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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장례식과 유언 (창세기이야기 마감) 
창 49:29-33, 50:12-21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야곱의 장례식 절차에서 야곱의 유언대로 된 것은 무엇? 나머지는 무엇에 따른 것?
2.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로 갔을 때 고센이라는 특정지역에 살게 된 경위는?
3.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이집트 사회는 어떤 사회계층이 있었는지? 요셉은 어느 계층에 들어갔는지?
4.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한 일은 모두 좋은 일? 7년간의 기근을 만날 백성을 위해서 7년간의 풍년 때에, 수확의 5분의 1을 나라에서 저축해 두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이 곡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으로 예상하게 될까? 구호미로 방출 할 것으로? 그런데 이야기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 왔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5.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 계층사회에서나 왕의 절대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요?
6. 요셉 이야기의 주제는 그가 이집트에서 총리로서 공적을 남겼다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7. 요셉과 형들과의 화해는 온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된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야기 마감에서 이 형제화해 문제를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다시 다루고 있는 것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8. 야곱의 유언과 요셉의 유언에서 공통적인 점은 무엇?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묘지가 있는 가나안 땅에서 삶의 현주소인 이집트로 돌아왔었는데, 요셉이 죽은 다음 자기 시신만이 아니고, 온 친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이유를 어떻게 이해함이 좋을까?

이생(이승)과 저승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야곱은 곧 세상을 떠나서,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창49:29-31)고 말합니다. 후손들이 살 이생이 있고, 죽어서 가는 저곳, 조상들이 있는 저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 신앙고백인 새 신조는 “삶과 죽음과 죽음을 넘는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는 말로 마칩니다. 죽음 이편의 “삶”이 있고 죽음 저편에 “죽음을 넘는 삶,” 두 영역에 같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 조상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곧 죽음을 경계선으로 해서, 이편에 이생이 있고, 저편에 저승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인을 “좋은 곳”으로 보내려는 기원도 이생과 저승을 전제로 한 정성이겠습니다. 

죽음을 문턱으로 해서 나눠진 이생에 대해서는 체험하는 바도 많고, 아는 바도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승이나 “죽음을 넘는 삶”에 대해서는 체험할 수도, 아는 바도 없다고 함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특수한 경우를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생에서 저승으로 가는 문턱을 건너가는 죽음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있고 체험하는 바가 하나는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버스, 전차, 기차 노선 등에는 다 종착역이 있습니다. 이 종착역의 특징은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2002-2003), 사랑하는 한 분이 직장 사고로 뜻밖에 고인이 되었습니다. 생시 출근할 때, 차보다 편해서, 전철을 타고 다녔는데, 퇴근길에 깜박 잠이 들어 내릴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착역까지 갔다가 잠을 깨고 되돌아와야 했던 일이 종종 있었답니다. 이생에서의 모든 노선은 종착역이라는 데서, 또는 다른 아무 역에서나 되돌아올 수가 있는데 반하여, 저승으로 가는 노선은 일방통행일 뿐입니다. 되돌아오는 차편이 없습니다.

“있고 없음”이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시신을 묻는 일 뿐입니다. 장례식이라는 중요한 예식 절차를 정성으로 마치는 일뿐입니다.

이생에서 저승으로 가는 그 길이 되돌아 올 수 있는 길이라면, 고인이 된 이들이 되돌아와서 필요한 일들을 손수 하거나, 가족에게 할 말도 할 텐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유언이나 유서를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유언도 유서도 없는 경우에도 말없이, 글 없이, 남겨진 고인의 뜻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언이나 유서는 저승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저승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유언이나 유서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생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고인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의 본뜻도 제자들과 기독 신도들의 저승의 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서 산 사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하늘의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장례식 

야곱의 유언은 자기가 죽거든,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 있고, 그의 부인 레아도 묻혀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창49:29-32). 요셉은 이 유언에 따라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모실 장례절차를 준비합니다. 장례절차는 그 지방의 관례를 따르게 마련인데, 요셉은 이집트의 고관으로 왕실의 장례절차를 따른 것으로 써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시의들을 시켜서, 시신에 방부제 향 재료를 넣게 하였는데, 꼬박 사십 일이 걸렸답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칠십 일을 곡하였답니다. 곡하는 기간이 지나서, 요셉이 바로에게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갔다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바로의 허락이 내리고, 바로의 모든 신하와, 그 궁에 있는 원로들과, 이집트 온 나라에 있는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안과, 그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사람이, 그들에게 딸린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는 고센 땅에 남겨둔 채로, 요셉과 함께 올라가고, 거기에다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을 호위하며 올라갔는데, 그 굉장한 상여 행렬이 볼 만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쪽에 이르러서 이레 동안 애곡하였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의 장례로 생각했다고 했습니다(창50:4-11).

이런 이야기는 장례식 절차가 장엄했음을 통해서 요셉의 지위 높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어긋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장례식은 사람의 처지와 생각에 따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유언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고인이 이런 일에 생각이 미쳐 유언을 남긴다고 하면,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이 보다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가 죽거든 가나안 땅으로 가서 묻어 달라고 한 그 유언은 그저 보통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뜻만이 아니고, 이집트 사람의 장례로 보일 정도였던, 이런 장례절차를 낳은 이집트의 사회 풍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피난지일 뿐 살 곳은 아님 
 
야곱이 식구를 거느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로 가는 도중 밤에 환상 가운데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거기서 너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하시는 음성도 들었답니다(창46:1-4). 이를 보면,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고관직”에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가는 길이었지만, 이집트가 마음 내키는 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가서 묻어달라고 한 것은 야곱만의 유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이집트에서 생을 마치기 전에 친족들에게,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창50:24, 25)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저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살고 있는 땅과, 그가 난 곳과,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 주는 땅으로 가라”는 음성에 순종한 것이었는데, 이집트 사회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그 사회 체제)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집트 사회에서 떠나야 할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것이 성경이야기에 나와 있습니다. 

1) 농노와 소작제

요셉이 온 백성을 기근에서 구했다는 이야기 속에 새로운 문제가 싹트게 됩니다. 온 백성을 왕실의 노예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경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굶주리게 된 백성들이 요셉에게 곡식을 사가노라고,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이 요셉에게로 몰렸고, 요셉은 그 돈을 왕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에 돈마저 떨어지자, 요셉은 한 해 동안 내내 백성들이 기르는 집짐승을 받고 곡식을 내주도록 했답니다. 다음 해가 되면서는 백성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알몸뚱이와 밭뙈기뿐이어서, 백성들은 먹을거리를 위해 저들의 밭을 바치고, 몸을 바쳐 왕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의 모든 밭이 바로의 것이 되고, 백성들에게 씨앗을 나눠줘서 농사를 짓게 하되, 거둔 것에서 오분의 일을 왕에게 바치게 했답니다. 나머지 오분의 사를 백성들이 가지되, 거기서 밭에 뿌릴 씨앗을 따로 떼어 놓고 남는 것으로 살게 하는 토지법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창47:13- 26).

2) 유목민 차별의식 

이집트로 옮겨온 야곱의 대가족은 고센이라는 땅에 살도록 되었는데, 이는 왕이 요셉의 청을 들어줘서 특별히 내린 배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청한 이유가 있었답니다. 곧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려서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창46:34하) 했습니다.

3) 계층사회

온 백성의 땅이 왕의 소유로 넘어갈 때, 제사장들의 밭은 왕의 것이 되지 않고 저들의 소유로 남았는데, 그 이유는 왕에게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어서,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창47:22). 왕이 요셉을 총리로 세울 때, 왕이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는 옥새반지를 끼워주고, 고운 모시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목에다 걸어 주었고, 왕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를 내려주며, 총리로서의 관직명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곧 요셉은 소작제도에 구애받지 않은 특권 계층사회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창41:41-45).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대가족은 이집트인 소작인 계층에도 끼지 못한 변두리 유목민으로 별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명철과 슬기도 권력에 이용당함 

기근을 대비해서 7년간 쌓아 두었던 수확의 5분의 1을 굶주린 백성을 위해 구호미로 나눠주었다면, 요셉의 명철과 슬기가 하늘의 뜻에 맞게 사용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7년간의 저축이 오직 왕의 재산권을 최대로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요셉의 명철과 슬기가 왕권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35. 꿈2 -할 일을 알려주는 해몽-> 꿈은 앞으로 올 기근을 대비해서 왕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몽하면서, 첫째로 왕이 할 일은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책임자로 세워 다스리게 하는 것”(창41:33)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등용된 목적은 앞으로 있을 흉년을 맞을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백성을 소유권이 없는 농노로 전락시키고, 왕의 소유권을 최대로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왕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그 사회의 권력구조에서는 요셉도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이 악한 정권에 이용당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집트 사회에서 요셉이 “귀족”층에 끼었으나, 결국 그는 이집트 귀족 사회의 노예였고, 왕권과 왕의 재산권 확대를 위한 노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35.꿈2 -할일을 알려주는 해몽-> 본대로 경호 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노예로 사간 이유는 요셉이 유용해서만이 아니고,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창39:2-5)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까지도 이용대상이 된 셈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을 섬긴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혼돈과 어두움 등 좋지 않은 것에서 질서와 빛 등 좋은 것을 창조하실 때 마다 좋다고 하셨다는데 반해서, 사람은 좋은 에덴동산도 좋지 못한 것으로 변질 시켰다고 했던 것처럼, 사람은 백성을 위한 5분의 1 저축제도도 왕권을 위한 착취제도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흔히 이 성경 이야기를 그가 이집트에서 “총리”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보고, 요셉을 영웅시하는 시각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의 주제는 총리로서의 그의 업적 찬양이 아니고, 노예로 팔려나간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형들을 용서하고 형들이 참회할 기회를 만들어 사랑의 형제관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비록 이집트에서의 고관직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는 있으나, 그 후 그곳에서 그의 가족들이 잘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야기 마감에 중요한 일로 강조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봅니다. (1) 야곱의 장례식 후에 할 일로 형제간의 화해 문제(창50:15-21)와, (2) 장례식 후에 삶의 현주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 (3) 요셉의 장례식 후에 할 일로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을 가야한다는 문제(창50:21-25)인데, 이중 형제화해 문제와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로 가야 한다는 문제는 각각 고인의 유언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후에 할 일(1) -형제화해-

앞 장에서 <36. 꿈3 -꿈을 죽인 형들과 꿈을 살린 동생의 화해-> 본대로 형제간의 화해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이 문제를 야곱이 죽고 난 이후, 장례식 다음에 할 일로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혹시나 복수를 하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에서 아버지가 형들을 용서해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면서, 용서해 주기 바란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창50:1 -17).

야곱이 이집트로 왔을 때는 이미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유언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후일에 있을 수 있는 복수를 염려했다면, 야곱이 직접 요셉에게 자기가 죽으면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할 때, 함께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유언을 간접으로 형들에게 했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형들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성경 이야기의 주제가 형제화해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장례식 후에 생기는 형제간의 재산 싸움 등 불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장례식 후에 할 일로 가장 중요한 일은 형제간의 화해였습니다. 장례식은 그 절차를 마쳤어도, 형제화해는 아직 지켜야할 유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다음에 할 일(2)
-묘지에서 삶의 현주소로-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그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고 그와 함께 갔던 형제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 왔다”(창50:14)라고 했습니다. 말로나 글로 남기지 않은 유언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고인을 떠나보내고 난 다음, 이생의 사람들은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은 고인의 뜻이고, 하늘의 뜻입니다.

이집트라는 땅은 요셉이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노예로 팔려간 땅이고, 야곱의 가족들도 기근을 피해 간 이국땅이지만, 삶의 현주소였습니다. 묘지가 가나안 땅에 있다고 해도, 묘지는 묘지일 뿐 삶의 현 주소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반드시 묘지가 있고, 특별한 때에 묘지를 찾아가게 마련이겠지만, 삶의 현주소는 묘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장례식 다음에 할 일(3)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로-

그런데 삶의 현주소에도 그대로 안주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요셉도 죽어서 그 땅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는 요셉이 삶의 현주소인 이집트로 돌아왔어도, 당대에 다 실현할 수 없는 유언이 하나 더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의 명철과 슬기로 이집트 왕의 부를 증대시켜준 것은 노예로 팔려왔던 그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내려진 하늘의 사명을 다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백성을 왕의 농노로 만든 일이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혼돈과 어두움의 상태와 같은 미움과 경쟁의 형제관계가 화해를 거쳐 사랑의 관계로 회복될 때, 동생도 형도 이전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나, 형제관계를 넘어선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그 사회가 보다 나아진 것이 아니고, 더 악화된 것이었습니다. 기근에 대비한 일까지는 이집트 사회에서 요셉의 공로가 있었다고 해도, 결국 그 사회는 유목민 차별 사회였고, 농노와 소작제에 의한 착취사회로 변했고, 계급사회로 굳혀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착취의 권좌에 앉은 왕이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백성들의 삶의 환경이 보다 더 좋아진 것도 아니고, 보다 더 바로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근에 대비해서 시작한 좋은 일이 굶주림을 이용해서 착취가 시작되었습니다.

차별과 착취가 없고, 노예가 없고, 계급이 없는 보다 바로 된 사회를 창조하는 길은,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은, 다시 떠나야 할 사명의 길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집트 사회의 특권 계층의 혜택을 누린 요셉은 이런 사명의 길을 가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의 길은 다음에 이집트 기성 사회의 체제를 부정하고, 그 사회의 특혜(공주의 아들 자리)까지도 부인하고 떠난 모세에게 와서 이뤄질 사명으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이야기는 다음 출애굽기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1) 첫째, 세상의 모든 문제를 사람 본성의 문제(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다루고 있습니다. (2) 둘째, 인간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곧 개인 대 개인 간의 문제(대표적인 예가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로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가서는 인간의 문제를 개인 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인간 집단인 공동체의 문제로 다루게 됩니다. 곧 창세기의 형제간의 이야기들은 보다 바른 사람을 지향하는 이야기라면, 출애굽기 이야기는 보다 바른 공동체(사회)를 지향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 ?
    김창한 2005.06.16 05:19
    창조의 이야기라고 하는 창세기의 마지막이 장례식으로 끝다는 말씀 의미심장합니다. 약 2년에 걸친 목사님의 창세기 강좌가 끝났는데 책걸이도 못하는군요. 창세기 이야기는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혼돈에서 질서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열정이라는 이년 전의 첫 설교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이번 마무리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척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가로막습니다. 삶의 현실에 타협하고, 권력앞에 무릎꿇고, 돈에 눈이 먼 당연시되는 삶이 지속되는 한, 장례식으로 끝난 창세기의 이야기는 이집트의 노예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캘거리 교회라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작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모든 교우가 신앙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지난 몇 년간의 외로움이 가신듯합니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는 삶, 우리의 인생이 묻힐 무덤마저 여기가 아닌 저 곳에 있다는 나그네의 믿음, 순례자의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머물 곳은 캘거리도 아니고, 캐나다의 어느 곳도 아닌, 그리스도가 부르시는 곳이 바로 마지막으로 머룰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교훈 삼아, 늘 떠날 준비를 하는 삶, 나그네의 삶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외롭고도 행복합니다. 목사님의 건강, 걱정했는데 좋은 소식 들리니 다행입니다. 계속 진리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김창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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