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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야기

31. 기도  -며느릿감 선택(기준) 이야기-
창세기 24:1-20(34-38, 42-46, 58, 62-67)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맡은 일이 잘 안될 것을 염려하는 종 엘리에셀에게 아브라함이 해준 격려의 말은?
2. 아브라함의 격려에 용기를 얻고 길을 떠난 종 엘리에셀이 드린 기도의 내용은? 이 기도의 독특한 점은? 
3. 기도는 우리는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사연을 아뢰고, 그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하셨나?(마6:6-7)
4. 아들의 신부 감을 고르는 일은 그 집안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의 후계자를 고르는 일? 
5. 그 후계자를 선정할 선택의 기준은 어떤 것?(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 이런 경우 그 선택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 집안 주인이? 이 이야기에서는 누가?
6.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같은 것? 욕심 또는 목적에 따라 선택기준은 변하는 것 아닌지? 욕심에서 나올 수 있는 목적과 하나님께 받는 사명이 언제나 같은 것?
7. 이 이야기에서 선택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엇? 그것은 어떤 사람을 상징하는 것일까?
8. 며느리 감을 구하는 일종의 중매결혼 이야기가 현대에도 뜻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9.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에게 감사드릴 일(축복)은?
10.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두 사람은 며느리 감 리브가와 종 엘리에셀인데, 이 둘 중 누가 주역일까?

복의 근원 될 집안의 계승자

아브라함이 137세가 되고 부인이 127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이삭의 배필이 될 며느리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일로 남았습니다. 아들의 신부 감이면서 복의 근원이 되는 집안의 주부 사라의 뒤를 계승할 여인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결말에 보면,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창24:67)라는 말로 마칩니다. 복의 근원이 될 저들의 거처를 “사라의 천막”이라고 했는데, 이 천막의 새 주부를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혹시 잘못된 배필을 정하게 되면, 복의 근원됨이 아들 대에서 끊어질 수 있는 중대사였습니다.

선택을 위한 한 가지 원칙

아브라함은 한 가지 원칙만을 세우고 나머지는 다 그의 종 엘리에셀을 믿고 그에게 맡깁니다.

고향 친척들한테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 감을 골라 오라고 했을 때, 종이 “며느님이 되실 여인이 저를 따라오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주인어른의 아드님을 데리고, 주인께서 나오신 그 고향으로 가야 합니까?”(창24:5)하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나의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아라. 주 하나님이 나를 나의 아버지 집, 내가 태어난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너의 씨(후손)에게 주겠다’ 하셨다. 그러니 주께서 천사를 너의 앞에 보내셔서, 거기에서 내 아들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유는 아브라함 자신이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다”(창12:1)라는 말씀에 따라 떠났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들 대에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 가문에 내린 사명을 버리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을 내가 떠나온 그리로 데려 가지만은 말라”는 한 가지 원칙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일 맡은 이의 책임과 그 한계

이런 원칙을 세우면서도 그 일이 꼭 성사되리라는 보증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잘 안 되는 경우의 책임을 종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 줍니다. “신부 감이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창24:6-8)라고. “맹세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이 말은 그의 책임에 대한 말로, “그러니 너는 내 일가들한테로 가기만 하면 네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내 일가들이 며느리 감을 내주지 않아도 너는 책임이 없다”(공동번역 창24:41)라고 합니다.

모든 일이 제대로 되기보다는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은 다하는 것이고, 우리의 최선의 노력에 어떤 결과가 오는지에 대해서는, 곧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혜에 이름이고 자유로움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에서만 힘을 다해보려는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먼저 선택의 기준을 정하고 드린 구체적인 기도

이 이야기는 이런 선택의 원칙과 그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한 다음에, 기도를 드렸다는데, 그 기도 내용이나 방식이 흔히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전연 다른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다음 대를 이어받기에 합당한 성품을 가진 여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좋은 며느리 감을 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구체적인 생각이 없이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린 기도 내용은 “제가 오늘 여기에 와서,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여기 우물곁에 서 있다가, 처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그에게 항아리에 든 물을 좀 마시게 해 달라고 말하고, 그 처녀가 저에게 마시라고 하면서, 물을 더 길어다가 낙타들에게도 마시게 하겠다고 말하면, 그가 바로 주님께서 내 주인의 아들의 아내로 정하신 처녀로 알겠습니다”(창24:42-44)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드렸다는 정도가 아니고, 먼저 며느리 감은 어떤 사람이라야 한다는 선택의 기준을 다 정해놓고 “처녀들이 모이게 된 우물 가로 가서, 이러이러한 기준에 맞는 여인을 만나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사람으로 알겠습니다”는 식의 기도였다는 점이 다른 점입니다.

깨달은 다음의 기도

이 이야기에서 엘리에셀을 “늙은 심복” 또는 “할아버지”라고 했는데, 일생동안 그가 드린 기도가 숫하게 많았겠지만, 인생의 날을 다 산 무렵에 드린 이 기도는 그가 드린 기도 중 가장 뛰어난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어제의 나의 기도와 오늘의 나의 기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도는 나의 성숙도와 발걸음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시는 내용을 하나님에게 알리며 탄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엘리에셀의 기도는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아시는 것인데, 그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달아 알게 된 바를 내용으로 해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점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6:7-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나님이 이미 아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다음에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른 기도라는 뜻입니다.

복의 근원의 다음 대를 이어받기에 합당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야 할까? “이런 자리를 맡을 사람으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원하실까?”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되, 그의 일생의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 그 내용을 가지고 기도드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인 사라의 후계자 선택을 종에게 맡김

며느리 감을 선택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외모, 건강, 학벌, 실력, 가문, 재산, 성품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 엘리에셀에게 어떤 선택 기준을 먼저 정해 주면서, 그 기준에 맡는 사람을 골라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종에게 선택기준을 정하는 일까지 전부를 다 맡긴 것입니다. 엘리에셀을 “집안일을 도맡아 보는 늙은 심복”(공동번역 창24:2)이라고 했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종” 이라고 했습니다.

그 집안 주부 사라의 후계자를 선택하되 그 선택기준까지 종에게 맡겼다는 점에 이 이야기의 독특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주인이 하는 것이지, 밑에 있는 종이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낙타”와 선택 기준

엘리에셀은 선택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또는 앞으로 자기에게 유익할 사람을 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택의 기준을 정할 때 우선 생각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곧 화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이 되는 그 사명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하는 질문에서 선택의 기준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우물에서 길어 낸 물을 자기 가족이나 자기 양 떼만이 아니고, 나그네에게도, 더 나가서 나그네에게만이 아니고, 그 나그네가 타고 온 낙타의 목마름까지 알아보고, 그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려는 성품을 가졌고, 그렇게 행동함이, 복의 근원됨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에셀의 선택기준에서 말하는 “낙타”는 이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자신이 아브라함 집안의 일을 맡은 청지기로서 “낙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낙타는 목마름을 오래 동안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낙타가 목이 마르다는 것은 그 목마름이 극에 달했다는 말입니다. “낙타”의 이런 극심한 “목마름”은 고난을 견디고 또 견디어내며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의 갈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 집안에서 일생을 함께 사는 동안 일꾼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했다는 말(히13:2, 창18:1-8,19:1-3)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부부가 종 엘리에셀을 일찍이 양자로 삼으려고 할 정도로(창15:2-3) 신임을 해 주었었습니다.

이런 이들과 일생을 함께 살아오면서 “낙타”인 자기를 아껴주던 사라의 후계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판단은 그가 “낙타”로서의 일생의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정반대로 일꾼에 대한 냉혹한 학대를 체험해 왔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일군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사명과 선택기준

엘리에셀이 아브라함 가문의 며느리 감을 선택할 때, 먼저 그 가문의 사명을 생각하고, 그 사명에 맞는 사람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웠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의 모든 공동체에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공동체는 늘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데, 공동체의 회원이 그 공동체의 사명을 바로 인식할수록 저들의 선택도 바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세울 공동체의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에 알맞은 바른 선택의 기준을 몸에 익히게 하기 위한 모범을 통하여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독신도들은, 예를 들어 선거를 할 때, 바른 선택기준을 가지고 바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참 신도 됨에 성공하는 것이고,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잘못된 선택을 할 때는 참 신도 됨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목적의식과 인도자(지도자) 선택의 기준

앞에서 사람의 외모, 건강, 학벌, 실력, 가문과 재산, 성품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행복을 찾는 인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의식이 달라지면 선택 기준도 달라집니다.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목적이 온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일 경우와, 온 세상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선택 기준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것이 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강도 집단이 그 구성원이나 인도자를 찾을 경우, 적임자는 폭력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력을 증강시키고 무력을 잘 쓸 수 있을 자를 국가원수로 투표하는 경우와 강도 집단의 경우에는 비슷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키우시는 과정에서, 수제자 베드로가 칼을 쓰려고 했을 경우,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26:52)고 그가 예수님의 선택 기준에 아직 미달되었음을 타일러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루려는 공동체의 목적이 강도단의 목적과 달랐고, 따라서 선택 기준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과 그 선택 기준이 하나는 악이고 하나는 선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목적이 선인지 또는 악인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자명한 것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목적은 사명과 다를 수 있음

예수님께서 당시 성전종교 지도층을 “강도의 소굴을 만든” 집단(마21:13)이라고 평하셨는데 저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보신 것은 예수님뿐이셨습니다. 저들은 성전을 살찌게 하려는 저들 집단의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목적과 같은 것으로 보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세인들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바로 이렇게 잘못된 종교에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시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고 하나님께 받은바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목적과 사명이 같은 것이었지만, 저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받은바 사명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적은 흔히 욕심에서 나온 것일 수가 있어서 사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임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욕심에서 나온 목적을 위한 선택기준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생각하는 “목적”을 하늘에서 받은 “사명”으로 내세울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세인들은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저들의 욕심을 위장하고, 사명으로 선전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소국가를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또는 문화적으로 침식해 들어갈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하늘에서 받은 “사명”으로 주장할 때는, 저들이 선택하는 기준도 다 하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인 집단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사명”이라고 주장했고, 저들의 기준을 하나님의 뜻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제3의 눈, 제 3의 길,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

인류 역사가 공업 사회로 발전한 후 자본가와 노동자(낙타)의 치열한 대립과 투쟁이 있었습니다. 한편, 노동자 착취가 있었고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폭력행사도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이 둘의 대립투쟁이 아니고 공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본과 노동력이 생산해내는 이윤이 자본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도 위한 것으로 되는 제 3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제 3의 방향이 엘리에셀 이야기가 보여주는 방향입니다. 함께 사는 길이 아닌 것은 다 옳지 못한 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엘리에셀 자신은 “낙타”이지만 주인(자본가 또는 기업주)의 신뢰를 받는 사람으로서 “낙타”이면서 동시에 주인이 된 사람으로, 둘의 대립이 아닌 공존을 실현 시킨 사람입니다. 이점에서 엘리에셀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제3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의 현대적인 뜻

대립과 분쟁이 없는 분야는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현대에 이를수록, 민족 간의 대립, 국가 간의 대립, 이해집단간의 대립, 종교 간의 대립은 물론, 같은 민족이나 같은 국가 안에서도 사상적인 대립,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간의 대립 등 대립현상이 더 심화되어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립이 아니고 공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 옛 이야기의 현대적인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대에는 대립현상이 심화되어 가는 반면에 자유선거(선택) 원칙이 모든 사회생활에 적용되어 갑니다. 바로 이 자유선거(선택)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이야기의 현대적인 뜻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곧 자유선거는 선택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선택의 기준을 정할 때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전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 며느리 감을 찾았다는 일종의 중매결혼 이야기이지만, 그저 배우자 선택 기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고, 인간 공동체의 사명과 그 사명을 수행할 인도자(지도자)를 선발하는 선택기준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사라의 후계자 리브가는 공동체의 인도자이고, 엘리에셀은 공동체의 인도자를 선출하는 공동체의 회원(국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성경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며느리 감을 구하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선택의 기준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어떤 기준에 맞는 사람을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은 엘리에셀이 스스로 생각해 낸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은 무엇일까요?

1)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고운 성품을 가지고 행동하는 리브가와 같은 이들을 이 세상에 있도록 하신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2) 선택의 기준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깨달은 엘리에셀과 같은 참 지혜의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피고용자(낙타)이면서 주인의 심복도 될 수 있을 만한 어진 사람이 있어서 대립과 투쟁이 아니고, 함께 사는 길을 갈 수 있도록 한 엘리에셀과 같은 사람을 있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누가 주역?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두 사람은 며느리 감 리브가와 종 엘리에셀인데, 이 둘 중 누가 주역으로 보입니까? 리브가가 주역으로 보이기도 하고 엘리에셀이 주역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찾고 대망하는 사람인 주인공은 리브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에서 엘리에셀의 비중이 큰 이유는 무엇일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이 둘 중 한 사람만 있어도 되나?”하고 또 하나의 질문을 해 보면 짐작이 갑니다. 리브가가 있어도 그를 알아보는 엘리에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대로 참 사람을 알아보는 엘리에셀이 있다고 해도, 그가 찾는 리브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이 성경 이야기는 이 둘 중 한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이 계셔도 그(진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구세주는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깨닫고, 눈이 열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았을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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