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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경에 “악마”의 말도
  -거룩한 책이라는 선입관에 잡힌
    성경해석의 문제 (예5)-
                          창 3:5                             



앞에서 “도중하차”식, “우물 안 개구리”식, 그리고 “귀걸이 코걸이”식 성경 해석의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점은 성경이 “거룩한 책”이라는 생각에서 생기는 잘못입니다. 곧 성경에 담긴 모든 말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입관의 문제입니다.
수천 년 전 묵은 두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1) 몸종과 자식 이야기

아이 못난 부인이 남편에게 “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몸종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여종을 남편에게 줍니다. 과연 부인의 말대로 남편이 그녀와 동침해서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씨받이 이야기

어떤 남자가 사연이 있어서 부인은 죽고 딸 둘을 데리고 삽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루는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아무리 보아도, 이 땅에는 세상 풍속대로, 우리가 결혼할 남자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한 뒤에,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도록 하자”고 합니다. 그 날 밤에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에, 큰딸이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눕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딸이 와서 누웠다가 일어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튿날,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하기를, “어젯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하자.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아라”. 그래서 그 날 밤에도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하고, 작은딸이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 눕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작은딸이 와서 누웠다가 일어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 딸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위 두 이야기는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첫 이야기는 창세기 16장 1-4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부인의 몸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둘째 이야기는 창세기 19장 30-3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이야기입니다.

1. 특정 민족의 사회관습과 배타적인 우월주의

이런 성경 이야기들은 수 천 년 전 특정 민족 사회의 관습을 그 배경으로 해서 전개된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에 나온다는 것만으로 이런 옛 관습들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히 구약성경 이야기에는 타 민족을 천시하고 심지어 죽여도 좋다든가 하는 배타적인 대목들도 많이 나옵니다.

수천 년 전에 전수되고 글로 쓰인 성경 이야기에는 타민족에게도 적용될 보편성과 시공을 초월하는 범우주적인 하나님의 본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이렇게 되는 데는 잘못 이해된 선민사상이 그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민사상자체의 진정한 의미는 타민족을 위해 공헌할 사명을 위한 선택이지, 자기 우월감에 도취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이런 특수 민족 사회의 관습과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해서 엮어진 성경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을 진주를, 이야기의 본뜻을 찾아야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에 악마의 말도

그리고 더 나가서 성경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는 이런 옛 관습들만이 아니고, “악마”의 말도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예를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씩 찾아보겠습니다.

구약에 있는 악마의 말

구약 창세기 에덴동산 이야기에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3:1)는 물음과, “너희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3:5)라고 한 말은 성경에 있는 말이지만 “악마”의 말인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에 있는 악마의 말
-수제자 베드로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나무라심-

신약에서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을 때,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예수님은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거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16:21-23)라고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사탄이라고 지적당한 베드로는 그날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는 고백을 했는데, 이에 대하여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이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권세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일 것이다”(마16:16-20)라고 하실 정도로 칭찬의 대상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고, 교회의 반석이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기까지 한 수제자의 말도 사탄의 말이 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3. 악마의 성경(시편)해석과 예수님

신약에서 또 다른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악마”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마4:6)고 유혹할 때,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시91:11-12)는 시편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곧 뛰어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라고 이 시편을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해석을 악마의 해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본뜻과 달리 해석해서 인용한 말은 성경에 있는 말이라도 다 악마의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이해에서 보다 완전한 이해에로 
 
예수님은 악마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구별이 분명하지 않은 대목만이 아니고, 응당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왔던 대목들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 없다고 하시고 그 내용을 수정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출21:24)는 말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레19:18).
이 두 마디는 다 구약에 있는 말이지만 예수님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고쳐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5:38-40).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5:43-45).

이렇게 구약 성경에 나오는 것으로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해서 고치셨다고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지 말라”는 첫 말씀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복수를 금하는 것이겠습니다. 특히 이웃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둘째 말씀은 구약의 배타적인 경향을 수정하는 것이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고, 원수는 이방인이라고 했던 타민족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당시의 배타적인 이해를 우주적인 이해로 넓혀주신 것이겠습니다. 구약성경 이야기에서 자기 민족만을 공동체로 보던 것을 예수님은 신약에서 타민족까지 합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범위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사람의 이해가 불완전 하던 데서 보다 완전한 데로 진화되어 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차대전시 민족 국가들끼리 서로 죽이던 유럽도 이제는 하나의 공동체로 커나가야만 산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꿔졌습니다.

성직자의 말이나 성경해석에도 잘못이 있는 것

거룩한 성경에도 악마의 말이 있고,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는 특정 민족의 관습이나 배타적인 말이 있고, 잘못된 성경 해석이 있고, 예수님께서 수정하신 말이 있듯이, 성직자의 말에도 악마의 말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배타적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성경해석이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사상에 의해 수정되어야할 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전쟁을 일으키면서 성경(또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들먹이고, “하나님”의 이름(또는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을 들고 살생을 하는 경우, 이렇게 이해한 성경이나 경전은 악마의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가 가장 큰 불의인 것은 경전을 잘못 해석한 악마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잘못 해석하는 “설교,” 또는 잘못 알아듣거나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는 다 악마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것이겠습니다. 진주 아닌 것을 진주로 믿는 경우로, 진주가 돼지에게 던져진 경우보다 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겠습니다. 악마는 성경을 모르는 자가 아니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계 밖에 있는 악마의 말보다 교계 안에 있는 악마의 말을 더 큰 문제로 다루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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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한 2003.11.15 20:03
    성서를 바라보는 눈 (seeing eye)에 대한 목사님의 평가 잘 읽었습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이 Charles Kimball의 [When Religion becomes Evil] (2003)이라는 책입니다. 이 신간을 처음 서점에서 보았을 때, 저의 공부 분야와 비슷하고 흥미있을 것 같아서 샀는데, 읽어 보니 참 좋은 책이군요. 이 책의 저자의 부친은 장로교인이고, 모친은 유대인이고, 본인은 침례교 목사이며 종교학과 교수입니다. 그는 종교가 악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종교 경전을 선택적으로 읽는 (selective reading)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슬람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볼 때, 경전을 선택적으로 읽을 때 오는 결과의 위험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있는 인용구의 하나가 "Guns don't kill people; people kill people."입니다. 악하게 되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시각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를 사는" (live by) 사람들의 태도와 행위 (attitudes and actions)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의 진리 주장 (truth claims)을 고백의 언어(credo)로 받아 들이지 않고,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전가하려는 절대적 진리 주장 (absolute truth caims)으로 바뀔 때, 이미 악해 질 (evil) 싹을 배태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익스피어가 말했다는 유명한 경구 "Even the devil can cite scripture for his purpose," 즉 악마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떻게 종교가 악해질 수 있는지를 잘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라는 것이 진실이다고 해서 반드시 "b"는 틀렸다고 하는 배타주의적 시각이야 말로 종교를 악하게 하고, 기독교를 타락하게 하고 오염시키는 주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b"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도 "a"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열린 기독교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암기하기 하려고 하기 이전에 성서를 제대로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 즉 바른 성서해석학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요청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목회자 이전에 성서가 제시하는 진리를 깨닫는 지성의 오솔길을 선택하는 목회자가 많아져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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