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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부인 사라와 부인의 몸종 하갈,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 -
    창 16:1-16, 21:8-21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첫째 이야기에서 (창 16:1-5, 7-11, 13)

1.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대를 이을 아이를 낳게 하는 당시 특정문화권의 풍습(몸종제도)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창12:1)을 가는 것이었을까?
2.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자기의 주인을 깔보았다”(창16:4)고 해서 주인 사라의 학대를 받게 될 때, 하나님은 왜 하갈과 그가 낳을 아들 이스마엘을 축복해 주셨을까?
3. 주인의 학대에 못 이겨 도망치는 하갈에게 천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4. 이때 천사는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창16:9)라고 하셨다는데, 왜 그리 하셨을까?
5.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간 사람은 누구? 사라? 하갈? 아브라함? 
6. 하갈이 하나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데, 무엇을 보셨다는 것일까?

둘째 이야기에서 (창 21:2-3, 5, 8-21)

7. 사라가 몸종의 몸을 빌어서 자기 아들을 낳게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제안했었는데, 몸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고 죽기를 바란 이유는?
8. 성경이야기에 악마의 말도 있는 것처럼, 성경이야기의 배경으로 나오는 사회제도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 있는 것 아닐까?
9. 몸종제도 하에서 사라와 하갈 두 여인의 싸움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닌지? 뿐만 아니라 이들 두 여인은 두 아들의 엄마가 된 것만이 아니고, 후대에까지 지속될 “형제싸움의 어머니”가 된 것 아닐까?

부인의 몸종 제도
(첫째 이야기, 창 16:1-5, 7-11, 13, 16)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저들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를 둘러싼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부인의 몸종을 첩으로 삼는 당시 풍습에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의 잘못?

이 이야기를 여종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자기의 주인을 깔보았다”(창16:4), “주인 사래를 멸시했다”(창16:5)는 말에 중점을 두고,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는 이야기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했기 때문에 남편이 부인에게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창16:6)라고 한 것이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이 이야기의 본뜻을 찾기에 앞서 이런 해석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26. “자식”에서, 사래가 사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창17:에 가서 된 일이고, 여기 몸종 하갈 이야기는 그 이전 창세기 16장에 있는 것이어서, 두 사람 이름이 옛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전통의 길과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
-몸종 제도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산 것은 이민자가 된 것이라고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에서 떠남이라는 말은 신약의 거듭남 과 맞먹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23. 떠나라?> 떠나라는 말에는 잘못된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나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은 그를 따라 왔던 것입니다.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대를 이을 아이를 낳게 하는 당시 특정문화권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그 길이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창12:1)을 가는 것이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몸종을 통해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6. 자식, 창17:18-19>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12:1)고 하신 말씀에는 이런 문화적인 관습도 떠나라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특정시대와 특정지역의 관습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 될 수 있을 만큼 완전무결한 것일 수 없고, 이런 관례법 하에서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희생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임신한 후에 주인 사래를 “깔보았다. 멸시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 대목을 몸종 하갈의 잘못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습니다.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에게 준”(창16:3) 그 처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까요? 아브람이 아내의 제안에 따른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까요? 몸종 하갈을 한 여인, 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몸”만으로 대함은 그녀를 동물이나 물건으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 아닐까요?

아이를 못 나면 여인으로서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은 당시 사회가 보는 시각이었고, 하갈만의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보는 당시 사회가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아이 못 나는 여인이 몸종의 몸을 “사용해서”아이를 낳게 하고, 그 아이를 빼앗아 자기 아이로 삼아, 아이 낳은 여인처럼 행세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갈의 언행에는 몸종제도에서 당하는 한 맺힘이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곧 하갈의 이런 언행은 사래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회제도를 그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 
-도피와 “갈 길”은 다름-

사라가 남편의 동의를 구하고 하갈을 학대하자 하갈이 도망쳤을 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하갈과 말을 주고받았다는 대목에 이 이야기의 본뜻을 찾는데 중요한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두 가지 질문에 하갈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둘 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첫째 질문에만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라고. 그저 도망을 쳤을 뿐 어디로 갈 것인지는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의 형편에서는 어디로 갈 것인지는 천사만이 일러 줄 수 있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갈 길을 일러줍니다. 도망쳐 나온 그 곳을 향해 되돌아가라고. 뿐만 아니라, 그 길에 들어선 다음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할지도 일러줍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창16:9)라고.

만일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주인을 “깔보거나 멸시”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몸종 하갈이 천대받아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크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창16:10-11)라고. 그리고 “그에게 열두 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창17:20)라고. 이런 축복은 사라에게서 낳을 이삭에 대한 축복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주인의 “아들”을 낳아 바치는 몸종이었지만, 이제는 한 여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야할 길은 도망치는 길이 아니고, 학대받는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학대에서 도망침은 당시 제도에 대한 항거이고, 그 제도의 특혜를 누리며 자기를 학대하는 주인에 대한 일종의 항거이긴 하지만, 결국은 몸종이 당하는 잘못된 현실에서의 도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피해도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도망친데 대한 말이 21장에도 나오는데, 가죽부대에 담아온 물이 다 떨어져 아이가 다 죽게 되었었다고 했습니다(창21:15-16). 만일 도망치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 아니고 생존이 가능한 길이었다면, 천사는 “학대받은 그 곳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로 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두 질문 중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라는 대답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천사는 죽음의 길을 계속가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는 말은 첫째로, 죽음의 길이 아닌 삶의 길을 가야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몸종제도 밑에서 몸종 됨에서 도피하지 말고, 몸종이면서도 몸종으로만 있지 말고, 어머니가 되는 길로 가라는 것이 천사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가 당해야할 고난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가서 잘못된 제도가 인정하는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살아남아서,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됨으로 그 제도를 안에서 변혁되게 하는 길이 삶의 길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라는 것이 천사의 음성이었습니다. 잘못된 현실에서 도피하지 말고, 거기로 되돌아가되, 그것을 부정하고, 바로 된 현실을 창조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잘못된 현실 속에서, 바른 미래를 창조하려는 이상을 향해 가는 길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은 이런 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볼 수 있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여 주실 길을 가기 위해서 길을 떠났던 아브람도, 그의 부인도, 하갈이 들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실 길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의 피해자인 하갈만이 잘못된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볼 수 있었고, 그 길을 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보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하고 감탄하면서, 하나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인의 학대에 못 이겨 도망치며 부르짖는 고난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몸종제도의 잘못을 보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은 잘못된 제도를 바른 제도로 개선하는 길이지만, 잘못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은 그 제도의 잘못을 볼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마음은 창조 이전에 있었다는 혼돈이고 어두움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혼돈에 질서를, 어두움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창조 이야기 시작이었는데,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이 어떤 제도의 잘못을 바른 것으로 창조하시는 방법은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키시는 길입니다(이 길은 희생자 하갈의 오랜 고난을 통해서 가해자 사래와 아브람이 변화될 때에만 가능한 길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방법이 아브라함 당대에 성취된 것은 아니었고, 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이긴 하였지만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 희생의 길을 유일한 길로 선택하셨던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몸종제도와 형제싸움
(둘째 이야기)

이 몸종제도의 문제점은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는 둘째 이야기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하갈이 돌아와 함께 산 다음에 사래도 드디어 아들 이삭을 낳게 됩니다(이때 종전의 이름 사래와 아브람이 각각 사라와 아브라함으로 바꿔집니다. 창17:5,15). 이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라고 몸종이 “멸시”도 “깔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끝나지 않고 더 심해집니다. 자기 몸종의 몸을 빌어서 “자기” 아들을 낳게 한다고 생각하고 제안해서 그렇게 했던 사라가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고, “남의 자식”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종도 그저 몸종으로 남아 있지 않고, 한 어머니로 되어 있었습니다. 두 여인은 배다른 두 아들의 어머니로 맞서게 되고, 사라는 몸종과 그녀가 낳은 이스마엘은 죽어야만 한다는 데까지 생각과 행동이 미칩니다.

언약의 상속자인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들의 이름을 고쳐 주실 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부인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 사라는 자기가 낳은 아들 이삭의 어머니는 되어도, 몸종을 시켜 낳게 했던 “아들”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름을 고칠 때 저들이 “거듭난 것”을 상징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옛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하갈이 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면서 살았지만,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21:10하)라고 사라가 말한 것과 같이, 몸종의 자식들은 여전히 “서자”로서의 천대를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하갈의 아들에 대하여 “너의 아들들은 들 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창16:12)라고 했습니다. 이는 서자의 후손들이 체험하는 한 맺힘을, 그리고 이복형제 후손들 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었던 것을 반영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적대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아니지만, 몸종제도가 시정될 때까지, 그 제도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난이 지속되는 한, 저들의 저항도 지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적대 관계가 폭력행사로 직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되게 하는 노력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혜자가 아니고 희생자를 통해서

잘못된 제도의 시정은 그 제도의 특권을 누리는 층에서 시발되는 것이 아니고 희생자 층에서만 시작되고, 시정을 위한 투쟁도 희생자 층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이기에, 이런 사명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죽게 내 버리지 않으신 것이고, 그 후손을 축복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몸종제도는 요즘의 사회보장제도와 같이 생활능력이 없는 여인들을 구제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겠고, 당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면도 있었겠으나, 이런 풍습에서 생기는 희생자를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 담긴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제도를 시정하시기 위해서는 그 제도의 희생자를 살리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시정을 위한 주역을 맡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잘못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잘못의 시정을 위해서 그 잘못을 볼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데, 이런 잘못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잘못된 제도의 수혜자들이 아니고, 희생자들이기 때문이겠습니다.

만일 이스마엘이 바로 언약상속자가 되었었다면, 몸종제도의 잘못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모친 하갈은 이집트 여인으로 히브리인 여인 사래의 노예였습니다. 오랜 후에 사정이 뒤바꿔져서, 히브리인이 이집트인의 노예가 되었을 때, 노예탈출 해방이 성취된 것은, 히브리인들이 노예 된 체험을 통해서, 제도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언제나 잘못을 볼 수 있는 의식이 무르익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그때 언약상속자로 되었던 이삭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사회가 신약시대에 와서 지배자와 피지배현상이 심해졌을 때, 예언자 요한이 저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며,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요3:7-9)고 하셨다는 것은, 이삭의 후예들이 잘못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곧 언약상속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배경인 특정 사회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

모든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예를 들어 몸종제도에서, 잘못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성경이야기는 아직 닫힌 책이 되고, 진주는 감춰진 채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야기에 언급되는 어떤 배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야기 본문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에 악마의 말이 있는 것처럼, <6. “성경에 악마의 말도”>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배경인 당시 문화적인 풍습에는 하나님의 뜻일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야기의 목적은 이런 문화적인 잘못된 삶의 현장으로부터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몸종 제도에서 두 엄마의 싸움과
후손들(형제들)의 싸움

몸종제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라와 하갈의 싸움은 저들 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후대로 이어져서 형제싸움으로 번집니다. 이 형제싸움은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21: 10하)라는 사라의 말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에 싸움의 씨가 잉태되었고, 자식을 생각하는 이 엄마의 마음은 자기 자식에게만 재산을 남기려는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몸종제도 하에서 주인과 종으로 등장한 사라와 하갈은, 이제 주인과 종이 아니고 두 아들의 엄마로 맞서게 됩니다. 후대에까지 지속될 싸움의 어머니들이 된 셈인 것입니다. 자식만을 낳은 것이 아니고 형제 싸움을 낳은 것입니다.

한 엄마의 두 아들이었는데도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시작된 성경이야기는 두 엄마의 아들들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싸움의 계승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잘못에서 생긴 싸움이 계승될 것이 불가피한 데, 어떻게 이런 싸움이 끝날 수 있을 것인지, 잘못 심겨진 씨를 바로 추수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이 성경 이야기는 남겨놓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에서는 이에 대한 대답은 아직 없고 다음에 이어질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에서 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몸종제도의 문제는 이삭의 아들 야곱 대에 와서 더 복잡해지고 싸움이 극에 이르게 됩니다. 야곱이 원치 않았지만, “그 고장의 법”(창29:26)이라고 하는 데서 불가불 외삼촌의 딸 레아와 라헬 두 형제를 아내로 삼게 되고, 이 두 아내에게  딸린 두 몸종을 더해서 (레아의 몸종 실바와 라헬의 몸종 빌하) 배다른 네 어머니 밑에서 생긴(창29:, 30:) 열두 형제간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 곧 요셉 이야기(창37-50)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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