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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왜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을까?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 (2)- 
    창 4:9-15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의 대답은?  바른 대답은 무엇이었어야 했을까?
2. 살인 후 가인은 어떻게 되었어야 마땅할까?
3.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는 가인의 말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는데, 왜 그랬을까?
4. 창세기에 의하면 이때 “다른 사람”은 아직 없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라는 말의 뜻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5. 아벨은 가인이 어떻게 되기를 바랐을까?
6. 가인은 자신이 어떻게 되기를 바랐을까?
7. 부모는 가인이 어떻게 되기를 바랐을까? 하나님은?

가인의 자리
-“땅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의 여섯째 대목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끝 대목인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네가 네 아우를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제가 쳐 죽였습니다”는 말밖에는 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밑에 숨었을 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질문과 다를 바 없는 내용입니다. 곧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가인을 향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인 셈입니다.

아우를 사랑할 때의 가인과, 아우를 미워할 때의 그가, 그리고 아우를 쳐 죽인 그가, 같은 사람이지만 사람으로서의 자리가, 그의 사람됨의 자리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자리(사람됨)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입니다. 곧 “형제를 지키는”사람들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를 돌로 쳐 죽여 이 세상에서 아우의 자리를 없앤 그 순간에 자신의 자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4:9) 하는 반문으로 자신을 숨기려고 한 것은 그의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자리가 없어진 것을 자인하는 말인 셈입니다.

이렇게 자리 없는 사람이 된 것이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창4:10-12)라고 하셨습니다. 화난 마음의 계획을 다스리지 못한 행동에 따른 저주였습니다.

살인자를 어떻게?

이 성경 이야기는 가인을 저주하는 대목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살인자는 어떻게 되느냐?
-살인자를 살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가인 자신이 말을 합니다.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4:13-14)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는 저주?

창세기 이야기 순서에 따르면 이때 부모와 가인과 아벨 형제밖에는 다른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창세기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하나로 엮어진 것이 아니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인데, 이 편집과정에서 마치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이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지 않고, 이 이야기 그 대로 이 말의  뜻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형벌을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아우를 쳐 죽인 가인 스스로가 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양심의 갈등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 말고 가인이 만나는 다른 사람은 아우 아벨이었습니다. 이 다른 사람인 아우를 그는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살지 못하고, 미움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왔었는데, 이 다른 사람인 아우에 대하여, 하나님이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라고 하신대로, 가인을 만나는 다른 사람의 한 맺힌 피는 살인자에 대한 원수 갚음을 부르짖는 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 아우는 형을 죽이려는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미움의 대상으로 삼은 그도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미움의 대상으로 삼아 나를 죽이려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죽은 아우의 얼굴이 가는 곳마다 나타나 그를 괴롭힐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마음의 고통이 지옥 불에 던져진 고통입니다. 

그리고 또 아우 말고 다른 사람으로는 그의 부모가 있었습니다. 이 다른 사람인 부모도 자기를 죽어 마땅한 놈으로 생각할까 두려워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실 것으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살인자 가인을 어떻게?

그런데 이렇게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생각한 살인자 가인의 두려움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창4:15)고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 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창4:15)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목인데, 이 질문에 대하여, 곧 살인자에 대한 입장으로 약자의 입장, 강자의 입장, 엄마의 입장 세 가지가 있겠습니다.

약자의 입장

1) 첫째는 울부짖는 희생자이며 약자인 아벨의 입장입니다. 동생을 죽인 형에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4:10)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입장이 잘 드러났습니다. 맺힌 한을 풀어 달라는 울부짖음은, “살인자는 죽어야 한다. 정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하고, 복수를 바라는 입장입니다. 희생자의 편에 선 세인들의 입장도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일까 하는 문제를 이 이야기는 묻고 있는 것인데,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자의 입장

2) 둘째는 가해자 가인, 강자의 입장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인 후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되자,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4:13-14)는 말은, 아우를 죽였으니 “자기도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남을 죽였으나,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강자의 입장은 “강자는 살인해도 좋다,”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이다”는 자연계와 다를 바가 없는 입장입니다.

약자가 복수를 바라는 것에 반하여, 그에 못지않게 강자도 자기 생존을 위해 더 강력한 폭력행사인 강자의 복수가 따르게 됩니다. 강자는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끌어들이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약자를 죽여도 좋다는 강자의 입장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처럼 주장하고 행동하는 실례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는 가인의 말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 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창4:15)라는 이 말씀을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 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몇 갑절로 원수 갚으라는 뜻으로 인용했던 실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가인의 6 대 손 라멕이 있었는데,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라고 자랑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입장으로 분명한 것은,
(1) 첫째,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비록 아벨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홧김에 품은 계획대로 죽인 것은 잘못이다. 곧 강자가 약자를 죽인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2) 둘째 약자를 죽인 강자를 죽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자에 대한 복수를 바라는 약자의 입장도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자는 약자를 죽여도 좋다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강자의 후손이 계속해서 약자를 몇 갑절로 죽였다는 성경이야기가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3의 입장, 하나님의  입장은 과연 무엇일까?

이 형제살인 이야기는 여인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창4:2)는 말로, 곧 여인이 엄마 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엄마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입장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엄마의 입장 -엄마 됨의 아픔-

(3) 셋째로는 엄마의 아픔이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 바깥세상에서 여인에게는 임신하는 고통과 해산의 진통이 크게 더해지고,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게 될 것이다”(창3:16)라고 엄마 됨에 따를 아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엄마 됨의 아픔은 임신과 해산 때 만의 아픔이 아니고, 자식을 낳은 후 엄마 일생의 아픔인 것입니다. 고통과 진통을 겪고 낳은 자식인 형이, 고통과 진통을 겪고 낳은 자식인 아우를 죽인 사건에서 체험하는 아픔이 엄마 됨의 아픔인 것입니다.

이런 아픔 속에서 엄마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동생이 죽었다고 그를 죽인 형도 죽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동생의 한을 푸는 복수, 정의실현을 엄마가 바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살아남기를 바랄 것 아닐까요?
살아남은 그 형이 앞으로 어떻게 되기를 바랄까요?
살인하는 같은 일을 반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살인자 가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엄마 됨의 아픔을 견디어야 하는 이 엄마의 입장과 같은 것이겠습니다.

기독신도들도 가인이었음

끝으로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리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었다는 이 구약 이야기의 본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신약성경 이야기 하나를 대조시켜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마지막 장면에서 누가 아벨이었고, 누가 가인이었겠습니까?

성문 밖 골고다에 끌려 나가 죄 없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님이 아벨이었습니다. 불의한 사회에서 지금도 의인들이 흘린 피가 하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는 아직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가인이었습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서 죄인 하나를 사면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바라바라는 죄인과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시켜 주기를 바라느냐는 당국자의 질문에,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바라바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쳤던 군중들이 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사형 권한을 허락한 로마 당국자들이 또한 가인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계에서나 국가사회에서 불의와 편해서 의인들이 고독하게 죽어 가는 것을 외면하는 세인들이 매일같이 가인의 역을 재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인들을 위해서 저들이 모르고 하는 짓이니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시며 가신 다음, 잘못을 깨닫고 참회해서 종전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행동한 사람들을 기독신도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을, 가인 역을 맡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 죽여 버리셨다면 참 기독신도가 한 사람도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다시 살인하라는 것이 아니고, 죄인 그가 새사람이 될 제2의 기회를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유다가 만일 자살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았었다면, 예수님이 “모르고 하는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그 용서의 대상에 포함되었을까요? 제외되었을까요?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용서를 받고 회개하고 참 제자로 다시 출발하는 제2의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형법은 죄인을 죽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엄마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고 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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