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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나 이야기
  -“도중하차”식 성경해석의 문제 (예1)-
                                                요나 1:-4: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이 이야기의 목적은 부르심을 거역하면 어려움에 빠진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일까?
 
<요나서는 4장까지만 있는 아주 짧은 책입니다. 1장에서 3장까지만 읽고    다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2. 요나는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이때 처음으로 받고, 그런 사람이(예언자) 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것이었나? 아니면, 이런 부르심을 이미 받은 사람(“성직자,” “예언자”)이었을까? (그가 순종하지 않고 거절한 것은 무엇?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는 것? 예언자인 그가 특정지역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
3. 순종하지 않고 도망친 이유는?
4.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전한 말은 “망한다”는 것? “회개해서 구원받으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어느 말을 하라고 하셨을까?
 
<이제 4장까지를 마저 읽고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같은 대답이 나오는지? 아니면 다른 대답이 나오는지?>
  <이제 계속해서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5.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요나의 감정은? (사랑? 미움?)
6. 요나 이야기의 결말은 요나의 소원대로 된 것? 아니면  그의 소원대로 되지 않은 것?
7. 성경에는 보통 예언자들이 옳고 백성들이 잘못해서 예언자를 학대하는 내용들인데, 요나서는 누가 틀린 것을 풍자하고 있는 것일까?
8.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한 (바른 설교를 한) 사람은 누구? (요나? 이방인 왕?)
9. 이방인 왕은 남은 40일을 어떻게 쓰라고? 요나는?
10. 이방인이 회개해서 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었다는 이 이야기는,
  가) 이방인의 죄를 경고하기 위한 것?
    (이방인을 위한 것?) 아니면
  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의 죄를 경고하기 위한 것?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의 자아비판을 위한 것?)
11. 특정한 민족과 지역을 배경으로 한 한갓 옛 이야기가 시공과 민족을 초원한 범우주적인 깨침(깨달음)으로 어떤 것을 담고 있을까?
12. 요나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욘4:3)라고 항의한 말은 마음의 어떤 갈등을 보여주는 것일까?

요나서

요나서는 구약에 들어 있는 책들 중 가장 짧은 책입니다. 두 쪽 반밖에 안됩니다. 과장된 표현법을 써서 재미있게 엮어감으로 오래 기억되도록 한 점에서 걸작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이들도 요나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장면만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나라는 사람이 큰 물고기 배속에서 3일 간이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이야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장된 표현과 풍자적인 묘사

1. 첫째는 재미있게 엮어진 이 이야기가 과장된 표현을 써서 풍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대목이(여기에 관심이 쏠리기 쉽게 되어 있어서) 이야기의 본뜻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장면들입니다.

타고 가던 배가 바다에서 태풍을 만났는데, 원인은 선객 중에 죄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그 죄인이 누군지를 제비뽑아 찾아내서 바다에 내 던지자 태풍이 잔잔해 졌다(욘4-15)고 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이야기이니 문자대로 믿어야 바른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최근에 있었던 태풍이나 허리케인이, 또는 쑤나미의 원인이 요나와 같은 어떤 사람이 그 바다를 지나는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람이 이루고 사는 모든 공동체는 바다를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인데, 그 회원의 잘못에 따라 파선의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곧 불행스러운 일을 해결 하는 데는 누군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하나님이 바다에 내 던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키게 했고, 고기 배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난 다음, 요나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했다(욘1:17-2:10)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물고기가 잠수함처럼 사람을 며칠이고 뱃속에 담고 다니다가 뱉어내되, 그것도 바다에 뱉은 것이 아니고, 마치 인공위성을 발사하듯, 뭍으로 뱉어냈다는 표현은 재미있게 하는 과장표현법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기도드린 다음 뭍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욘2:6)라는 말은, 잘못한 다음에 깊은 어려움에 빠져서 진심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어려움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는 체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예는 이방인 니느웨의 가장 높은 사람에서 가장 낮은 사람, 왕에서부터 온 백성들과, 심지어는 짐승들까지, 소 떼 양 떼 모든 생물이 다 금식을 하고 참회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과장된 표현과 풍자적으로 묘사된 장면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는 것이지 이런 말 자체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삼일 밤낮을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 등의 질문에 관심이 사로잡히면 이야기의 핵심을 잃게 됩니다. 비록 이런 대목에 대하여 아무리 기발한 뜻을 착안해 낸다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야기 배경

2) 둘째로 이야기 배경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이야기 마감에 나오기 때문에 여기까지 읽지 않거나, 또는 이 마감과 관련 없이 해석하면, 이 이야기의 본뜻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글로 쓰일 당시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을 알고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대할 때, 무엇을 비판하는 이야기인지를 직각적으로 알고 재미있게 웃으면서도, 당시 웃지 못 할,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에 공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이 이야기가 본래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것인지를 알려 주는, 열쇠와 같은 대목을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쇠와 같은 대목이 이야기 처음에도 안 나오고, 중간에도 안 나오고, 이야기 마감에 가서야 처음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우리 임의대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마감 장인 4장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소급해서 1장 2장 3장을 보아야 본래 전하려고 했던 의도에 맞게 이야기의 본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전체의 본뜻을 찾아내는데 중요한 대사가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요나는 이 일(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욘4:1-3).

이 대목이 말해주는 이야기 배경을 참작하지 않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해석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1)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면 어려운 풍랑을 만나게 된다는 교훈정도의 이야기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지적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2) 끝까지 다 읽지 않으면,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한 응답으로 뭍으로 나오게 된 후, 요나는 예언자 활동을 옳게 한 것으로, 곧 니느웨로 간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니느웨라는 지역으로 가라는 명을 거역

4장의 내용에 의하면, 요나가 순종하지 않고 피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성직자)가 되라는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언자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을 어떻게 하실 것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피한 것은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이 아니고, 예언자로서 특정 민족이 사는 니느웨라는 특정 지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거역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욘4:2). 니느웨 성은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인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이런 니느웨로 가라는 명을 거역했다는 말의 내용과 뜻에 대해서는 앞으로 “증오의 길과 사랑의 길 사이의 갈등”에 대한 대목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끝까지 잘못된 예언자 활동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고 하셨다는데, 그가 한 예언(설교)의 내용은 “40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욘3:4)는 한 마디 말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일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말하는 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회개하시오. 만일 돌이키지 않으면, 며칠 지나면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 참회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요”라고 하는 것이 예언자가 말하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예언자가 말하는 격식과는 전연 다르게 말을 합니다. “40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만 하고, “참회하지 않으면”과 “참회하기만 하면”이라는 “면”자를 40일만 지나 “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빼버리고, 심판만을 선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대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에게는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할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운 생각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소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기나 한 듯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참회하자 요나는 기뻐하지 못하고,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욘4:1)고 했습니다. 주님에게 제발 목숨을 거두어 주시라고 하며, 니느웨 백성이 망하지 않고 사는 것을 보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항의했다고 합니다(욘4:3).

예언자인 요나도 일종의 지역(또는 민족) 감정을 바로 처리하지 못하고, 끝까지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물고기 배에 들어가기 전에도, 빠져나온 후에도, 시종일관 저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4장 마감에서 예언자 요나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직접 일깨워주려고 하셨다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자기 설교대로 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자, 하나님에게 화를 내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마음이 상한 채로 그 성읍에서 빠져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초막을 짓고 머뭅니다. 무더운 때였는데도 마침 박 넝쿨이 무성하여 그 그늘에서 그래도 시원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하루는 벌레가 와서 그 박 넝쿨을 쏠아 죽여 버리자, 요나가 박 넝쿨이 죽었다고 하나님에게 화를 내며,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다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박 넝쿨이 죽었다고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기를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욘4:4-9)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타이르시기를, “네가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도 네가 그처럼 아까와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수 만 명도 더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4:10-11)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나(설교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의 설교는 니느웨 백성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성직자도 신도도 사람(대상이 누구이든)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하게 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빗나간 화살과 같이 되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요나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미워했고 멸망되어야만 할 것으로 본 니느웨 백성들도 하나님은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가엾은 사람”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예언자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이 요나서는 예언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이 분명해져야 이 요나 이야기의 본뜻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 “짐승”보다 못한 “선민”

니느웨 이방인을 구원한 것은 선민의 예언자가 아니고 이방인 왕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욘3:8-8)는 말씀은 응당 선민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의 입을 통해서 나왔어야 할 것이었는데, 의외로 이방인 왕이 한 말이었답니다.

요나는 “40일만 있으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했는데, 이방인 왕은 “남은 40일을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는데 쓰면” 살길이 있다고 했답니다. 남은 날을 죽는데 쓰지 않고, 사는데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방인 왕이 알고 있었고, 반면 선민 예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듯 처신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선민”이라는 백성들은 예언자가 일생을 두고 계속 경고하는 데도 듣지 않고, 오히려 예언자를 핍박하고 죽이고 하다가 “선민”이 저지른 이런 잘못을 예수님도 심하게 비판하셨습니다(마23:37). 결국에 민족국가가 망해서 바빌론의 포로가 되기까지 했는데 반하여, 그들이 천시하던 이방 니느웨 백성들은 자기들을 저주하는 예언자의 말인데도, 그것도 단 한번 외쳤는데도,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회개했다)”(욘3:5-7)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에게만 아니고 짐승들에게도 칙령을 내려 금식하고 기도함은 물론, “지금까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욘3:7-8)고 했습니다.

이 한 번의 칙령에 대한 백성의 반응이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도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욘4:10) 정도였습니다. 사람들만이 아니고 이방 니느웨 짐승들까지도 순종, 회개, 실천에 철저했다는 말은 선민이라는 백성이 이방 짐승만도 못하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풍자하고 있는 자아비판인 것입니다.

자아비판에 철저한 이야기

이 이야기의 훌륭한 점은 이렇게 예언자가 틀릴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선민이 이방인 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자아비판에 철저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요나서의 특징은 요나서의 마감에 가서야 알려진 사연을 참작하지 않고서는 캐낼 수 없는 진주인 것입니다. 이 책은 이방인의 죄를 경고하기 위한 책이 아니고, 선민이라는 백성 자신들의 잘못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자아비판에 철저하지 못하면 화의 근원이 되어있으면서도 복의 근원이 되어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위선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자아비판에 철저해야 한다는 이런 전통을 예수님도 높이 보신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신약에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문둥병에서 나은 열 사람 중 예수님에게 감사드린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눅17:11-19)나, 선민 보다 이방인이 이웃사랑의 모범을 더 잘 보여주었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이야기(눅10:25-37) 등입니다.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인간의 갈등과 깨침
-폭력, 정의, 증오, 사랑의 갈등-

요나서는 2천 700여 년 전 전설에서 유래한 이야기이고, 주인공 요나는 이스라엘이 강대국 아시리아의 무력 앞에 국난을 당하던 때, 여로보암 왕 2세(786-746 BC)를 보좌한 예언자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랍니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그 후 몇백 년(주전 4-5세기)이 지난 시대 인물로 바벨론 포로 후에 이 글을 쓴 것으로 본답니다. 이렇게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특정한 민족 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 아주 오래된 옛 날 이야기인데, 무엇이 성경다운 점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아비판에 철저한 점이 이 이야기의 성경다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비판에 철저함이 참 종교의 특징이긴 하지만, 자아비판에 철저함만으로 약자 이스라엘과 강자 아시리아간의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없다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강자의 불의한 폭력행사가 없는 경우라면, 참 종교가 요청하는 자아비판에 철저함이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약자의 자아비판만 요청되고, 강자의 불의한 폭력행사는 그대로 묵인되는 경우라면, 약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 종교인(요나)이 불의한 강자에 대해 어떤 입장을 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이 이야기는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자아비판에 철저해야한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고, 강자의 폭력에 대한 참 종교인의 입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강자의 폭력 앞에 약자가 희생되는 경우, 사회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갈망이 생기게 마련이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갈망은 불의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증오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증오는 불의한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폭력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종교인에게는 이런 정치 및 사회적인 문제가 종교적(신앙 양심적)인 문제로 깊어집니다. 증오와 사랑 사이의 갈등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원수도 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길을 가야한다는 하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원수를 증오하는 입장을 끝가지 고집했다는 것이 요나의 거역이고 도피였던 것입니다. 스페인으로 도망쳤을 때만이 아니고, 니느웨로 간 다음에도 그는 여전히 증오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고민은 증오와 사랑 사이의 갈등이고, 증오의 주체됨과 사랑의 주체됨 사이의 갈등인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인간 체험이 담겨있는 이야기입니다. 정의 실현을 위한 증오, 그리고 그에 따르는 폭력의 길과 사랑의 길,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인간의 영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 민족의 옛 이야기이면서도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깨침(깨달음)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을 인용하시면서, 이말 대로 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 (마5:43)고 하신 것도 이런 갈등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또는 어떤 집단을 증오하게 만듭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타당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과의 문제는 증오하는 사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흔한 예를 든다면,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누군가 미운 사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직장을 그만둬야할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 두는 행동은 요나가 가야 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도피한 것과 같은 짓이라고 생각(이 성경이야기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그런 직장생활을 계속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미운 사람”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게 되고, 마음고통은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나가 도망가던 길을 돌이켜 니느웨로 갔지만, 그는 여전히 니느웨 사람을 향한 증오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때 니느웨 사람은 종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맞게 폭력행위를 포기했는데도, 요나는 계속해서 증오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 증오의 길에서 떠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미운 사람”이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일 때, 그를 대하는 마음고생이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어떤 이유에서든, 미운 사람을 미워하는 길에서 돌이켜 그를 사랑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욘4:3)는 한탄이 나올 정도의 마음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깨침이 요나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강자의 폭력문제와 창조주신앙

끝으로, 강자의 불의한 폭력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강자의 폭력문제는 희생당한 약자의 증오나 보복행위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욘3:8-8)는 이방 왕의 말대로, 폭력을 행사하던 강자 스스로가  폭력행사를 포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언자 요나의 공적도 전연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해서는, 폭력행사를 일삼아오던 강자가 “나쁜 길에서 돌이키게 되었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게 되었다”는 말에 암시되어 있을 뿐, 긴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긴 이야기는 모세의 노예해방이야기에  나오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폭군으로 하여금“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폭력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는 내용입니다. <42. 노예의 탈출과 재앙이야기-모세의 체험(5)>

“강자가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폭력을 그치게 되었다”는 말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폭군도 폭군이 아닌 새 사람으로 재창조하신다”는 창조주신앙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요나가 이런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고, 이 이야기의 작가가 이런 신앙을 배경으로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도 될 그런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이렇게 함으로 잘못된 역사도 바른 역사로 만드신다는) 창조주신앙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웃을(풍자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되찾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창세기의 창조주신앙의 핵심은 혼돈에 질서를, 어두움에 빛
2. 요나 이야기
을, 잘못된 것에서 바른 것, 생명이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생명을 키우고 보존해줄 수 있는 환경을, 불행에서 행복을,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신다는 확신입니다.) <7.“맨 처음에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잘못된 것에서 바로 된 것을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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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진 2005.10.27 23:34
    목사님 ! 깊은 묵상에서 나오신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새삼 성경의 오묘한 뜻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속히 건강 회복하시어 한번 뵙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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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45. 새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

    Date2007.10.26 By이재형 Reply0 Views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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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41. 떨기가운데 이는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체험 -모세의 체험(4)-

    Date2006.12.17 By이재형 Reply0 Views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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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40. 제사장 딸과의 결혼과 유목공동체생활 -모세의 경험(3)-

    Date2006.12.17 By이재형 Reply0 Views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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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39. 살인과 도피 -모세의 경험(2)-

    Date2006.12.17 By이재형 Reply0 Views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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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38. 군주의 폭력과 여인들의 힘 -모세의 경험(1)-

    Date2006.12.17 By이재형 Reply0 Views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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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30. 어린양에 손을 대지 말라 -양을 바치는 `번제`?-

    Date2006.01.15 By이재형 Reply0 Views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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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2. 요나 이야기 -`도중하차`식 성경해석의 문제 (예1)

    Date2005.10.27 By이재형 Reply1 Views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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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37. 장례식과 유언 (창세기이야기 마감)

    Date2005.06.08 By이재형 Reply1 Views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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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36. 꿈(3) -꿈을 죽인 형들과 꿈을 살린 동생의 화해 -

    Date2005.05.07 By이재형 Reply0 Views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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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35. 꿈(2) - 할 일을 알려주는 해몽-

    Date2005.04.11 By이재형 Reply0 Views3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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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34. 꿈(1) -요셉의 이상과 고난-

    Date2005.03.09 By이재형 Reply0 Views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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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33 `축복`? (2)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화해-

    Date2005.02.08 By이재형 Reply1 Views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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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32. `축복`? (1) -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형제싸움 -

    Date2005.01.08 By이재형 Reply0 Views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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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31. 기도 -며느리 선택(기준) 이야기-

    Date2004.11.25 By이재형 Reply0 Views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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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8. 의인 열명을 채울 사람은?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이야기-

    Date2004.10.20 By이재형 Reply0 Views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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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7.“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부인 사라와 부인의 몸종 하갈,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

    Date2004.09.18 By이재형 Reply0 Views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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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5.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던 이야기 -잘못된 세상에서 잘못한 다음에-

    Date2004.06.23 By이재형 Reply1 Views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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