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231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8. “홍수”이야기
  - 폭력 세상의 마감 -      창세기 6:1-8:22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이 이야기는 종종 있는 홍수, 태풍 등의 이야기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점이 다를까?
2. 하나님이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6)고 했는데 무엇을 후회하셨다고?
3. 그 이유는? 하나님이 무엇을 “보셨기” 때문(창6:5,창6:11) 이라고?
4. 하나님께서 “홍수”를 사용해서 하신 일은 무엇? 목적은?
5. 하나님께서 노아가 하도록 시키신 일은 무엇? 방주를 만드는 일만?
6.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창6:9)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완전무결한 사람이었다는 뜻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세인들과 다른 점이었을까?
7. 이 이야기에서 노아의 “종말신앙”을 보여준다고 한    다면, 이 신앙의 특징은? 흔히 듣게 되는 “말세”라는 말과 다른 점은?

“홍수” 이야기

요즘은 해마다 물난리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지층이 움직이는 지진 때문이라고도 하고, 생태계파괴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인 경우는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성경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모든 생물을 땅에서 쓸어버리기 위해서”(창6:6-7) “홍수”(창7:6)를 일으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홍수는 잘못된 것을 쓸어버리기 위한 도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쓸어버려야 할 이유를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창6:13)라고. 여기 무법천지가 되었다는 말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번역하기도 합니다(영어 새 표준 수정 본).

일곱 갑 절로 원수 갚는 폭력세상과 강자예찬종교

앞 장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 벌을 받게 된다는 말은 살인자 가인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었는데, 가인의 후손들은 이 말을 일흔일곱 갑절의 원수를 갚는데(창4:24) 적용했었다고 했습니다. <17.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2)> 에덴 바깥세상은 일흔일곱 갑절로 원수를 갚는 폭력세상이었고, 원수 갚는 폭력행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 했던 것입니다.

이런 폭력의 주인공들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는 것처럼 된 기록으로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창6:4)라고. 이들은 일종의 “거인들”(민13:33) 이라고 했습니다.

약자의 아픔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인 족”인 강자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예찬하기 쉬운 것입니다. 무력이나 경제력에 의한 “강대국”을 “거인 족”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약자 편의 폭력행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것도 아니지만, 약자의 폭력행사는 “불법”이 되고, 강자의 폭력행사는 정당시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 강자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가 있지만, 약자는 보이지 않고, 약자의 아픔도 보이지 않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하셨다는 대목에서,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6:5-6), “땅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셨다”(창6:11)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자의 세상에서 희생당하는 약자의 아픔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약자의 아픔을 보심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보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14. “하나님의 형상”?> 곧 혼돈을 혼돈으로,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보실 수 있으셨기에 질서와 빛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홍수”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폭력 세상의 잘못을 잘못으로 보심에서, 곧 폭력 행사에 희생당한 약자의 아픔을 아픔으로 보심에서 바로 된 새 세상을 여는 창조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홍수”에 대하여 “땅 속 깊은 곳에서 큰물들이 터지고, 하늘에서 홍수 문들이 열려서, 또는 하늘에 구멍이 뚫려서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에 쏟아졌다”(창7:11)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첫 창조 때, 물을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셨던 것이 여기서 그 구분이 없어지고 다시 혼돈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또 “홍수”라는 말은 한 편에서 원수 갚음이 있을 때, 이에 대응해서 또 다른 편의 원수 갚음을 반복하다보니, 폭력사회는 “피의 홍수”를 이루었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새 시대는 이 피의 홍수가 끝나는 날인데, “땅 위에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창8:1)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홍수”이야기는 “사람 때문에 썩고 무법천지가 된 이 폭력세상이 어떻게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이에 대한 대답을 홍수 이야기와 무지개 이야기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홍수”이야기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홍수”이야기가 아니고 폭력세상의 종말과, 살아남을 공동체를 통한 새 시작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홍수”가 아니고 노아가(사람이) 

“홍수”라는 말은 폭력세상의 종말을 상징하는 말일 뿐, “홍수”가 바른 새 세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맨 처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한 것처럼, 여기서도 말씀으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한데 반하여,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노아라는 사람에게 말씀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출발에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시대에서 바른 새 시대를 여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이행함으로 새 시대를 열 이 노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폭력 세상의 잘못을 볼 수 있고
그 종말을 믿는 사람

첫째,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창6:9)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가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이 다 폭력을 믿고 폭력으로 살았는데 반하여, 노아는 폭력은 잘못이라는 입장을 취한 사람이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노아는 폭력은 잘못이라는 입장만이 아니고, “현재의 폭력사회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땅은 사람들 때문에 폭력으로 가득 찬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멸하겠다”(창6:13)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끝 날에 이르렀다”는 말은 “막판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불의한 폭력사회는 내부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 붕괴될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데, 이런 경우를 역사의 심판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역사의 심판을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쓰러버림”(심판)이라고 하고, 노아는 폭력세상의 “끝 날”(마감)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대기오염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강대국들이 오염방지를 위해서 정책방향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간다면, 언젠가는 종말에 이를 것입니다. 또 역사에서도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어느 왕조 때 지배층이 부패해서 백성을 착취하다 보면, 결국 국력이 쇠하게 되고 드디어는 왕조가 바꿔지게 되었던 경우에, 옛 왕조가 “끝 날에 이르렀다” “막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홍수”이야기에는 일종의 “종말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종말신앙”은 그저 “세상이 끝장난다”는 말만이 아니고, 잘못된 폭력세상은 끝장이 나야하고, 바로 된 새 세상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흔히 듣게 되는 막연한 “말세 신앙”이 아니고, 폭력세상의 마감과 새 세상의 시작을 확신하는 신앙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살아남아 새 세상을 열 계획을 실천하는 사람

둘째, 노아는 폭력시대가 속에서부터 붕괴될 때, 함께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그 방주에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 올려서 덮고,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창6:14-22).

홀로 설 수 있는 사람

셋째, 노아는 새 시대를 여는 사람으로서 그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외로움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세상이 다 폭력을 믿고 폭력으로 사는데 반하여, 폭력은 잘못이고 폭력은 망한다고 삶의 가치관을 달리해서 “방주”를 짓는 고독을 체험했답니다. 의로움은 외로움을 견디어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방주 속에서 지났다는 밤낮 40일(창7:12)은 오랜 기간을 뜻하는 말인데, 거기에 물이 빠질 때가지 150일(창8:3)이 걸렸다고 했고, 다시 40일이 지나서 까마귀 한 마리를 바깥으로 내보냈으나 물이 빠졌다는 징조가 없었고, 얼마 지나서 다시 비둘기 한 마리를 내보냈으나 되돌아오고 말았고, 또 이래를 기다려 다시 비둘기 한 마리를 내 보냈는데,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어서 땅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고, 다시 이레를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창8:6-12). 이런 이야기는 다 그가 긴긴 세월 고독 속에서 지났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시고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창8:1)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도 그를 잊으신 것 같다고 느끼는 고독과 절망의 때가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이야기 마감에 그가 술에 취했었다(창9:21)는 말이 나오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을 길고 긴 고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노아를 영웅화함을 막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이야기의 성경다운 점이 있습니다.

폭력이 아니고 언약 공동체를 통한 길

다섯째, 이런 노아의 계획과 실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폭력사회를 뒤엎고 새 시대를 열 때, 으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 “영웅”의 방식은 대중을 폭력 행사에 동원하고, 폭력 행사를 찬양하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시키신 계획에는 폭력사용이 온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폭력세상의 마감과 새 세상의 시작이 (1) 홍수만으로  된 것도 아니고, (2) 노아만을 통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3) 폭력이 아니고 살아남은 공동체를 통해서 새 세상이 열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노아 개인을 통한 구원 이야기로 볼 것이 아니고, 그를 인도자로 한 하나의 언약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폭력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대목에도 보면,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하고는 내가 직접 언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모든 짐승들도 한 쌍씩 방주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아남게 하여라”(창6:17하-20)라고 했습니다.

여기 노아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짐승들도 쌍쌍으로)이 방주 안에서 살아남게 된다고 했는데 이는 살아남을 새 공동체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이른 폭력 세상의 옛 공동체는 거인들이 지배하는, 곧 폭력이 지배하는 잘못된 “공동체”였음에 반하여, 이 새 공동체는 혈연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새 공동체는 자연적인 혈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는 언약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새 공동체의 특성인 이 언약의 내용이 다음에 나오는 무지개 이야기에 있는데, 역시 폭력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 24. `보여주실 땅`으로 가면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둘째 조건- 2 이재형 2004.04.12 2214
22 23.“떠나라”?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첫 조건- 3 이재형 2004.03.13 3098
21 03. `룻기` 이야기 -`도중하차`식 성경해석의 문제 (예2)- 1 이재형 2004.02.23 3812
20 22. `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 3 이재형 2004.01.31 2819
19 04. 과부의 헌금 이야기 - `우물안 개구리`식 성경해석의 문제(예 3)- 이재형 2004.01.20 5279
18 21.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아브라함, 아내들, 그 후손들 이야기 1 이재형 2004.01.17 2928
17 20. 바벨탑 이야기 -힘과 혼돈- 이재형 2004.01.10 2785
16 19.“무지개”이야기 -새 세상을 위한 언약- 이재형 2004.01.03 2502
» 18.“홍수”이야기 -폭력 세상의 마감- 이재형 2003.12.27 2315
14 17. 왜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을까?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2)- 이재형 2003.12.20 2523
13 16. 화난 마음의 계획은 다스려야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1)- 이재형 2003.12.14 2599
12 15. `임신의 고통과 해산의 진통`? -에덴동산 바깥세상에서- 1 이재형 2003.12.06 3517
11 14.“하나님의 형상”? 1 이재형 2003.11.30 1903
10 13.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네가 어디 있느냐?`- 1 이재형 2003.11.22 2510
9 06. 성경에“악마”의 말도 -거룩한 책이라는 선입관에 잡힌 성경해석의 문제 (예5)- 1 이재형 2003.11.15 4143
8 10.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2)- 이재형 2003.11.08 2495
7 12.“한 몸 됨”? 4 이재형 2003.11.02 2575
6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2 이재형 2003.10.18 3113
5 0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1) -복의 근원될 가능성 상실과 화의 근원- 1 이재형 2003.08.24 2480
4 0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3 이재형 2003.08.19 271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