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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 (1)
  -복의 근원될 가능성 상실과 화의 근원-
        창세기 1:3-31, 2:7, 15-18-22, 3:1-6
                      요한복음 1:1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문제

1) 창조이야기에서 만물창조와 인간 창조의 다른 점은?
2) 창조이야기에서 만물창조 후 만물에게 하신 말씀과 인간창조 후 인간에게 하신 말씀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3) 창조이야기에서 인간이 말씀대로 된 일과 안 된 일은?
4) 창조이야기에서 인간창조과정은 완성 되었다고? 미완성이었다고?
5) 창조이야기는 사람이 축복(복의 근원)이 아니고, 저주(화의 근원)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6) 하나님은 화의 근원이 된 인간을 어떻게 하시는 분  이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까? 
7) 신약성경은 인간창조의 완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8) 요한복음서 1장 1절에 “말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뜻은?

만물과 인간창조에 대한 첫 이야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첫 창조이야기에 보면, 만물을 말씀으로 생겨나게 하셨고 말씀으로 그 소임을 다하도록 하셨는데, 다 그대로(창1:3,6,9,11,14,20,22,24)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창조된 과정은 다른 만물의 창조과정과는 다른것(창1:26-27,2:7,15-17)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7)고 했을 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곧 다른 만물은 “무엇 무엇이 생겨라,” “무엇 무엇을 하여라,” “어떻게 되어라”고 명하시는 창조말씀으로 창조하신데 반하여, 사람을 만드실 때는 “사람이 생겨라”고 명하신 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첫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오기는 합니다.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사람이 생겨나도록 명하시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육하고 번식하여 인구가 불어나는 점에서는 말씀대로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모든 생물도 다 하는 것으로 사람이 사람다운 특징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사람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1:28)고만 하시지 않고,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고 특별한 소임을 맡기시는 말씀을 더 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특별한 소임을 맡긴 점에 대해서는 둘째 이야기에서도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 돌보게 하셨다” (창2:15)라고 했습니다.

만물과 인간창조에 대한 둘째 이야기

2장에 나오는 둘째 창조이야기에서는 먼저 남자를 만들고 짐승과 새, 그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남자는“진흙을 빚어”(공동 번역 창2:7, 다른 번역에서는 “흙으로”) 남자를 먼저 만드셨고, 짐승과 새도 흙을 빚어 만든 다음 사람에게 이끌고 와서 그 이름을 정하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창2:19). 다음에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창2:21-22).

창조말씀과 인간 창조과정의 미완성

이 둘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스리는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옮겨집니다. 앞에서 본대로(8. “좋았다”?), 만물이 창조될 때마다 다 “좋았다”고 하셨다는데 반하여, 진흙을 빚어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좋았다”고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3장에 나옵니다. 창1장의 만물창조 이야기에서 맨 처음의 혼돈과 어둠의 첫 단계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질서를 세워 둘째 단계로 옮겨진 것과는 달리 <7. 맨 처음에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인간이 등장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환경까지도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간 것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만물의 창조에서는 “무엇 무엇이 생겨라,”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으로 그 창조과정이 마쳐졌는데, 이 말씀을 창조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창조에 “사람이 생겨라,” “무엇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다음과 같이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 데까지 창조과정이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를 흙으로 만드신 다음(짐승과 새, 그리고 여자도 만들기 이전에)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2:16-17)라는 말씀을 더 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인간을 창조한 창조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이 말씀대로 되었어야 인간창조과정이 완성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고 안 하고는 아직 남겨진 미지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 창조는 말씀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열매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게 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먹고 안 먹고는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만물창조와는 달리 자유의지가 주어진 점이 다른 점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10.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창조말씀(2) -“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창조과정의 완성과 예수님

인간창조의 완성은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예수님에게서 인간창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입장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 한다”(막1:9-11)는 음성이 들려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완성된 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다는 말은 창조이야기에서 만물이 말씀대로 될 때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인간창조 시에 미완성된 인간을 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인데, 이제 예수님에게서 인간창조가 완성된 것이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화의 근원이 된 인간

그런데 인간창조가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는 것만이 아니고, 인간은 끝내 말씀대로 되는 일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에덴동산 “뱀”이야기에서 시작되고,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살인극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 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6)라는 해설까지 나오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말씀대로 되지 못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줄거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죄” 또는 “타락”의 교리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에덴동산이야기는 인간이 복의근원이 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화의 근원이 되어, <이에 대해서는, 그리고 “복의 근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22. “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온 자연계까지도 저주 받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3:17).

복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되찾는 길

창조이야기는 인간이 복의 근원될 가능성을 상실했다고 했는데, 성경이야기의 목적은 상실한 가능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대로 이행해서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고<18.“홍수”이야기-폭력세상의 마감-, 창6:1-8:22>,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으로 가면(말씀대로 하면, 제 길에 들어서면), 아담의 후예로서 화의 근원이었던 그와 그 후손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22.“화의 근원”을 “복의 근원”으로, 창12:1-3>. 물론 신약성경은 잃어버린 가능성을 되찾는 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창조이야기의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어떤 한 구절을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성경 전부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교역자의 설교를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요한복음서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라고 해서 만물창조 시에 하신 창조말씀을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곧 만물이 창조될 때, “무엇 무엇이 생겨라,” “무엇을 하라”고 하신 창조말씀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이런 말씀이 없고,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2:16)는 말씀이 인간에 대한 창조말씀입니다.

이렇게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같으신 이 창조말씀을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희랍어로 “로고스(Logos)”라고 했습니다. 말틴 루터 신부님이 성경을 처음 독일어로 번역할 때, 이 “로그스”라는 단어를 독일어로 “말”(Wort)이라고 한데서, 영어번역에서도 “말”(Word)이라고 하게 되었고, 우리말 번역에서는 “말씀”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그스”라는 단어는 영어로 이론적이라(logical)는 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말의 뜻은 구약성경 잠언 8장에서 말하는 “지혜(wisdom)”라는 말의 뜻과, 희랍(철학)사상의 “이성(reason)”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이 창조되고 운행되는 원리이며 원동력을 뜻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이 요한복음1:1절을 길도자(道)를 써서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고 했던 아주 옛 번역이 이 “로고스”에 더 가까운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못했다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법도(法道)”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고, 안 되고는 마치 하늘의 별이 제 궤도(軌道)를 따르거나 이탈함과 같은 일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의 예를 든다면, 인간을 포함한 전 우주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라면, 말씀이라고 번역된 이 로고스(말씀)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소프트웨어인 셈인데, 인간이 컴퓨터의 프로그램 소프트웨어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만물도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예에서 한 가지 다른 점은 컴퓨터가 작동하는 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말고, 셋째로 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로고스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운행 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창조 마감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

인간창조마감에 하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는 이 “창조말씀”(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해야 창조이야기(에덴동산이야기)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창조마감에 하신 이 말씀을 마치 무엇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음식에 대한 “금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물창조 전에 하신 말씀이 만물이 각각 제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흙을 빚어 만드신 다음에 하신 이 말씀의 뜻도 인간이 제 길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아무리 많아도 서로 충돌함 없이 각각 자기 길인 궤도(軌道)를 따라, 그 궤도에서 벗어남 없이 운행하듯이, 인간도 제 길을 가야하지, 제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하늘의 별들의 궤도가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듯, 사람의 길도 외길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다 먹되, 무엇만은 먹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엇이든 다 하되, 무엇만은 하지 말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고, 이 말씀의 전반 절 “다 먹되(하되)”는 인간의 외길을 “가라”는 말씀이고, 후반절 “말라”는 외길인 제길(궤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여기 “하지 말라”에 대해서는 10.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하나님의 창조말씀의 해석(2)-“뱀”이 인도한 잘못된 성경공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 하는 소임을 맡은 인간은 먼저 흙으로 된 인간 자신을 다스려야만 제 길(궤도)을 갈 수 있었던 것인데, 인간은 이 자기 다스림(말라)에 처음부터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길(궤도)에서 벗어난, 흙으로 된 인간

바울 사도님도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롬7:22-25)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바울 사도님은 두 가지 법이 대립되어 있음을 체험한다고 하셨습니다. 한 편 자기 몸속에 있는 “다른 법,” 자기 몸속에 있어서 자기를 사로잡아 종으로 삼는 “죄의 법,” 육체가 따르는 죄의 법이 있는 것을 체험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 “이성의 법”, 또는 이성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법”(말씀)이 있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이성의 법, 또는 이성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법이 창조이야기에서 말한 “무엇이나 다 먹되(하되), 한 가지만은 절대로 하지(먹지) 말라”고 하신 창조말씀이고, 요한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창조말씀(로고스)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님은 이 이성의 법, 또는 이성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법인 말씀(로고스)을 “진리”라는 말로도 표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 제 길인 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요한복음서 1:1 해석 문제
-교황의 강연에 따른 파문을 예로 들어-

이런 창조이야기가 한갓 옛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인지를 보기 위하여 최근(2006.9.) 독일에서 있었던 교황(Benedict XVI)의 한 강연이 일으킨 파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점만을 말하면, 요한복음서 1장 1절의 로고스 사상을 근거로 해서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종교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곧 비이성적인 행위는 신의 성품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Not to act "with logos", not to act in accordance with reason is contrary to God's nature.) 그리고 결론에서 이런 이성의 입장에서 타종교 및 타문화와의 대화가 되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분의 강연의 대부분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사상에서 실천이성의 가치만을 높이 보고, 희랍사상의 순수이성의 가치를 낮추보게 된 과정과, 서구 신학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희랍사상에서 탈피해야한다고 보게 된 과정을 분석 비판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희랍사상의 로고스로 표현한 신약성경의 입장이 타당함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 신도들의 격심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강연 머리말에서 14세기에 있었던 당시 천주교와 이슬람교 간의 대화에 나온 한 대목으로, “그(이슬람교의 개조 Mohammed)가 신앙을 칼을 써서 전파하라고 한 것은 악이고 비인간적이다”(Show me just what brought that was new, and there you will find things only evil and inhuman, such as his command to spread by the sword the faith he preached)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교황은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점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대화에서 극히 지엽적으로 다뤄졌던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할 따름이라고 밝혔습니다. (It is not my intention to discuss this question in the present lecture; here I would like to discuss only one point - itself rather marginal to the dialogue as a whole - which, in the context of the issue of "faith and reason", I found interesting and which can serve as the starting-point for my reflections on this issue.) 후에 교황은 앞에 인용한 말이 교황의 입장은 아니라고 했고, 또 이슬람교도들이 격분한 데 대해서는 미안스럽다고 했습니다.

이슬람교 측에서는 이슬람교경전에 대한 위 대화자의 이해가, 그리고 교황의 이해가 잘못 됐다는 학술적인 반박도 있었지만, 문제는 일반 이슬람교도들의 입장에서는, 교황이 천주교는 이성적이고 이슬람교는 비이성적(폭력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부 이슬람교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폭력사건을 감행한다는 뉴스가 매일 같이 방영되는 지금으로서는 매우 예민한 반응이 일어나게 마련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의 말을 믿는 천주교인들에게는,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슬람교는 비이성적이고, 폭력행사를 조장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더 굳혀주는 결과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강연에 따른 파문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파문에 대한 시시비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곧 어느 종교가 이성적이고 어느 종교가 비이성적(폭력적)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 창조이야기의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이성)에 대한 해석에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고 보아서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창조이야기에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이성)을 따르는데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종교인은 이성적이고, 어느 종교인은 비이성적(폭력적)이라는 것이 아니고, 흙으로 된 인간은 다 이성의 길인 제 길(궤도)을 가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도 하나님이 로고스라고만 하지 않고 인간이 제 길을 가지 못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1절에 이어서 “그는 태초에 하나님(말씀, 로고스)과 함께 계셨다”(요1:2),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1:14),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 요한복음서는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말씀인 이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바로 이해하시고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람이 가야할 제 길을 가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말씀(로고스, 이성)을, 따르는 일에 실패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님도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3:9-10) 라고 하셨고, 또 앞에서 본대로 “자기 몸속에는 자기를 사로잡아 종으로 삼는 죄의 법, 육체가 따르는 죄의 법이  있고, 또 이성의 법, 또는 이성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법(말씀)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을 체험한다”(롬7:22-25)고 하셨습니다. 죄의 법을 따르는 육을 가진 사람은, 폭력을 이성의 법으로(로그스로) 다스려야 할 사람은, 다른 종교인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자신을 포함한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맨 처음 창조 때만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법도(이성)를 따르는 일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성을 따름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몸으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따르기 어려운 이성의 길을 사랑의 길로 재해석하셔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복음서5:43-25).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이 하나님을 “이성”이라고 말한 데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갈 때, 비로소 “제 길”인 이성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한과 증오에서 나오는 폭력행위를 막는 길로 세상은 두 가지 길을 동시에 택합니다. 1) 더 큰 폭력(무력)을 행사하면서, 2) 신앙은 폭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켜나가는 계몽운동(이 둘째 길은 분명 이성의 길입니다), 이 둘을 병행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문제는 폭력을 행사하는(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판국에서는 이성적인 계몽운동도 힘(세)을 등에 업고 펼치는 선전운동이 되는데 있습니다. 역사적인 이유에서 이미 원한과 증오가 쌓여, 폭력의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보고 죽음을 각오하는 판국에서는, 폭력행위가 힘겨루기 싸움에서, 무력과 여론의 힘에 눌려 현실적으로 억제되더라도, 원한과 증오는 사라지지 않고, 지하수처럼 역사의 깊은 저변에 흐르다가 언젠가 다시 분출하게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신약 성경)은 원한과 증오에 “이성”을 가지고 대하는 길보다는 “사랑”을 가지고 대하는 길을 깨우쳐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그(예수님)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는 말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의 길”을 사람들이 받아드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참 신도들은 예수님의 길을 받아드린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은 보통 자연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요1:12-13)

요한복음서는 원한과 증오에서 나오는 폭력행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더 큰 폭력(무력)을 행사하는 길도 물론 아니고, 그렇다고 참 신앙은 폭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설득시키는 “이성”의 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번 파문 자체가 잘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일한 남은 길은 무력을 행사하는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와 이슬람교의 신학자들이 만나 이성적인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그 가장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기대는 신앙은 폭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하게 되고, 나가서 폭력을 사용하는 일부 이슬람교들로 하여금 설자리가 없도록 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원인에서 쌓여진 원한과 증오를 해결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성경해석의” 문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본대로 창조이야기는 하나님이 로고스(말씀, 이성)이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간은 이성의 길을 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도 첫 절에서는 1절에서 하나님이 로고스라고 했으나, 그다음에 바로 이어서 인간은 이 로고스(이성)의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성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을 사람이 가야할 제 길로 재해석하시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 강연은 요한복음서 1장 1절 만에 근거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보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창조이야기 1-2장만을 보고(3장은 보지 않고), 요한복음서의 1장 1절만 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보지 못한 해석으로, 머리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일종의“도중하차”식, “반쪽” 해석, 또는 “우물 안 개구리”식 해석과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이론은 강자의 입장과 나아가서는 강자의 이익(욕심)을 위한 시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이성”이 악을 합리화 하는데 쓰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약자의 입장도 위할 수 있는 길은 사랑의 길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성경)은 이 사랑의 길을 인간이 가야할 제 길이라고 하는 것이겠습니다.

역사적인 현실체험에서 사람은 이성의 다스림을 받기 전에 원한과 증오라는 감성에 사로잡히게 마련인데, 이는 지금 어떤 특정 종교인(이슬람교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이 그러했다는 것이 에덴동산 이야기와 요한복음서가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위 강연은 천주교회가 이 이성의 길을 수락해야 하고, 이런 기본 입장에서 다른 종교와 문화를 대해야 한다는 뜻의 말을 한 것이었는데, 그 강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성)에 대한 첫 부분만이 언급되고, 그의 백성이 거절했다는 다음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천주교인만 이 이성의 길을 가고, 이슬람교도들은 이성의 길이 아닌 폭력의 길을 간다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 중 일부는 원한과 증오에 몸을 던지고,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만큼 과격해진 판국에서 생긴 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 교황의 심중에는, (물론 이번 강연에 이런데 까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이슬람교도들의 폭력만을 문제로 보지 않고, 강자의 무력(폭력)행사도 인정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로 보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천주교와 이슬람교 대표 신학자들이 대화를 통해서, 이성을 가지고 자기주장의 이론을 펴지 않고, 비록 자기 교단의 교세가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 신도들의 아픔을 감싸주려는 사랑의 마음이 열려진다면, 역사적인 현실에서 누적된 원한과 증오를 치유하는 결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두 종교나 문화 간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만일, 일부 이슬람교도 테러리스트들이 월드 트레이드 쎈터를 불태워 3000 명에 가까운 생명을 죽인 비극을 계기로, 미국행정부가 그 “원수”를 무력으로 싹 쓸어버리려고 할 때, 전 세계 천주교신도들이, 특히 미국의 천주교 신도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원수도 사랑하려는 순수한 사랑의 길을 감으로, 반 폭력, 반전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물론 반대로 우리가 이슬람교도들이라면, 간디옹이나 말틴 루터 킹 목사, 또는 만델라 대통령과 같이 빈 라덴도 폭력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도 해볼 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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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eniaraw 2010.06.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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