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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어린양에 손을 대지 말라 
    -양을 바치는 “번제”?-
                창 22:7-8, 13-14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아들대신 뿔이 숲에 걸린 양을 잡아 제사 드린 것은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이 양고기를 필요로 하실까?
2. 만일 숲에 뿔이 걸린 그 양을 살려주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 오히려 기뻐하시지 않으셨을까?
3. 양을 잡아 바치는 희생제는 이 이야기 이전부터 있었을까? 아니면 아들을 바치려 했었다는 이 이야기 다음에 생겼을까?
4. 아브라함 이야기에 나오는 그의 생각과 행동이 다 옳은 것이었을까?
5.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이 된 잘못된 상황을 시정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6. 구약 예언자들이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에 대해 비판한 이유가 무엇일까?
7. “주의 산에서 하나님이 준비 하신다”(여호와 이레)는 말을 지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8. 신약에서 양을 잡아 바친 번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9. 예수님의 희생을 “어린양의 희생”이라고 하는 데서 의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10.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1:17)는 말씀은 어린양의 희생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일까?
11.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    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한12:24),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눅22:42),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10:11)는 등, 이런 구절들은 의인을 희생시키는 불의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일까?
12. 이 “밀알,” “아버지의 뜻대로,” “선한 목자”등에 대한 말들은 의인 10명이 있는 형편에서 하신 말씀일까? 의인 10명이 없는 형편에서 하신 말씀일까? 이런 말씀들은 의인 10명이 없어도 된다는 뜻일까?
13. 바울 사도님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12:1)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위해 바치라는 것일까? 기독신도의 헌신이나 헌금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해석이 필요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시험에 합격했다는 데서 마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합격했어도 의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잘못된 현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외아들을 잡아 바치는 번제 대신에 무엇을 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고, 아들 대신 죽인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으로 보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 “양”을 잡아 바친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본뜻을 찾는 해석이 없이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잘못에 대하여 신구약성서에 어떤 비판이 있었는지를 보고, 성서에서 “양”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양을 잡아 바치면 된다는 식의 이해는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시해버리는 오해를 낳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양도 살려 주었다면?

만일 숲에 뿔이 걸린 그 양을 살려주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요? 더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꼼작하지 못하게 묶인 아이를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듯, 꼼짝 못하게 걸려있는 양도 살려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일까요? 양을 잡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양을 살려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이 사람고기 대신 양고기를 잡수신다는 말일까요?

종전부터 있어온 유목사회의 제사양식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는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은 것을 보면, 양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종전부터 늘 해 오던 종교 의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대안”으로 생겨난 새로운 의식이 아니고 옛 의식이었습니다.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늘 드려왔는데도, 의인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게 된 잘못된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는 문제를 이 이야기는 다루고 있는 것이지, 양을 잡아 바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구약 유목시대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이 제사양식으로 자리 잡힌 것이었고, 당시 유목사회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는 면에서도 양을 잡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어업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면 생선을 잡아 바치는 것이 제사양식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양고기나 생선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교회에서 주일마다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드린다면, 천사는 “그 양에 손을 대지 말라! 그 양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요? 천사의 음성은 아니더라도, 동물 애호가들의 항의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는 법이 되게 마련일 것입니다.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그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길(땅)”로 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있는 곳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길(땅)”로 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을 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생각이나 행동이 다 옳은 것으로, 곧 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앞에서 본대로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아들이 없을 때 아내의 몸종과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일, 그리고 나중에 본처와 몸종 사이의 갈등이 생기자 몸종과 그의 몸에서 난 아들을 학대하는 부인의 생각에 동의했던 일 등은 다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의인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상황에서 양을 잡아 태워 바치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라는 생각과 행동도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성전제사장종교의 입장이었을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아니었던 것을 다음 “잘못 이해된 제사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비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제사에 대한 예언자의 비판

그래서 이미 구약 시대에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어느 것을 더 좋아 하시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의인이 희생당하는 잘못된 상황에서 양이나 잡아 바치는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는 잘못된 제사로 보았기에 “바른(의로운) 제사를 드리라”(시4:5)고 한 것이고, “제사나 예물도 주께서는 원하지 않으시고, 번제나 속죄제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오히려 내 두 귀를 열어주시니...”(시40:6),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려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시51:16-17)라고 했습니다.

양이나 잡아 바침으로 바른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던 자의 귀가 열려야 하고, 잘못을 깨달은 깨어진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제사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

신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2:14-16) 는 대목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예배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동물을 잡아 바치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과 이런 생각을 이용한 제사장직의 타락을 채찍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채찍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간 양을 잡아 바쳐오던 제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지속되었고, 의인이 희생당하게 되는 잘못된 상황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지속되어온 잘못된 상황에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양을 아무리 잡아 바쳐도 의인이 희생되는 상황이 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에서 제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대제사장으로 계시기에 적격이십니다.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지만 그는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치셔서,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7:26-27). 이렇게 “다른 대제사장”들의 부족함을 말함은 양을 잡아 바쳐왔던 제사제도의 부족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희생되지 않게 할 “대안”이 희생양?

아들을 바치려했었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 문제는 의인이 희생될 수밖에 없이 된 잘못된 상황이었고, 이런 잘못된 상황을 시정함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마치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이 그 해결의 길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기 쉬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이유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행동을 천사가 멈추게 했을 때,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창22:13-14)는 말로 마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뿔이 숲에 걸릴 수도 있는 “우연한” 일을 하나님의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또 어떤 사람이 그 양의 뿔이 숲에 걸리도록 한 것도 아니고, 그 양이 주의 산에서 자란 것이니,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한 천사가 “대신 저 양을 잡아 바치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함으로 의인이 죽어야 하는 잘못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곧 잘못된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2) 둘째 이유는 산을 향해 길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이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하는 물음에,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고 대답했었고, 뿔이 숲에 걸린 양을 보고,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고 해서, 그 후 사람들은 “주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창22:7-8)는 말을 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에는 “그 아이에 손을 대지 말고, 그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이 된 잘못된 상황에(그것이 인신제사의 유습이든, 의인을 죽이는 잘못된 사회구조이든) 손을 대어야(항거해야) 한다”는 뜻이 함축된 것으로 들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리고 그 후 사람들은, 아들 대신 바칠 제물로 하나님이 그 양을 마련하신 것으로 보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종전부터 수천 년 동안 고정되어 온 제사양식만을 되풀이해서 지켜왔을 뿐 의인을 죽이는 잘못된 상황은 관심 밖으로 밀어내버린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여호와 이레)?

그래서 예언서에서는 전체가 죽게 될 상황에서는 희생 제물로 동물 양이 아니고, 고난 받는 의인, 곧 전체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구세주가 나와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의 대표적인 대목을 보면;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고,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고”(사53:3),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고, 주께서(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고난 받는 의인)에게 지우셨다”(사53:5-6),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사53:7-8)

신약 성서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구세주인데 그를 “어린양,” 그의 희생을 “어린양의 피”(벧전1:19,계5:12 ,6:16,7:14,12:11,13:8)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1:29)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언서와 신약의 이해를 보면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는 말이나, “주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여호와이레라는)는 말은, 하나님이 동물 양을 마련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상황에 죽음으로까지 항거할 사람을 보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함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람이 구세주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의인을 죽이는 잘못된 상황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버리는 잘못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그가 복의 근원 될 시험에 합격했어도 양을 잡아 바치는 제사라는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끝나버린 데에 문제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서도,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의 최후 희생제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나머지, 의인이 희생할 수밖에 없이 되는 잘못된 상황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보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의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결과는 의인을 죽이는 악을 보지 못하는 잘못입니다. 이런 잘못으로 생각이 굳혀진 것은 역시 성경 구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구절의 대표적인 것 다섯 가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1)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첫째 예로 바울사도님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하박국서(2:4)를 인용한 말씀(롬1:17)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님은 이런 뜻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구절을 인용한 갈라디아서에 그 의도가 더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갈3:11).

율법에 쓰여 있는 대로 행함으로, 예를 들면, 지은 죄에 대해 양을 잡아 속죄제를 드림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수천수만 마리의 양을 잡아 바쳐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은 양을 번제로 드리는 희생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음으로 새 출발이 가능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속죄제를 강조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말(율법주의)을 믿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어린양(예수님)”의 희생 다음에, 동물 양을 바치는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어졌지만, 공동체 전 회원들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고 사랑과 선한 일을 하는 새 삶이 따라야 공동체의 구원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하면 “어린양”의 희생제가 아무런 효험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동물 양을 죽여 바치는 제물로 전체의 구원이 올 수 없었던 것처럼, “어린양”인 의인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도 전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의인 한 사람의 희생에 전체가 바른 반응을 보여야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면;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9:14), “죄와 불법이 용서되었으니, 죄를 사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얻은 뒤에, 일부러 죄를 지으면, 그 때에는 속죄 제사가(예수님의 희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히10:18, 25-26)

여기 “모이는 일을 그만 두지 말고 더욱 열심히 모입시다”는 말도 예배 집회만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행동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는 동물을 잡아 바치던 제사 대신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옳다고 믿고 행하는 새로운 운동이 따르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이 새로운  행동을 바울 사도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12:1)라고.

예수님의 희생에는 공동체 전체의 양심과 행동에 변화가 생겨, 희생당한 의인 한 사람에게 힘을 보태는 운동이 일어나야 전체가 살기 때문입니다. 의인 한 사람에게 힘을 보태는 운동이 신앙 공동체가 할 일인 것입니다.

(2)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의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버리기 쉽게 하는 또 하나의 구절은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눅22:42)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하나님의 뜻일까 라는 질문을 해 보면 무엇인가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은 무엇과 무엇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 죽음의 “잔을 마시는 길”과 “마시지 않아도 되는 길” 둘을 대조 시키고 있습니다. “마시지 않아도 되는 길”에 대하여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이라는 말을 전제로 해서 간구하면서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일 수가 없고 자신의 뜻일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길”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예수님을 죽이려던 잘못된 교권과 군중들이 바로 깨달아 세상이 달라짐으로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아니고, 의인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상황에서는,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의인의 자리를 버리고, 당시 불의한 교권주의자들과 한편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내 뜻대로”라고 한 것이고, 반대로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길은 십자가형을 받더라도 저들과 타협하지 않고 저들의 잘못을 끝까지 규탄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세상이 의인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망각할 때는, 예수님의 기도의 본뜻을 곡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당시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에게 “어린양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 곧 기독 신도들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의인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불의한 세력이 여전히 세상에서 판을 치는 경우, 신도들이 “어린양이 최후의 제물로 바쳐졌으니”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하는 길은 “내 뜻대로”하는 길이고, 반대로 고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길은 “아버지의 뜻대로”하는 것입니다.

(3) “밀알 하나가 죽으면...”?

의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버리기 쉽게 하는 또 하나의 구절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요한12:2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도 당시 의롭지 못한 교권이 의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죽지 않는” 길과 “죽는” 길 두 가지를 대조시키고 있는데, “죽지 않는” 길은 불의와 타협해서 고난을 회피함으로 연명은 하지만, 의인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다수의 세상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반면에, “죽는” 길은 의인이 죽으면서까지 제 자리를 지킴으로 옳지 못한 세상을 규탄하는 항거의 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인 10명이 채워지지 못하고 의인 한 명 만 남았을 경우를 배경으로 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 한 분 뿐이셨고, 한 명으로 남은 예수님이 의롭지 못한 소수의 선동에 따른 의롭지 못한 다수에 의해서 죽게 되는 현실을 전제로 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뜻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바로 깨달은 다음, 다시 돌아와서 의인 열 명의 소수가 형성되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고, 저들이 다시 다수를 모을 때,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곧 무지한 다수의 횡포 앞에 한 사람의 희생당함을 찬양하는 뜻으로 이해할 말씀이 아니고, 헤어졌던 제자들(기독신도들)이 “어린양”의 희생 다음에, 다시 모여 의인 열 명을 채우고, 다수를 의로운 편으로 만들어서, 다수가 무지한 횡포를 감행하지 않도록 막아서, 의인의 희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을 죽여도 좋다”는 음성이 아니고, “어린양에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본뜻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지 않으면”과 “죽으면”이라는 말의 대조만 아니라 “밀알”은 무엇과 대조되는 말일까 하는 점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이 어디 밀알뿐인가요? 모든 씨는 다 그러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원수가 심는 것”(마13:24-30)이라는 가라지 씨도 그러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식물의 발아와 성장과 결실의 법칙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로 상징하는 “예수님”과 그의 길을 따르는 “밀알들”인 “제자들의 공동체가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곧 “원수가 심었다는 모든 다른 씨”가 아닌 “밀알”이라는 말에 중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밀알”이신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많은 열매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제자들이 다시 죽더라도 악에 항거하는 밀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기독신도들)이 이제 “어린양”이 최후의 희생 제물로 바쳐졌으니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면 밀알들이 되지 못하고 가라지 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4)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10:11)는 예수님의 말씀도 의인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더 할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게 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이 말씀을 선한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함께 읽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이 말씀의 본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1). 선한 목자와 대조되는 악한 목자를 “삯꾼”(요10:12 -13)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이었을까요?

2) 이리가 나올 때, 삯꾼은 도망치고, 양들은 죽임을 당한다고 했는데(요10:12-13), 이리와 양은 각각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3) 양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4) 예수님은 여기서 선한 목자와 양을 죽이는 이리만을 문제로 보시는 것일까? 삯꾼을 더 큰 문제로 보시는 것일까요? 

5)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는데, 선한 목자가 죽고 나면, 결국 양들도 죽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이 괜찮다는 것일까요? 

6) 목자가 죽지 않아서 양들도 죽지 않게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양은 백성을 두고 하는 말이고, 양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백성이 착취당함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리는 백성을 착취하는 로마제국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이리만이 아니고 로마제국을 등에 업은 삯꾼들이었습니다. 이 삯꾼은 바리새파 사람들(요9:40)로 당시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들을 “도둑이요 강도”(요10:8)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이리와 삯꾼들의 합세한 판국에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지키시려다가 십자가형을 당하시지만, 선한 목자가 이렇게 죽고 양도 죽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한 목자와 양을 죽이는 이리와 삯꾼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리와 삯군의 하는 짓을 당연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신도들이 “어린양의 희생제사”만 믿고 할 일 없는 듯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양을 죽이는 악에 항거하는 삶에 헌신함이 참 제사라는 뜻에서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롬12:1)고 바울 사도님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까지도 악에 희생당함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5)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기독신도의 헌신과 헌금의 뜻-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을 죽이는 잘못된 상황이 시정되어야만 한다는 고발과 항거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희생은 잘못된 상황을 막기 위한 항거라는 점에서만 하나님의 뜻이지, 의인을 죽이는 잘못된 상황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양의 희생”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희생은 고귀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만든 잘못된 세상을 찬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장종교에서 동물 양을 잡아 바치면 된다고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교권이나 권력의 악을 보지 못하는 잘못에 빠지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의인을 죽인 교권이나 권력이 틀렸고, 예수님이 옳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믿음에는 예수님의 항거에 동참하는 행동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인의 항거에 동참하는 행동이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제사인 것입니다.

잘못된 상황을 시정하려는 의인 한 명이 남아 있을 때, 그와 동참해서 의인 두 명이 되려는 마음과 행동, 의인 세 명과 동참해서 네 명으로 만들려는 마음과 행동, 의인 열 명을 채우는 데 힘을 더해 주려는 마음과 이런 마음에서 움직이는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다 참된 산 제물인 것입니다. 의인 소수가 열 명을 채우지 못해 남은 의인까지 희생되어갈 때, 그 소수에 힘을 더해 주려는 마음에서 바치는 것은, 양이든 생선이든, 비둘기 한 마리건, 엽전 한 푼이건, 냉수 한 그릇이건, 무엇이나 다 참된 산 제물인 것입니다. 참과 사랑에는 “예”하고, 거짓과 폭력에는 “아니요”하는 바른 “예와 아니오”가 참 제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거룩한 참 제물입니다. 기독 신도들의 헌금도 이런 삶의 표현일 때만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은 “어린양에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에 대한 순종, 곧“어린양”에 손을 대는 불의에 항거하라는 음성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런 마음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에서, 참된 제물은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것(여호와 이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른 마음으로 바쳐진 것이라도 바로 쓰이지 못하는 순간, 곧 의인의 힘을 보태는 데 쓰이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자들의 힘을 보태는데 쓰이는 그 순간, 이 모든 것들은 다 참된 제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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