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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가 포스트모던인가  
-진중권



울리히 비커트라는 유명한 앵커가 있다. 이번에 독일에 와서 텔레비전을 보니 ZDF 뉴스 프로그램에서 이 낯익은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듣자 하니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이 문제가 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 기고문에서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나 근본주의자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고 한 어느 여성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이제 부시 무서워 입조심 하며 살아야 할 판이니, 새 천년에 우리는 부시 교황 밑에서 다시 중세를 살아야 할 모양이다.

그 인디아 여성작가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사실 "악의 축" 어쩌구 하는 수사학은 마땅히 중세에 속해야 한다. 세상을 선과 악의 결전으로 바라보는 발상은 오늘날엔 몇몇 종교적 광신도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나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릴 뿐, 중세적 광신성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십자군 전쟁이든, 모슬렘의 성전이든, 성스러운 전쟁 좋아하는 취향도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물론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을 상대로 벌이는 그의 전쟁이 부시 개인의 심오한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리라. 아프가니스탄에는 파이프 라인이 지나가고 있고, 이라크는 글자 그대로 돌 기름 위에 떠 있는 게 저 성스러운 전쟁의 진자 이유일 게다. 하지만 어차피 중세의 십자군들도 몇몇 신실한 바보들만 배고 다들 예루살렘이 성지라는 사실보다는 성지로 가는 길목에 널린 재화에 더 관심이 많을 터이니, 이 유물론도 부시의 전쟁에서 중세적 성격을 벗겨내지는 못한다.

어차피 전쟁이란 너절한 유물론적 동기를 자유니, 평화니, 민주니 어쩌구 하는 관념론적 수사로 은폐하기 마련이니, 그것을 새삼 탓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수사학의 한심한 수준, 즉 그 전쟁을 위해 부시가 내건 명분의 유치함만은 지적하고 싶다. 사실 "악의 축"에 맞서 싸운다는 수사학. 그 어법은 초록빛 지구를 수호하는 독수리 5형제의 주제가를 연상케 하지 않는가? 캐나다 총리의 비서가 그를 가르켜 "저능아"라 부른 건 아마 이 때문일 게다. 솔직히 부시의 어법에서 드러나는 그의 교양의 수준은 많이 모자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만약 부시라는 인물이 그저 평범한 사인이라면, 3류 웨스턴 영화를 연상시키는 그의 치기어린 어법과 제스처는 그저 모지리의 재롱 정도로 웃어넘겨도 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앉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살인기계를 세계 어느 곳에라도 보낼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북한의 해안에서 서핑을 하고, 한국의 논밭을 열대의 물소가 유유히 거닐며, 어느 동대의 마크가 달린 예비군복이 등장하는 007 영화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이 치기를, 우리가 한껏 비웃지 못하고 외려 침울해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의 국민들은 어쩌다 이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 전 세계를 피곤하게 하냐고 푸념을 하다가도, 그의 연설을 듣고 기립박수를 치는 한 무더기의 한심한 미국인을 보면 '한 나라의 국민은 딱 자기들 교양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갖는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세계를 정복하겠다 어느 과대망상증 환자에게 "하일!"을 외치던 사람들이나, "악의 축"을 섬멸하는 전쟁을 벌이겠다는 어느 "저능아"에게 기립박수를 쳐대는 사람들이나 대체 뭐가 다른 건지...

파시즘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적 합리성과 한심할 정도로 미성숙한 비판적 이성 사이의 괴리를 특징으로 한다. 나치가 끔찍했던 것은 중세적 판타지로 가득찬 원시적인 민족신화에 최첨단 과학기술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정권이 끔찍한 이유 역사 다르지 않다. 첨단 살인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이 기껏 "십자군"이니 "악의 축"이니 하는 중세적 정치신학과 결합되어 표현될 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기서 어떤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역설일까? 전쟁광 나치를 물리친 미국의 전쟁광기에 하필 독일에서 제동을 걸고, "악의 축"에 맞선 재판 십자군 전쟁에 외려 바티칸에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독일과 교황청은 어두운 역사를 반성했다지만, 저 재판 봉건제의 세속교황은 언제나 그 미련한 정치신학의 망상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릴까? 미쳐버린 미국이 정신을 차리려면 독일이나 교황청처럼 한번 홀딱 망해 봐야 하는데, 이 세상에 이 세속적 교황청을 망하게 할 자 없다는 게 포스트모던한 이 시대의 피곤함이다.




[출처 : 깨손 미학방]


http://bbs.hani.co.kr/Board/ns_study/Contents.asp?STable=ns_study&RNo=7656&Search=&Text=&GoToPage=10&Idx=31226&Sortin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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