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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에 기백이 살아 있는 이는 청년이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언제나 청년으로 기억될 사람이다. 삶은 곤궁했지만 남루하지 않았고, 육신은 부러졌으나 정신은 불꽃 같았다.

김창숙은 구한말 유학자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나 그다지 열심히 한 것은 아니다. 열여덟 살에 부친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학문을 했다. 그러나 국운은 기울고 유학은 시대의 이념이 되지 못한다. 김창숙이 본 당시의 현실은 이렇다.

"학자들은 성리학의 깊은 뜻을 말할 뿐이었다. 나라가 기울어도 구제하는 일에 시급히 뛰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 깊이 병들어 있음을 느꼈다. 성인의 글을 읽고서도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 뜻을 깨우치지 못하니 이것이 거짓 선비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짓 선비들을 없애는 일이야 말로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창숙은 이완용 등 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미 망해가는 나라에 공허한 외침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때부터 김창숙은 미치광이처럼 살았다. 매일 술을 마시고 통곡했다. 의관을 찢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삼년을 지냈다. 보다못한 어머니가 김창숙을 불러세웠다.

"너는 아직 젊다. 지금 학문으로 실력을 쌓아야 광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고 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지금 네가 할일이 아니겠느냐."

김창숙은 비로소 잃었던 정신을 되찾고 책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책을 읽다가 의심이 들면 눈을 감고 깊이 생각했다. 마음 깊이 깨달음이 생기면 다시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어갔다. 학문을 하는 것이 뜻을 정성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됐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방도도 학문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미년의 독립선언은 책 속에 묻혀 있던 김창숙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냈다. 유림의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려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를 때 홀로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고는 대성통곡했다. 사람들이 온통 나를 보고 욕하는 것 같았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독립선언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니 썩고 낡은 무리들이라고 매도하는 것만 같았다.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김창숙은 독립을 원하는 유림의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국의 유생들이 연서해서 당시 파리에서 열린 국제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소위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500명이 넘는 유생들이 체포되고 김창숙은 망명생활을 시작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국내의 독립 열망은 잠시 시들해지는 듯했다. 1925년 봄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던 김창숙은 이같은 실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시 한 번 민족혼을 깨울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백범 김구에게 요청했다.

"지금은 비상수단이 필요한 때다. 민족정신을 깨우지 못하면 우리들은 장차 돌아갈 곳을 잃고 말 것이다. 일제의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박멸해서 잠잠해진 민족혼을 일깨우는 것이 급한 일이다. 지금은 겨레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일부터 해야 한다."

거사를 위해 김구가 소개한 사람은 의열단원인 나석주. 김창숙에게 나석주는 자신의 뜻을 흔쾌히 밝혔다.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지 오래입니다. 감히 즐겨 하지 않겠습니까."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고 신채호가 보관하던 폭탄을 얻었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일제의 경제수탈 기관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창숙은 상해에서 체포돼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된다. 이때 혹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창숙은 일제에 의한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변호사들의 변론 요청도 거부했다.

"나는 포로다. 포로이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함은 치욕이다. 실로 내 지조를 바꾸어 변론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가혹한 옥살이에도 한 번도 일제의 형리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일은 널리 알려졌다. 그 기상이 하도 꼿꼿해 굴복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감옥에서 조선과 일본의 근원이 같다는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주고 반성문을 강요했다. 김창숙은 책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외쳤다.

"나는 반역자의 미친 소리를 읽고 싶지 않다. 독립선언서가 이 자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자가 도리어 역적이 되었으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변절하던 때였지만 김창숙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만해 한용운은 '나는 김창숙의 마음을 알고 있다. 김창숙의 얼굴은 몰라도 좋다'는 편지를 보냈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은 유림의 힘을 모아 성균관대학을 세운다. 구한말에 이미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원에 '성명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웠던 경험이 있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전통의 힘이 건국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성균관의 자리에 대학을 세우게 된다.

학문의 자리에 돌아와서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선비의 기백은 시들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과 독재의 책임을 들어 '하야하라'는 경고문을 보낸다.

"보안법은 이 민족을 억압하는 망국의 법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경찰국이 되고 만다. 이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하고 하야하라."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김창숙의 눈에는 이승만이 민족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급급한 소인배로 보일 뿐이었다. 대통령의 면전에서 "남들이 피를 흘릴 때 편히 놀다왔으면서 무슨 대통령의 자격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정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의 대가로 결국 1957년 성균관대학의 총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길에서 죽는다 한들 무엇이 한스러우랴(死道路兮亦何恨)'는 자신의 시처럼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다.

김천[자유기고가] man@m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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