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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어원학적으로 보자면,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의 이 말은 질병이 '육체적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을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동시에 환자에게 사회적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는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이러한 현상은 질병을 단순히 '치료해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하지 않고 거기에 여러 이미지와 은유를 덧붙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질병에 붙어 있는 갖가지 이미지와 은유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우쳐주면서 질병과 환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수정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저자는 대표적인 질병으로 결핵과 암을 비교 분석한다. 결핵은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을 죽인 끔찍한 병이었다. 그렇지만 기이하게도 결핵은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천재들이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는 정신적 고양에 큰 도움이 되는 '신비한 병'으로 여겨졌다. 반면 마찬가지로 치명적 질병인 암에 대한 인식은 판이하다. 암은 충동을 억제하거나 정신적 수양이 부족한 사람에게 '침입'하는 질병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암환자를 기피하곤 했다.

"결핵이 의식을 영적으로 승화시켜주는 것처럼 표현됐듯이, 암은(의식이 없는 이드를 통해) 의식을 가라앉히거나 말소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마디로 "결핵이 병든 자아의 질병이듯이, 암은 타자의 질병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데에 예술가들이 한몫 했음을 지적한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 스탕달의 [아르망스] 등에 묘사되는 결핵 걸린 인물들은 한결같이 특이한 인물이며 사람에게 위로 혹은 동정을 받는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오든의 시 [기양]에 나오는 암 걸린 인물은 평범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삶의 패배자'로 묘사된다. 키츠-포-체호프 등 결핵으로 사망한 예술가가 신격화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인간을 비하할 때 흔히 쓰는 표현 '암적인 존재'도 저자는 사회가 만들어낸 은유의 횡포라고 꼬집는다.

치유 가능성의 유-무도 한 요인이 되었다. 결핵은 치유 가능성이 있었다.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곳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하면 희망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암은 죽음과 직결됐다. 그것도 처절한 고통이 뒤따르는 죽음이었다.

저자는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질병' 매독은 "은유로 쓰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매독은 사망 원인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단 하나뿐이라고 여겨져 공포로 가득 찬 질병일 따름이었다. 매독은 문란한 성관계를 벌주는 신의 응징이어서 동정의 여지조차 없었다.

결핵과 암의 관계는 암과 에이즈의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암이 치유 가능한 질병으로 정복되어가는 와중에 치유 불가능한 질병으로 에이즈가 등장한 것이다. 과거 암이 그랬듯이 에이즈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낭만화된다거나 어떤 감상을 유입시킬 수 없다.

그러나 결핵에 대해선 여전히 '신비로운 그 무엇'인가가 은밀하게 포함돼 있으며 암에 대해 일삼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와 나쁜 은유 사용은 쉽게 퇴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저자는 세월이 더 흐르면 이미지와 은유들도 바뀔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이처럼 잘못된 이미지와 은유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환자를 불필요한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며 조기 치료 내지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해 자국 내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66년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각종 저서에서 기존의 잘못된 해석과 관념의 틀을 깨고자 노력하고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 역시 그동안 저자의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손택은 이 책의 목적에 대해 명쾌하게 압축해놓았다. "지금의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 15,000원.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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