경에 가려 이상실현 가능성이 안 보인다).

(3) 하나님이 지나간 다음 손바닥을 거두시면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다(역경이 극복되고 나면 이상이 실현된 흔적이 보인다).

이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고 바위와 손바닥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는 말도 하나님을 산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4) 참된 신앙 공동체도 안 보임

그리고 여기 바위틈에 집어넣어짐은 역경과 역경의 틈바구니에 빠졌음을 뜻합니다. 이 때 보이는 것은 바위, 곧 역경뿐이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종교(금송아지 종교), 잘못된 현실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는 참된 신앙공동체가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당연지사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현실에서 테레사 여사가 그리스도(또는 하나님)를 “부재자”로 느껴지는 경지에 빠지는 것도 당연지사라는 것입니다. 여기 “부재자”라는 말은 “안 계시는 분”이라는 말로, “예수는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렇게“안 보이는 하나님”을 일컬어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써 온지 오래 됩니다. 이런 표현들은 불의 앞에서 한이 매쳐 탄식할 때, “하나님도 무심하지!” 하는 말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님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라고 하신 것이나,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라고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얼굴(또는 참된 공동체)이 안 보이고, 잘못된 것만 보이는 현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인 것입니다.

(5) 역사의 진화과정

그런데도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름 받은 사람이 바위틈에 집어넣어지는 것(잘못된 현실, 잘못된 종교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역사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역사는 그 바위(역경이나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현실)에 걸려 더 나가지 못해서 정지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세상 역사가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진화하는 것인데, 이 사실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의 등을 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6) 사탄도 얼굴이 안보이고 등만 보임

모세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금송아지 상을 하나님으로 보고 숭배한 백성들은 사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눈에는 번쩍이는 금붙이가 보일 뿐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아니나 하나님의 지나간 뒷모습이 보인다고 했는데, 군중들에게도 사탄이 지나간 뒷모습은 보이는 것입니다. 이 사탄의 뒷모습이 역사의 퇴보이고 그와 함께 오는 피해입니다.

(7) 비판의식과 이상을 지키려는 의지

이런 시각에서 역사를 보면, 예를 들어 이차대전을 겪고 난 세상은 이차대전 때의 세상보다 더 바르고 더 나아지게 되는 것인데, 이는 모세와 같은 이들이 있어서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과,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새 세상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지켰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듯 역사의 진화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과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이상을 지켜나가려는 이들이 없었다면, 이차대전 후의 세상이 더 나빠졌을 것이고, 하나님의 뒷모습이 아니고, 사탄의 뒷모습을 보듯 역사의 퇴화를 보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락전쟁의 와중에 빠진 지금을 예로 든다면, 모세와 같은 이들이 있어서,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과,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새 세상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지켜나간다면,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세상이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물론 여기서도 모세와 같은 이들이 없어서 생기는 반대의 경우로 사탄의 뒷모습을 보게 되는 역사의 퇴화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성서의 낙관적인 역사관과
  성서가 말하는 참된 공동체

끝으로 한 가지 추가할 점이 있습니다, 금송아지 이야기는 이런 역사의 진화와 퇴화에 대한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잘못에 대한 비판의식과 보다 바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내다보는 이상을 지켜나가려는 의지와 정열을 품은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 태어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점에서 성서는 역사의 비극적인 현실을 들추어내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진화(새 공동체형성 또는 하나님 나라가 옴)를 말하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보여 줍니다.

1)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이상을
  시련시켜보려는 시도에 불가함

그러나 앞장에서 언급한 대로, <45.새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 노예탈출 후 광야에서 히브리백성들은 이런 이상을 실현시킨 공동체는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이점에서는 과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만 이렇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가 다 이렇다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이상을 시련시켜보려는 시도에 불가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그 종교의 이상을 실현시켰다고 하기보다는, 그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시도에 성실한 증거를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그 종교는 바람직한 종교라고 평해서 좋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종교의 이상(영성)은 좋아하지만 종교의 조직체에 몸담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종교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대한 환멸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미디어에 종종 오르내리는 성직자의 비행 등입니다. 어떤 종교가, 예를 들어 이슬람교가 평화적인 종교냐, 폭력적인 종교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 종교의 특정집단이 그 종교의 이상을 얼마나 실현시키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초점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이점은 모든 종교에 예외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2) 보이지 않은 참된 공동체?

머리말에서 “참된 기독공동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를 언급했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고는 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사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는 보이는 잘못된 공동체를 비판하고 그와 거리를 두고 살 수는 있지만, 바른 공동체에 동참하는 희열이나 열정은 체험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상이 머리에는 맴도는데, 가슴을 뛰게 하는 열정으로 까지 작열하는 체험은 모르기 쉽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결국, 본의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공동체만 남아있도록 방조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3) “만져지는” 공동체?

머리말에서 또 “보이지 않은” 참된 공동체가 마치 “만져지는” 공동체처럼 느껴지는 희열과 정열을 체험한 일에 대해서도 언급했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내 일생에 여러 번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이는” 공동체로 남아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는 못했다는 대답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의 현실체험이었습니다. 현실 자체는 언제나 이상적인 완전함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록 아무리 이상적인 현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상적인 상태대로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님도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2-14)라고 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의 불완전을 체험하면서도 미래의 완성을 바라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져지는”듯 희열과 열정을 체험하게 하는 공동체라고 해서 다 참된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잘못된 공동체일 수도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금송아지 종교 이야기는 이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아론을 인도자로해서 이룩한 공동체는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보이는 공동체”였고, 먹고 마시고 춤을 출 만큼 희열과 열정을 체험하게 하는 “만져지는”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의 공동체를 “타락한”공동체라고 하셨습니다. 진주의 값을 몰라보는 돼지우리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4)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는?

이 금송아지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타락한,” “보이는” 공동체(종교) 이야기를 하면서도, 성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참된 공동체는 어떤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론이 아니고 모세를 인도자로 삼은 참된 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참된 신앙공동체는 잘못된 현실 앞에서 돌 판(이상)을 던져 깨버리듯 울분을 터트리며 이상을 버리는 사람이 중심이 된 공동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부셔 가루를 만들어 마시게 하듯, 잘못된 종교에 대한 비판에 날카로운 사람이 중심에 선 모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모세가 잘못된 “보이는 공동체” 앞에서 견딜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린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곧 잘못된 “보이는 공동체”에 상반되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는 격정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잘못된 “보이는 공동체”를 비판하고 허무는 일까지는 그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참된 공동체를 바라보는 이상이 새겨진 돌 판까지 깨버린 행동은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금송아지 성경 이야기는 참된 신앙공동체가 태어날 수 있는 과정을 차례차례 펼쳐나갑니다.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이 다시 새겨질 돌 판을 재차 깎아 만들 듯, 잘못된 현실 앞에서 좌절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포기했던 이상을 되찾고 그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의지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다시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십계명과 율법이 새겨지기를 기다렸듯이, 정신적으로 높은 이상의 경지에 올라가서, 십계명과 율법에 담긴 새 공동체의 이상이 마음 판에 새겨질 때까지(이상이 필요한 이유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새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타락한 군중들에게로 다시 내려갔듯이, 잘못된 현실 속으로 다시 내려오되, 이번에는 잘못된 군중들 앞에서도 울분과 좌절에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하고 사는 자세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도 끝까지 이상을 버리지 않고, 이상을 품는 이 사람을 통해서, 타락했던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람이 품은 그 이상의 가치를 깨닫고, 그 이상을 마음에 품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야(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른 신앙공동체를 이룰 사람은 잘못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던 바로 그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변화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군중들이 끝내 잘못되는 것이 현실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럴 경우 모세가 첫 돌 판을 내던져 깨버렸던 것과 같은 잘못을 재연하지 않을 만큼, 마음의 평정(진주를 찾은 사람의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중심에 선 공동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십계명과 율법(성경)을 중심한 공동체?

흔히 둘째 돌 판에 다시 새겨진 십계명과 율법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공동체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라고 보기 쉬운데, 이는 잘못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라고 보기 쉬운데, 이는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교리주의 공동체로 잘못 굳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곧 십계명이나 율법, 그리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시키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바울 사도님은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과 율법, 그리고 성경의 문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문자 뒤에 있는 정신(영, 이상)을 품은 사람이 중심에 선 공동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이상과 사랑을 품은 사람이 “바라는” 공동체

십계명과 율법의 이상(정신)은 노예백성이 다시는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인간을 얽매는 계율이 아니고, 인간을 풀어주려는 인간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계명과 율법의 이상과 인간사랑은 같은 것이고, 이 사랑과 이상이 십계명과 율법에 감춰져 있는 진주인 것입니다. 둘째 돌 판 이야기가 말하는 참 공동체는 십계명과 율법을 중심에 둔 공동체가 아니고, 십계명과 율법이 말하는 이상과 사랑을 품은 사람이 중심에 서서, 이 이상과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는 아론이 중심에 서서 그가 원하는 공동체도 아니고, 또 아론을 인도자로 모신 군중들이 원하는 공동체도 아니고, 모세가 바란 그런 공동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떠남에 대하여,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공동체)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히11:8,10)라고 해서, 떠남의 이유도 참된 공동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적절한 예로는 예수님이 바라신 그런 공동체인 것입니다. 성경은 금송아지를 숭배한 종교인 “보이는 공동체”의 타락을 이야기하면서 “보이지 않은 공동체”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고, 보다 의롭고 보다 나은 공동체를 내다보는 이상과 사랑을 품은 사람이 “바라는 그런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에 우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바 그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우리의 가치(진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 관계에서 피차 바라는 바가 없을(없다고 단정한) 경우에는 그 관계를 지속시킬 이유가 없어지고, 바라는 바가 없는 인간관에서는 피차의 존재 이유까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 어떤 경우에서도 바라는 바가 있는 한에는 살 의미가 있고, 살 의욕도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서도 바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든, 사람과 하나님 관계에서든 우리가 바라는 바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바라는 바가 보다 의로운, 보다 나은 공동체(하나님 나라)의 이상이나 진리가 아니고, 보이는 금송아지로 상징된 돈과 같은 것(모든 인간이 보통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이런 것은 다 보다 좋은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쓰일 것으로서의 가치만을 인정해야하지, 이런 것들을 마치 궁극적인 목표이기나 한 것처럼 섬기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섬기는 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탈출에 성공했어도, 노예 됨(상태)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17:20-2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자와 제자 사이에서 피차 바라는 바가 보다 의로운 공동체의 이상이나 진리일 때에만 저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공동체(하나님의 나라)가 체험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백성)들이 바라는 바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와 일치할 때, 비로소 참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제자 공동체가 처음에는 잘못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세배데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막10:35-37). 두 제자가 좌정승 우정승을 바랐던 때의 그 공동체는 예수님이 바라신 공동체가 못되고, 타락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이상과 사랑(진주)의 가치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 조직체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구성원들이 바라는 바가 잘못 된 것인지, 바로 된 것인지, 구성원들이 바라는 것이 그 종교가 신봉하는 신의 뜻에 맞는 것을 바라는지 하는 이 한 가지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참 공동체의 특성은 “보이고” 또는 “보이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도 하고, 사탄의 왕국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바라라)”(마6:33)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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