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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
창 1:3-4상(10, 12, 18, 21, 25, 31)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세상에 좋다고 할 일과 좋지 않다고 할 일 어느 편이 많을까?
2) 자연현상이나 자연적인 것은 다 좋다고 할 수 있을까?
3) 창조 후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그 본래의 자연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4) 인간창조 후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을까?
5) 모든 것이 창조될 때마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 어떤 경우들이었을까?
6)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    을 긍정적으로 보고 낙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일까?
7)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을 예찬하는 말씀일까?

“좋았다”?

만물이 창조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셨다는 말이 모두 일곱 번 반복됩니다. 빛이 생겼을 때(창1:3-4), 하늘과 뭍과 바다가 생겼을 때(창1:6-10), 땅위에 식물이 생겼을 때(창1:11-12), 낯과 밤, 계절, 날과 해를 구분 하는 별과 해와 달이 생겼을 때(창1:14-18), 바다에 모든 생물들과 하늘에 모든 새들이 생겼을 때(창1:20-21), 땅에 모든 짐승과 곤충이 생겼을 때(창1:24-25), 그리고 사람을 만들어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셨고, 모든 식물이 사람과 동물의 먹을거리가 되게 하셨을 때(창1:28-31)였습니다.

이 일곱이라는 횟수는 완전수이기도 해서, 창조 후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으로 보기 쉽습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곧 사람을 포함해서 자연계의 모든 것은 다 좋다,” “자연적인 것, 천진난만한 것은 다 아름답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즉흥적인 모든 행동도, 예를 들어 남녀관계도, 자연적인 것이면 다 좋다,” “하나님이 좋다고 보신 것을 우리가 좋지 않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 성경구절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는 성경이야기의 뜻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자연적인”것은  다 “좋다”고?

우선 자연적인 것은 다 좋다는데 대하여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자연에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 장난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아이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기어이 그것을 빼앗으려는 것을 봅니다. 또는 아기를 봐주는 어른 무릎에 자기만 앉으려 들고 다른 애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해서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밴쿠버 관광지 하나가 스탠리 공원인데, 퍼스펙티브 포인트라는 지점에 이르면, 서쪽으로 태평양에 닿는 넓은 바다가 펼쳐지는데, 거기 깊은 벼랑이 있고 쇄줄 울타리가 쳐있습니다. 거기에 라쿤(북미주의 너구리)이라는 동물 10여 마리가 한 가족인양 모여 사는데,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모여 듭니다. 귀엽고 재미있는 그 모습이 볼만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가끔 그 중 어떤 놈이 다른 작은 것들이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하면 으르렁대면서 저지합니다. 자기만 먹고 남 못 먹게 욕심을 부리고 힘을 행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니 좋다고만 할 수 있겠는지?

동물계를 알려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런 장면을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한 암사자가 한 수사자 사이에서 난 새끼들을 거느리고 사는데, 다른 수사자가 나타나 그 암사자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자기 새끼를 번식시키려는 본능입니다. 암사자는 이미 새끼가 있기 때문에 거절합니다. 어미로서 새끼들을 돌보는 본능 이외의 다른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답니다. 그 수사자는 그 새끼들을 다 물어뜯어 죽입니다. 이때 그 암 사자가 그 수사자에게 접근해서 다시 새끼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수사자가 자기 본능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이렇게 다른 수사자의 새끼들을 다 죽이는 것이랍니다. 한 수사자의 목적 달성에 희생당해 새끼들이 물어뜯기는 현상을,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모성애를 잃게 되면서, 그 수사자에 응하게 되는 현상과 비슷한 일이 인간계에 일어나는 경우, 이도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동물이나 곤충의 생김새 자체가 잡아먹기는 하되 먹히지는 않으려는 목적에 맞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먹히는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 “약육강식”하고 “적자생존”하는 잔인함도 자연현상이라고 해서 인간계에 그대로 적용되어도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저주받아 변질된 자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다,” “자연적인 것은 아름답다”는 등의 입장은 아마 저주받기 이전의 자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다. 그러나 저주받기 이전의 자연현상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체험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창세기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원수관계로 변질 되었다는 것을 “뱀”이라는 생물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3:15)라고 했고, 여인에게는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창3:16)라고 해서 임신과 해산이라는 과정도 자연적인 것이지만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 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17-19,24)라고 해서, 흙으로 된 인간의 몸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저주받은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연적인 것 안에 죽음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체험하는 자연현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셨던 그 본래의 자연이 아닌 것입니다.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이미 저주 받아 변질된 자연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말하는 본래의 자연 현상을 체험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체험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는데, 이들도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지금 우리를 포함해서)은 본래의 자연 현상이 아니고 변질된 것만을 체험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도 거기서 쫓겨난 다음에 쓰인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창세기 1장이 말한 본연의 자연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2장의 에덴동산 이야기도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곧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을 체험 할 때에 쓰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전우주의 신비스런 짜임새를 비롯하여 온 생태계의 조화와 존속을 유지해 나가는 자연현상은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계에 관여할 때는, 자연환경도 오염되고 생태계의 조화도 파괴되는 등, “좋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앞에서 예를 든 경우들과 같이,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연적인 충동대로 살 때, 좋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반복되는 이 성경이야기의 목적은 우리가 보는 자연계가 다 아름답다는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워야 하고,“좋다”고 할 수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아름답지 못하고 “좋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더 나가서 이런 상태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입니다.

사람 문제

사람은 보다 좋은 것을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바람은 남을 해치는 욕망이 되기 쉽고, 사람도 동물처럼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 쉬운 것이고, 따라서 약자는 억울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 자체도 자연현상이니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바람은 자기에게만 좋고 남에게는 “궂은 것,” “잘못된 것,” “해로운 것”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바람이 다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못됩니다.

그래서 창조이야기는 자연계보다 이런 사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사람은 자연계의 동식물과는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도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창2:16-17)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바로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것도 다스려져야만 할 것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이야기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창조에도 “좋았다”고?

첫날 빛이 생기게 하신 데서부터 닷샛날 동물이 생겨나게 하신 데까지는 그때마다 그 창조된 것을 “보시기에 좋았다”(창1:4,10,12,18,21,25,31)라고 하셨다고 쓰여 있는데,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는 그 사람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지는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창조에 대한 대목에서는 다른 것 창조 때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1) 이미 창조된 생물을 다스리게 하는 것(창1:26)이라고, 그 목적을 밝히셨고,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신 다음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는 말씀에서도, 

2)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과 함께 다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고 하셨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3)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창1:29).

4)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고 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창1:30)고 했고, 이때,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1:31)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들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보시고 “좋았다”라고 한데 반하여, 사람을 창조한 다음에는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려야할 소임이 맡겨진 것과, 생육 번성할 그 사람과 다른 생물에게 먹을거리가 마련된 것을 보셨을 때,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만드신 모든 것”이라는 말에는 창조과정이 인간과 생물에게 먹을 것이 마련되도록 마쳐진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라는 말에 사람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들을 보면 사람은 여기서 제외된 것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다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엇은 하고, 무엇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사람이 지키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추가되면서(창2:15-17), “사람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3:17)라고 했을 뿐 아니라 더 나가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6:6)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이 성경 이야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할 수 없는 점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좋다”고 할 일과 “좋지 않다”고 할 일 어느 편이 더 많을까요? 지난 며칠 동안 세상 뉴스에서 “참 좋다”고 할 수 있는 일과 “좋지 않다”고 보이는 일들 어느 편이 더 많았는지 회상해 보십시오. 또 “참 좋다”고 할 일 중에도 한 편에서는 좋아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같이 보도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의, 또는 이락 저항군과 미군간의 살인극에서 이 편 사람이 죽으면 저편에서 좋아하고, 저편 사람이 죽으면 이편에서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도 “참 좋다”고 하실까요? 인류역사에서도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좋아할 때, 침략 당한 백성들도 “좋다”고 했을까요? 더욱이 하나님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교권 층에서 “좋다”고 기뻐했을 때, 하나님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는 성경 말씀의 뜻은 이런 경우와는 다른 것임이 틀림없을 텐데, 과연 어떤 경우에 하시는 말씀일까요?

앞에서 본 대로 <7. 맨 처음에 혼돈, 공허, 어두움이> 하나님께서 “좋았다”고 하신 것은 창조가 시작될 때 이미 있었던 혼돈에서 없던 질서를, 이미 있던 어두움에서 없던 빛을 창조하시는 등, 생명을 키우고 보존함에 보다나은 상태로 된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한 편이 “좋다”고 할 일이 반드시 다른 편에서도“좋다”고 할 일이 못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았는데, 사람들 모두가 “좋다”고 하고 하나님도 “좋다”고 하실 일들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든다면 비폭력시민운동의 성공, 남아프리카의 민족평등운동의 성공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당시 지배층에게는 싫은 일이었겠지만 보다 많은 약자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드디어는 불의한 소수까지를 포함한 전체의 복지에 이바지한 인간 사회의 발전과 향상은 “참으로 좋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잘못된 데서 모두에게 바른 것이, 해로운 데서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좋지 못한 데서 모두에게 좋은 것이 창조되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또는 과학 기술을 비롯해서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힘이 전체의 유익과 복지에 동원되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다는 뜻이겠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말은 “강자”나 “약자” 어느 “한편”만이 아니고 “모두가 보기에” 좋았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의인을 죽이는 세상에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은 분이 계셨던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일 자체는 “좋았다”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이 의인을 죽이지 않은 세상으로 재창조되어야 “좋다”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긍정적으로 봐야한다”는 뜻?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이 성경 이야기의 목적은 모든 것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정도의 흔한 말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을 “좋지 않게”볼 것이 아니고 “좋게 보아야 한다”는 정도의 말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것을 “좋게” 보라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당시 모든 것을 “좋게만” 보셨을까요? “잘못되었다”고 보셨을까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을 대충이라도 살펴보십시다.

마태복음서의 기록을 보십시다. 첫 이야기가 헤롯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부모님이 아기를 데리고 피난을 갔어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종교의 핵심 인물들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것을 보시고 요한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님이 한 여인의 앙심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목 베임을 당하고 그 머리가 연회석상의 쟁반위에 놓였다는 이야기입니다(마2장). 하나님이 이런 일들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마가복음도 요한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첫 이야기는 예수님이 귀신들인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막1장). 많은 사람이 병든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좋다”고 하셨을까요?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고 보셨을까요?

요한복음서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라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첫 말이었습니다. 의인이 희생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불의한 세상을 “좋게” 보셨을까요? 요한복음서에 예수님이 처음 보신 일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었습니다(요2장). 있어야 할 것이 떨어지는 것을 “좋게” 보셨을까요? 다음으로 보신 일은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좋게” 보셨으면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 상을 뒤엎으시고 ... ‘이것들을 거둬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라’”(요2:13-19)고 하셨을까요?

복음서들은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사형 당하신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좋게” 보셨을까요? 하나님과 요한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신 것일까요?

창조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있던 혼돈이나 어두움을 좋게 보신 것일까요? 잘못되었다고 보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좋다고 하셨다는 말은 좋지 않은 것, 잘못된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좋지 못한 것을 좋은 것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된 것으로 창조하신 다음에 그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들도 이 세상의 좋지 못한 것을 좋은 것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된 것으로 만든 다음에 좋게 보아야 하지, 그 이전에 좋게 보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낙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이런 뜻에서 사용해야 성경이야기의 목적과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바로 되게 만들려는 정열과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비로소 사물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의 뜻?

예수님께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마6:26,28)고 하신 것도 그저 단순히 자연계는 다 좋고 아름답다고 자연을 예찬하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려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제자들이 동참하려고 했을 때, 저들이 의식주에 대한 위협은 물론 생명에 대한 위험까지 있어서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런 세상 자체를 “좋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을 보시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백합화는 백합화답게, 새는 새답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과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것 중에도 다스려야 할 것이 있고,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확신을 말씀 만으로가 아니고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보라”는 말씀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라”는 뜻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래도 미담이 있는 것은, 세상에는 “참 좋다”고 할 만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기독신도의 바람직한 삶은 “잘못된 것”도“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자세가 아니고, 혼돈과 어두움에서 “좋다”고 할 만한 미래를 창조하는 삶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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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태일 2003.08.20 04:00
    목사님, 제가 길벗 사이트 주소를 잘못 알려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소를 정정하겠습니다. http://cafe.daum.net/gilb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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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한 2003.08.20 17:23
    목사님의 이번 메시지 감사합니다. 혼돈과 어두음의 세계는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바로 혼돈과 어두움의 세계가 아닐까요? 저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만 질서의 세계이고 자기 세계를 벗어난 모든 세계를 혼돈과 어두움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더 문제가 아닐까요? 백화화 같은, 공중의 새같은 예수님을 혼돈의 괴수로 보고 십자가 처형을 행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도 상존하는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남아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에 종교적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한 것이 바로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카이퍼가 이러한 아파테이트를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네덜란드의 아프리카 이민자들 (Afrikaaner)은 선조의 소중한 신학적 자산을 흑인형제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참 이상적이었습니다. 흑인 백인이 함께 살면 인종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갈등과 폭력이 일어날 수 있으니 아예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서로 맞는 사람끼리 오손도손 잘 살자는 멋진 자기 변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혼돈이 없고, 질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런 질서의 세계를 하나님은 혼돈의 세계로 보시며, 인권유린이 횡횡하는 어둠의 세계로 보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과 정의가 포옹하는 순간은 왔고 그러한 순간이 바로 인간이 허상으로 만든 아파테이트의 담을 허무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빌라도가 옳지 않았듯, 카이퍼의 후예들도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 Jim Hillson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언제 오시느냐고 물으시더군요. 크리스마스 즈음에 한 번 더 오실 것이라고 조 집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Leader로서의 이 목사님에 대한 힐슨 목사님의 회상을 즐겁게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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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범식 2003.08.22 00:12
    저의 글을 계속하겠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또는 더 이전으로 올라가서 지동설과 천동설 같은 알력은 교회가 성서를 잘못 해석했거나 과학자의 주장을 이해 못한데서 비저진것 같습니다. 진화론이나 지동설이나 "God is the creator"에 도전한것은 아닙니다. 그리 잘 알려져 있지않지만 현재 몇 몇 최상급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수학자들이 우주의 creation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는 그들의 이론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지만 결과만 흘터보겠습니다. 우선 이문제는 1917년 Einstein에 의해 제기 됐습니다. 1960년경 까지 Newton은 우주는 무한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Einstein은 자기의 일반상대성원리에 의하면 우주는 유한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서 또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실험을 통하지 않고 순전히 그의 방정식에서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곧 이여 Hubble이 그 당시 최대의 망원경을 써서 그석이 사실이라는 발견을 합니다. 과학은 그 다음 단계가 중요하고 재미있습니다. 당연히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언제부터 팽창하기 시작했느냐?" (다시 말해서 우주창조는 언제 사작했느냐?)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 우주는 지극히 밀도가 높았고 아주 적고 뜨거웠을 것이다. 어쩌다가 급속한 팽창이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Big bang theory" 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시야가 넓어지며 동시에 먼 과거를 돌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를 추산할 수 있게됐습니다. 현재 추산으로는 우주는 약 120-140억년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다 더 많은 질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예를들면 이 유한하다는 우주의 기하학적 형태는 어떤 것인지? (옛날에는 세상은 평면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구켠이라고 증면되듯이.) 여기서 우리는 (특히 종교가들은) 이 과학자들이 왜 이런 문제를 추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Einsein은 온 정성을 다 기우려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태교인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을 믿는 "sincere believer" 였고 그에게 과학이란 하느님의 창조를 알아내는 과정 (the process of discovering God's creation) 이였습니다. "I wnat to know God's thought" 는 그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위에 말한 다른 과학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creation 의 puzzle을 풀기위해 최전선에 나가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주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심오한 철학적인 질문의 답을 찾고 있습니다. 1997년에 Hawking 은 20년 후에는 우주의 기본원칙 (the ground rules of the universe)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느 과학자는 "그가 20년 전에 똑 같은 말을 했다"고 했답니다.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안겠지요. 그러나 God's equation의 근사치를 추구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과제가 되겠지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영원히 완전한 답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지금은 구약성경 때보다는 아는 것이 많겠지만 얼마 안가서 그것도 별별일 없는 지식 밖에 안될터이니 말입니다. (예를들면 1917년 Einstein이 문제를 제기할 때만해도 Milky Way 이외에도 galaxy 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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