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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보여주실 땅”으로 가면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둘째 조건-
                        창 13:1-18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들어간 가나안 땅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실”그 땅이었을까?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적인 땅이었을까?)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서 떠난 일을 신약에서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습니다. ...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히브리서11:8,10)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3. 그 땅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체험한 일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4. 아브라함이 “피난길에서 부자가 되었다”(창13:2)는 말과 “전쟁에 이겼다”(창14:15-16)는 말은,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이라는 말과 관련시켜서 볼 때, 어떤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5. 재산(양떼들)이 많아지자 땅이 좁아져서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아지게 되었을 때, 그 해결의 길로 아브라함이 제안했다는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 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 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 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13:9)는 말은,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말과 관련시켜 볼 때, 어떤 뜻이 있을까?
6. 아브라함이 롯에게 했다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창13:8)는 말은, “보여주실 땅”과 관련시켜 볼 때, 어떤 뜻이 있을까?
7. 비좁은 땅의 문제를 해결함에 필요한 것은?
8. 땅을 둘러싼 다툼을 해결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제안  에서 어떤 점이 “믿음의 조상”다운 것이었을까? 조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알고 한 것이었을까? 무엇을 믿고 한 것이었을까?(“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습니다”는 말을 이 대목에 적용시켜보면 어떤 뜻이 있을까?)
9. 조카에게 한 약속(협약)에 독특한 점은?
10.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다”(창13:9)라는 말이나,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창13:14-17)는 말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땅에 가면 소유욕을 다 채울 수 있다는 뜻일까?

갈 곳을 모르고 떠남
 
이민자들의 떠남은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을 향해서 간다는 확신이 있어서 하는 행동입니다. 떠날 곳과 갈 곳을 비교해 볼 수 있을 만큼은 갈 곳에 대해 아는 바가 있어서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에는 보통 이민들의 떠남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떠나서,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보여 주실” 땅이지, “보여 주신” 땅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은 떠나기 직전까지 체험하고 있는 기성사회체제와 전통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 못된다고 보고,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선언하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보여주실 길로 가는 일은 아직 남아있는 과제였습니다. 그가 하란 땅을 떠난 다음 바로 이상적인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실 새 사회

흔히 “가나안복지”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가 간 곳이 마치 에덴동산과 같은 곳인 것처럼 이상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과는 다른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곳도 옛 땅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이미 살고 있었던 사람들도, 새로 들어간 사람도, 여전히 에덴바깥세상의 인간들이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곧 이미 저주의 근원이 된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소위 “성지”라는 말도 다른 곳은 다 “속된 땅”이고 그곳만은 “성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사람 때문에 저주 받은 땅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입장입니다. 어느 곳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가 되고 “성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은 물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길”을 함께 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떠남은 단순히 어떤 땅을 떠나 다른 땅으로 간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가나안이라는 중동 지방의 특정된 땅이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 그것이었다면, 지금도 그 땅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민족 사이의 폭력살인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살던 땅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는 말은 “잘못된 삶의 길을 떠나, 바른 삶의 길로 가라”는 뜻입니다. “보여주실 땅”이라는 말은 보여주실 “새 사회,” 새 세상,” 새 길,” “하나님 나라” 등과 같은 뜻의 말입니다. 어디서나 생길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 대로, 곧 하나님의 뜻대로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세상을 이룩하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뜻을 해석한 것을 보면,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습니다. ...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히11:8,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세우실”새 도시를 바라보고 떠난 것이지, “이미 세워놓은” 도시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세우실 이 새 사회는 아브라함은 물론 인간이 단 한 번도 체험해 본 일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옛 땅과 다름없는 문제가 있는 땅

아브라함이 하란이라는 땅을 떠나 “새”(다른) 땅에 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다른) 땅에 갔다고 해서 옛 땅에 있었던 인간의 문제가 없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이야기는 그 “새” 땅에서도 직면하게 되는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새” 땅에서 새로 생긴 문제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살던 땅에 있던 문제의 씨를 함께 가지고 온 것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는 문제는 조카를 옛 땅에서부터 함께 데리고 온 데서 생긴 문제이고, 아내와 그 여종 때문에 생긴 가정의 모든 문제도 옛 땅에서 함께 가지고 온 문제들이었습니다. 

가정 문제로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없어 아내의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은 후, 두 여인간의 갈등에 말려들 뿐 아니라, 아내가 아들을 낳은 후에는 하갈과 그 아들을 광야로 내 보내 사경을 헤매게도(창16:1-16, 17:15-22,18:1-15,21-21) 했습니다.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칠 뻔한 일도 있었고(창22:1-14), 아내 사라가 죽어 장지를 사야했고(창23:1-20), 아들 이삭의 아내를 전에 떠나온 하란 땅에 가서 맞아오게 했고(창24:1-67), 재혼해서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이삭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며,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은 재산의 한 몫씩 나눠주고는 이삭과 떨어져 살게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창25:1-11) 합니다. 계속해서 그 자손들 대에 생기는 문제들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들 이삭에게서 난 손자 쌍둥이 에서와 야곱 사이의 장자권을 둘러싼 싸움(창25:19-33:17), 야곱의 딸을 연모한 남자가 속한 부족을 종교 의식을 이용해서 학살한 일(창34:1-31), 야곱의 12 아들 중 요셉에 대한 배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음모에 따른 이야기(창37:1-36,39-50) 등 인생의 문제로 가득 찬 땅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50장까지의 긴 이야기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그와 그의 후손들이 과연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대로 대처했는지 그 여부를 보여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땅을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가 살던 땅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는 데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땅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그 중요한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근이 들어 피난민을 낸 땅

1) 첫째 이야기는 가나안 땅은 기근이 너무 심해서 얼마동안 이집트에서 몸 붙여 살려고 피난을 갔어야 했다(창12:10-11)는 이야기입니다. 피난지에서 “바로 왕이 그를 잘 대접해 주어서, 양떼와 소떼와 암 나귀와 수나귀와 남종과 낙타까지 얻었고”(창12:16), 모든 재산을 가지고 피난길에서 돌아 온 다음에는 “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부자가 되었다”(창12:20,13:1-2)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을 찾아서 들어간 이민지 가나안 땅은 기근과 같은 어려움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민지에 경제 공항과 같은 어려움이 생기면, 우선 뿌리 뽑힌 나그네 인생, 변두리 인생이, 피난민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런 떠돌이 나그네에게도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되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땅)”이라는 뜻으로 봄이 좋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자 됨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이라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쟁이 있는 땅

2) 둘째 이야기는 그가 들어간 그 땅은 전쟁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여러 왕들이 동맹해서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답니다(창14:4). 그의 조카 롯이 들어가 살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을 대항해서 인근 지역의 네 왕이 동맹군을 일으켜 침공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조카 롯이 사로잡히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자, 아브람은 그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싸워 승리했다(창14:1-3,8-16)고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쟁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한다는 등, 다른 사람을 패자로 만드는 전쟁을 찬양하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폭력 앞에서도 떠돌이 인생 나그네의 생존권이 보존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좁아지는 땅

3) 땅을 줄거리로 한 세 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그 땅은 아브람과 조카가 함께 머물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의 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창13:1-7)고 합니다.

재산이 늘어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만, 가진 것이 많아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구와 가축의 수가 늘어날수록 넓은 땅도 좁아지는 것이 땅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이 성경 이야기는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 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 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이전이었다. 롯은 요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창13:10 -13)고 합니다. 

비좁은 땅 밖으로 시선을 돌릴 때 보이는 열린 땅

이런 이야기 다음에 소돔이 “유황과 불로 멸망한다”(창19:25)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 롯이 결국 벌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보기 쉬운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곧 땅이 비좁아서 한 핏줄인 숙부와 조카 사이에도 생기게 되는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실 길”에 들어가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핵심인 것입니다.

누가 더 좋은 땅을 차지하고, 누가 덜 좋은 땅을 차지하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비좁은 땅에서 생기는 다툼을 막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고 한 이 말에 해답이 있습니다.

비좁은 땅의 문제를 비좁은 땅만을 보고 그 비좁은 땅 안에서만 해결하려면 비좁은 땅은 더 비좁아지고, 서로가 상대방을 없애려고 싸우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비좁은 땅만을 두고 다투는 길이 아닌, 제3의 길을 찾으면 넓은 땅이 보인다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더 좁아지게 마련인 그 땅만을 보지 않고, 그 땅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문제가 된 그 땅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좁아지는 그 땅만을 볼 때는 다투는 길밖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는데,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나서야, 새로운 선택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나서야,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 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 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야만 다툼을 피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아브라함에게도 더 넓은 땅이 트였다고 합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창13:14-17). 비좁은 땅만을 보지 않고, 눈을 돌려 둘 다 사는 길을 찾을 때는 길이와 너비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땅이 주어지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약자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주는 길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는 말은 핏줄이 다른 타인이나 타민족과는 다투어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기초가 되는 혈연관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데 힘이 쓰이는 것이 아니고,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쓰이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좁아지는 땅 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조카에게 먼저 왼쪽이든 오른 쪽이든 선택하도록 하고 그 선택을 인정하겠다고 언약함으로 다투어야 할 이유를 최대한 없앴다는 것입니다.

보통 협약은 강자에게는 유리하고 약자에게는 해롭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세상인데, 이 이야기에서는 선택의 우선권을 나이 많은 숙부가 강자로서 먼저 행사하지 않고, 약자인 어린 조카가 먼저 선택하도록 했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이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만일 이런 제안에 롯이 선택의 우선권을 연장자에게 양보를 했다고 해도 저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간 셈입니다.

비좁은 땅에서 서로 다투는 길도 아니고, 왼쪽 오른쪽 중 더 좋은 곳을 차지하려는 길도 아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다투지 않으려는 제3의 길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아직 낯 설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떠돌이 나그네로 약자들이었습니다. 어떤 곳에 어려움이 생기면 약자들에게 더 심한 피해가 오게 마련인데, 약자들끼리 서로 다툼으로 자멸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무엇은 먹지 말라”가 핵심이었던 것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다투지 말라”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투지 않고 떨어져 살면서도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는 말은 좁은 땅의 문제를 두고 다투거나 약자의 땅을 빼앗지 않아도 되는 제3의 길을 보는 눈을 하나님이 열어 주실 때 보이는 그 길을 믿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는 처음에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있던 곳을 떠난 것처럼, 지금 비좁은 다툼의 현장을 떠나 넓고 열린 미래의 길을 가라는 말씀에 순종한 셈입니다.

인생의 바깥 문제 해결의 길은
믿는 마음 안에서 시작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음 밖에 있는 문제와 마음 안에 있는 문제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밖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마음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신병의 경우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해결의 길은 마음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음 밖의 문제 해결의 길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할까요? 마음 안에서? 마음 밖에서?

마음 밖의 문제란 (1) 물질과 관련된 모든 문제와, (2)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체험되는 모든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물질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문제로 되게 마련이고, 또 이 마음 밖의 모든 문제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는 마음 안의 문제로 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마음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에서 비좁은 땅의 문제는 마음 밖에 있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두고 하는 말로 보아도 좋겠습니다. 곧 조카와 삼촌의 양떼들과 그 양을 칠 땅이라는 물질과 관련된 마음 밖의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삼촌과 조카, 그리고 이들의 종들 사이의 문제여서 마음 안의 문제로 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저들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해결의 길에도 두 가지 갈래가 있게 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남도 살아야 한다는, 다른 사람과 하나 되어 살려는 마음의 길입니다. 싸우는 길도, 싸우지 않은 길도 다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부자로서의 재력과 승전자로서의 무력을 동원하여 싸우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길은 남을 누르는 길이 아니고, 남도 살리는 두 번째 길이었습니다. 이 길이 화의 근원이 아닌 복의 근원이 되는 길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었고, 이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이 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좁은 땅, 막힌 땅에서도 남을 죽이지 않고 살리려는 마음의 길을 선택함으로 넒은 땅, 열린 땅을 보게 되는 감격을 체험했기에, 그는 나그네 길을 가는 도중 장막을 치는 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준다’”(창12:7)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고, 장막을 치는 곳곳에서 “제단을 쌓아 하나님에게 예배드렸다”(창12:8,13:4,18)고 한 것입니다. 그가 드린 예배는 비좁음에서 넓음으로, 막힘에서 열림을 체험한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싸우는 길을 택했다고 하면, 서로가 이기게 해달라고 “예배”드렸을 것이고, 둘 중 한 편이 승자가 되어 승리에 감사드리는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예배였을 것입니다.

끝없는 소유욕과 끝 있는 몸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다”(창13:9)라는 말이나,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창13:14 -17)와 같은 이런 말들은 물론 옛날 인구가 적고 공지가 많았을 때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좁은 땅만을 두고 다툴 때는 보이지 않던 제3의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에서 지금도 해당되는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땅에 대한 소유욕을, 곧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따르는 길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욕심을 따르는 길은 (1) 다른 사람과의 다툼을 피하는 길일 수가 없다는 문제만이 아니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2) 욕심은 끝이 없는데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는 문제 입니다. 물질이든 권력이건 명예건 밖에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결국 끝없는 욕심의 문제가 되어, 소유를 얻고 목숨을 잃는 허무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려서 읽은 이야기인데 그 요점만 회상해보겠습니다(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하나? 는 톨스토이님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한없이 넓은 땅을 차지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해가 뜨면서 들판 한 지점을 떠나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든지 달려서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점에 돌아오면 그가 돌아온 그 경계 안의 땅을 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출발신호에 맞춰서 남쪽으로 달려갑니다. 할 수 있는 한 멀리 달려간 다음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려갑니다. 조금만 더 넓히려는 심정으로 계속 달려갑니다. 이제 됐다 싶은 지점에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달립니다. 마지막으로 출발점을 향해서 동쪽으로 달립니다. 그런데 출발점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그만 해가 지고 맙니다!

그런데 출발점에 모여 기다리던 관중들은 소리를 지릅니다. 포기하지 말고 달려오라고. 출발점은 높은 언덕이어서 아직 해가 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이제 동서남북 눈이 볼 수 있고, 발로 달려갈 수 있을 만큼의 그 넓은 땅이 다 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진맥진 쓰러진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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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한 2004.04.16 21:48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 번 말씀을 통해서 약자에 대한 배려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배려는 참 감동적입니다. 마음 밖의 재산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톨수토이의 우화처럼, 이 사람이 가진 땅은 자신이 묻힐 만큼의 땅이었겠지요. 저는 신앙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땅을 많이 가지려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전가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의 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독점하고, 그 독점을 이용해서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욕심입니다. 자기와 다른 신앙을 보고 그 다름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해석의 다양성의 아름다움에 경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단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탐구와 실천을 통해서 늘 새롭게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창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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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정섭 2004.04.19 18:13
    목사님! 그동안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는데 다시금 이렇게 좋은 나눔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죠?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난 4월5일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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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보여주실 땅`으로 가면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둘째 조건- 2 이재형 2004.04.12 2214
22 23.“떠나라”?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첫 조건- 3 이재형 2004.03.13 3098
21 03. `룻기` 이야기 -`도중하차`식 성경해석의 문제 (예2)- 1 이재형 2004.02.23 3812
20 22. `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 3 이재형 2004.01.31 2819
19 04. 과부의 헌금 이야기 - `우물안 개구리`식 성경해석의 문제(예 3)- 이재형 2004.01.20 5279
18 21.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아브라함, 아내들, 그 후손들 이야기 1 이재형 2004.01.17 2928
17 20. 바벨탑 이야기 -힘과 혼돈- 이재형 2004.01.10 2785
16 19.“무지개”이야기 -새 세상을 위한 언약- 이재형 2004.01.03 2502
15 18.“홍수”이야기 -폭력 세상의 마감- 이재형 2003.12.27 2315
14 17. 왜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을까?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2)- 이재형 2003.12.20 2523
13 16. 화난 마음의 계획은 다스려야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1)- 이재형 2003.12.14 2599
12 15. `임신의 고통과 해산의 진통`? -에덴동산 바깥세상에서- 1 이재형 2003.12.06 3517
11 14.“하나님의 형상”? 1 이재형 2003.11.30 1903
10 13.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네가 어디 있느냐?`- 1 이재형 2003.11.22 2510
9 06. 성경에“악마”의 말도 -거룩한 책이라는 선입관에 잡힌 성경해석의 문제 (예5)- 1 이재형 2003.11.15 4143
8 10.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2)- 이재형 2003.11.08 2495
7 12.“한 몸 됨”? 4 이재형 2003.11.02 2575
6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2 이재형 2003.10.18 3113
5 0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1) -복의 근원될 가능성 상실과 화의 근원- 1 이재형 2003.08.24 2480
4 0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3 이재형 2003.08.19 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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