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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을 생각한다- 박노자

서울대 백아무개 강사의 자살 관련 보도를 읽었을 때, 필자는 문득 30여년 전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생각났다. 물론 두 사람이 비극적 최후를 택한 동기는 달랐다. 전태일의 자살은 노동자로서 투쟁의 마지막 단계였던 데 반하여, 백아무개 강사의 경우에는 ‘시간강사’로서 부딪히는 암울하고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절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건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한 역사적 단계에서 생산수단의 발전에 가장 많이 기여한 한 피억압계층의 대표자가 그 발전에 기생하는 착취자의 오만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기 생을 마감한 것이다.
30여년 전 한국의 ‘굴뚝산업’이 본격적으로 세워졌을 때 공업노동자들은 생산 발전의 ‘주력부대’였다. 그러나 그들이 받았던 대접은 살인적인 저임금에다가 장시간의 고강도 노동, 기업운영권으로부터 소외였다. 노동자가 자본의 소모품에 불과한 현실에 전태일은 분실자살로써 맞선 것이다.

오늘날 굴뚝산업이 사양의 길로 접어드는 한국이 10여년을 허송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식산업 위주의 사회로 재편돼야 한다. 굴뚝산업이 어차피 인접 저임금 지대로 계속 이전되는 지금, 같은 문화권의 중국·베트남 대학생들이 찾아올 수 있는 한국으로서는 고등·전문교육 서비스가 제3의 수출 부문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해외 유학생 수가 해마다 15% 이상 오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길이 최적의 선택일 것이다.

한국이 극동지역 문화·교육 서비스 수출의 새 중심으로 떠오르는 이 역사적인 ‘제2산업화’ 시대의 주력부대는 누구인가 시간강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교육산업의 비정규직 숙련 노동자들이다. 이들 6만여명의 비정규직 교단 노동자들이 대학수업의 절반 이상을 담당할 뿐 아니라 첨단 연구프로젝트의 연구 노동력이 되기도 하고 한국을 구미의 최신 연구서적이 들어오는 ‘번역의 왕국’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인접 국가 학생이 찾아올 만한 참신한 연구와 교육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고에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수업 준비, 채점, 번역, 연구, 교수의 연구 보조나 논문 대필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과는 때론 30여년 전 공업노동자의 일과보다 길다. 강의 배정을 담당하는 교수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불안정한 신분은 노동법이 먼 시절 산업노동자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30여년 전 하급 공업노동자의 소득이 도시민 평균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쳤듯 시간강사층의 가구소득도 도시민 평균의 50~60% 정도다. 학생들이 학교 당국을 상대로 주장을 펴긴 하지만 강사노조가 있는 학교는 드물고, 강사의 파업은 30여년 전 산업노동자의 파업처럼 하기 힘든 일이다. ‘지식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소장 학자들이 교육자본의 ‘먹이’가 되는 상황은 많은 이들에게서 삶의 희망을 빼앗기도 하고 지식·문화사회로의 전환을 방해하기도 한다. 설령 세계적인 천재적 두뇌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강의가 없는 방학 때 아이들의 비싼 양육비 걱정으로 잠 이루기 어려운 사람이 창조적이며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내기 쉽겠는가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고정급 지정이나 연구비 증액 등의 방안도 의미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분의 안정화와 결사권, 그리고 나아가서는 학교운영 참여권의 보장이다. 한 번 임용된 이상 ‘비상근 교원’으로서 위치가 부여돼 ‘엿장수 마음대로 해고’가 불가능해야 교수가 강사를 머슴으로 부리는 추태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강사노조가 임단협의 주체로 나서고 교수나 학생, 직원과 함께 학교운영의 떳떳한 주체가 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수많은 백씨’들을 죽음 아닌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3/06/0010000002003062222100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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