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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은 6·25 전쟁 산속은 그림과의 전쟁

한겨레] 2006년 07월 13일(목) 오후 08:45 가 가| 이메일| 프린트

한겨레] 소설가 유채림(46)씨는 1996년 겨울 아는 이의 전시회에 갔다가 뜻밖의 ‘귀인’을 만난다. 해병 장교 출신이라는 이 늙수그레한 신사는 6·25 전쟁 당시 금강산에 숨어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 한묵(1914~)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에 불꽃이 튀었다. 장편소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새움)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원로 화가 한묵씨를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기하학적 추상회화’로 분류되는 그의 작품은 동양적 무한성을 표현했다고 해서 현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강원도 고성 태생인 한씨는 홍익대 교수로 있던 1961년 프랑스 파리로 떠났으며 한동안 무명 시절을 거친 뒤 1970년대 말께부터 파리 화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것이 전쟁 중에 금강산에 숨어서 그림을 그리다가 북진하던 국군 장교에게 발각되어 월남했다는 부분이다. 유채림씨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가 바로 그 장교였음은 물론이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는 한묵씨의 전기적 사실 중 금강산 부분을 축으로 삼고 거기에 소설적 허구를 대폭 가미해서 완성한 ‘소설’이다. 한묵씨를 모델로 한 주인공은 소설에서 ‘한’으로만 표기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한이 금강산에 머문 기간은 1948년 가을부터 1950년 가을까지 만 2년 동안이다. 동경 유학을 다녀온 뒤 삼팔선 이북인 고향 고성에서 미술 교사로 있던 한은 새롭게 들어선 사회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사실주의 미술을 거부한 것 때문에 체포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내무서원이 그를 몰래 탈출시켜 금강산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내무서원은 한에게 “몇 달만이라도 피해 있으면서,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완성해보시오”라는 제안을 하지만 한은 끝내 그에 응하지 못한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구상이 아닌 비구상과 초현실주의 미술관을 체득하고 그것을 신념으로 삼아 왔던 터.

초현실주의 화가에 ‘혁명’은 먼일
그로부터 소설은 한이 금강산 깊은 골에 움집을 짓고 홀로 지내면서 고독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한 사람의 예술가가 산 속에 틀어박혀 그림에만 몰두한다는 상황은 확실히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할 법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사건은커녕 대화 상대조차 없는 산 속 생활을 가지고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노릇만은 아니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한의 과거사를 중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과 마찬가지로 ‘체제 바깥’을 택한 다른 입산자들과의 만남을 중간 중간에 배치하는 것으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었을 소설에 흥미와 긴장을 불어넣는다. 금강산의 수려한 산세를 묘사하거나 주인공 한의 착잡한 심리를 드러내는 문장의 단단한 밀도와 시적인 아름다움이 또한 소설의 질감을 드높인다.

“낮과 밤을 둥글게 말아 다다미 밑에 처넣어두고 낮을 꺼내 배회하다 밤을 꺼내 쓰러지는 생활을 계속했다.”(75쪽)
“시간 역시 어느 골짜기에 처박힌 것도 같고, 너무 멀리 흘러가 돌아올 수 없는 대양으로 가버린 것도 같고, 또는 불 아니면 칠흑에 녹아버린 것도 같더니 바람소리에 섞인 호명소리를 타고 급기야 돌아오는 것이었다.”(168쪽)
구상이 아닌 비구상 회화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미술관에 충실한 묘사와 비유 역시 소설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가령 한의 고향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러시아 튀기 처녀 정한이가 산 속 움집을 찾아와 누드 모델을 자청하는 대목의 묘사는 이러하다.

‘무명생활’ 겪은 작가, 주인공과 닮은꼴
“한은 관솔불의 흔들림이 정한이의 벗은 몸에 매순간 다른 명암을 드리우는 시간의 순차성에 주목했다. 정한이가 원하고 있을 구상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나신을 무수히 쪼개놓는 비구상적 표현방법을 택하려는 것이었다.”(181쪽)
주인공 한의 이러한 미술적 지향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장면도 있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후 노동에 동원되었다가 탈출해서 남쪽으로 향하던 가톨릭 수사가 그의 추상화를 보며 하는 말이다.

“저기 저 빨간 원은 수도원으로 떠나던 날 어머니의 눈물만 같고, 저기 저 삼각의 초록색은 마을 뒷산만 같네요. 저기 빨갛고 긴 곡선은 동구 밖까지 이어져 있는 고향 마을 기나긴 길만 같구요. 사실적인 것보다 수많은 상징을 담은 그림들이 때론 이렇게도 가슴에 와 닿는구나 싶네요.”(197~8쪽)
소설 말미에서, 결국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한은 휴전선 북쪽의 정한이가 자신의 딸을 낳아 홀로 키워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 대표부를 방문하며 그 때문에 북의 선전원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은 물론 실존 인물 한묵씨의 전기적 사실과는 무관한, ‘순전한 픽션’이다. 그러나 질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이응노 화백과 작곡가 윤이상처럼 분단의 상처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예술가들의 경우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 작가의 설정이 마냥 허황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사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학적 진실의 힘을 거기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물의 형태 밖으로 뛰쳐나가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리고자 했”(267쪽)던 화가가 낡아빠진 이념의 굴레에 갇혀 고통받게 되는 결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작가 유채림(본명 최해성)씨는 한신대 신학과를 나와 1989년 문예지 <녹두꽃>에 장시 <핵보라>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 서사시 <쑥대 설렁이는 해방산 저 기슭>(1990)을 내놓은 뒤 소설로 방향을 틀어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1993), 후일담에 해당하는 <그대 어디 있든지>(1996), 신의 존재에 관한 탐색을 담은 <서쪽은 어둡다>(2000)와 같은 장편소설을 펴냈다. 그러나 평단과 독자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소설은 독자들에게 외면당하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동안의 ‘실패’ 경험 때문에 두려움을 떨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랜 무명 생활을 겪으면서도 끝내 예술을 포기하지 못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주인공의 면모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소설을 쓰는 동안 한결 감정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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