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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2 03:23

오래된 책을 묶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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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을 묶으며

http://koreanet.kbs.co.kr/sub_bestreport.htm?dbf=4149

나태주

봄은 이사의 계절이다.
이런저런 일로 살던 집을 옮겨 이사해야 되는 그런 계절이다.
봄은 또 집을 묵은 집을 고치고 다듬는 계절이기도 하다.
살던 집의 이곳저곳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나 모자라거나 불편했던 부분들을 새로이 매만지는 그런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요즈음 우리 집도 집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십여 년 넘게 살고 있던 아파트이다.
이웃집들은 벌써 여러 차례 도배를 다시 한다, 싱크대를 다시 들인다, 커튼을 새로 바꾼다 그랬지만 우리 집만은 처음 이사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집을 고칠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집을 고칠 돈 마련도 어려웠지만 집안에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많아서였다.
특히 책이 골칫거리였다.
책은 안방과 아이들 방과 거실까지 여러 공간을 두루 차지하고 있을뿐더러 안방의 네 벽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사 올 때 아내의 양보로 안방에 책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지내오면서 그것은 아내에게 내내 미안스런 일이 되었다.
비좁고 어수선한 안방에서 아내가 생활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내가 자주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것이 안방에 들어찬 책 때문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래 이번에 큰맘 먹고 집을 고치기로 했다.

아파트로 이사오기 전 단독주택에서 살에서 여러 번 경험한 일이긴 하지만 역시 집을 고치는 일은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다.
비좁은 아파트 공간에 집안의 가재도구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할뿐더러 날마다 먼지와 쓰레기와 함께 살아야 하니까 그 괴로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다른 가재도구들은 아내와 함께 옮겼지만 책을 옮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으로 떨어진 일이 되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책장 앞에 앉아서 책을 꺼내어 일정한 높이로 쌓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었다.
오래 동안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놓기만 한 책의 표지며 모서리 위에는 떡먼지가 켜켜이 앉아 있었다.
그걸 젖은 걸레로 닦기도 하고 청소기로 빨라 내기도 하면서 책을 묶다 보니 일이 여간 더디게 진행되는 게 아니었다.

십 년도 더 넘게 쌓아두기만 한 책들.
그 가운데에는 읽은 책도 있었지만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았다.
더러는 우리 집에 저런 책이 다 있었던가 싶게 낯선 책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책을 묶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책이나 읽지 않은 책이나 또 낯익은 책이나 낯 설은 책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책일망정 이제는 기역에 사라진 지 오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때는 정말로 끼니 대신으로 읽고 싶었고 갖고 싶었던 책을 수도 있겠다.
옷과 바꾸고 음식과 바꾸고 차비와 바꾸고 용돈과 바꾼 책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들을 갖기 위해 나의 아내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오래동안 궁색한 살림살이를 더욱 궁색하게 견뎌야 했으며 우리 집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군것질감을 줄였고 장난감을 줄였고 또 싸구려 옷들을 입어야 했을까…
아이들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거나 소풍을 갈 때 그렇게도 좋아했던 치킨 요리를 한 번도 시켜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나는 책을 묶으면서 여러 번 비닐 끈을 세게 잡아당겨 팔이며 손아귀가 아프기도 했지만 지난날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파왔다.
책을 읽는다는 핑계, 공부하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하나로 나는 얼마나 많이 집안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으며 집안에서 폭군노릇을 했으며 또 망나니로 살았던가.

늦게사 미안스런 마음이 들었다.
아, 내가 책을 좀더 적게 읽었더라면…
그리고 적게 책을 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날의 허물을 묶어내듯이 비닐 끈에 묶여 다락같이 쌓여만 가는 책들을 보며 나는 나 자신의 잘못된 지난날이 그렇게만 높게 쌓여 가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한없이 구슬퍼졌다.
저 많은 책들이 이제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며칠만 지나면 우리 집에 새로이 책장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꽁꽁 열십자로 묶였던 책들은 다시 포승을 풀고 새로운 책장에 그럴듯한 자세로 꽂혀질 것이다.
그렇다 한들 또다시 그 책들은 과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이제 나이를 먹기는 먹은 모양이다.
이것도 철이 드는 것이라면 철이 드는 일이 될 것이다.
때늦은 철듦이 내게는 굳이 반갑지 않다.
그러나 이제라도 아내에게 안방을 제대로 내어주게 된 것은 참으로 마음 가쁜하고 기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아무래도 봄철은 또다시 이사의 계절이고 집을 수리하는 계절이고 다시 한번 새로워지는 출발의 계절인가 싶다.
(200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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