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854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월간 정신세계18집(2001.11,12)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왜 카인의 재물은 받지않고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까...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도 해석을 하는구나...흥미로왔습니다.






데미안과 함께 떠나는 카발라 여행


                                                                  조하선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 데미안….
  고뇌하는 젊은 날에 성인식을 치루듯
  누구나 한 번씩 읽게 되는 불후의 고전, 데미안!
  데미안이 카발라 소설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사실, '카발라'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도
  이 데미안을 통해서죠.
  헤세가 데미안 속에 비장해 놓은 카발라의 신비가
  마침내 그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눈부신 나신을 드러냅니다. 




  서문

문학사 불후의 고전 <데미안>!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은 미치게 만드는 마력적인 힘을 지닌 소설이지요. 전 세계 고뇌하는 청춘들의 가슴 속 깊이 간직된 영원한 벗이기도 하구요.
  고전은 구체화된 원형(原形)입니다. 고전은 마치 신화처럼 인류에게 하나의 원형적 존재로 마음 속 깊이 남아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이런 위상에 걸맞게 고전은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차원으로 해석됨은 물론, 심리, 철학, 종교, 문화 등 인간 삶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원용되기도 합니다.


  이 원고는 <데미안>이라는 고전을 '카발라'라는 서양 신비주의 관점에서 보고, 그 안에 인간의 궁극적 본질과 우주론적인 개념이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풀이합니다. 흔히 유대교 신비주의로 일컬어지는 카발라가 세상에 가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시대입니다.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카발라는 서양 정신세계의 모태가 되어왔죠. 마법, 연금술, 타로, 점성학 등 서양의 에소테릭 전통들은 모두 그 근저에서 카발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지요. 서양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성경 또한 예외가 아니고요. 서양의 많은 영적 스승들은 카발라 없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서양 신비주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데미안>은 기본적으로 성경과 카발라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내용이 전개돼 나갑니다. 카발라는 동양의 여러 형이상학 체계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그만의 독특한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원고를 통해 독자들은 데미안의 안내를 받으며 이 신비로운 카발라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스승이고 그의 인도를 받는 싱클레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 할 수 있겠죠. 데미안이 시공을 넘어 전해 주는 카발라의 비전(秘傳), 그 신비로운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제 1 장(章). 두 개의 세계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10살 되던 해,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의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린 시절 싱클레어는 자신이 항상 두 개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한 세계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그는 밝음, 깨끗함, 사랑 등의 경건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밖의 곳, 그러니까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난 여타의 세계가 바로 다른 세계, 두 번째 세계였습니다. 그곳에는 첫 번째 세계의 특성인 평화, 질서, 휴식 등은 없고 오로지 음산함, 폭력, 살인, 술주정, 해괴망칙한 이야기 등이 난무하는 끔찍한 세계였습니다. 그는 이 두 개의 세계가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서로 가까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합니다.



  소설 속의 이 두 세계는 바로 카발라에서 말하는 생명나무의 세계와 암흑나무의 세계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우주의 창조를 '생명나무'라고 부르는 심벌로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10개의 세피로트(빛 또는 숫자)와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22개의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피로트(단수형은 세피라)는 절대자로부터 나온 우주의 힘이자 존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이 10개의 세피로트로 우주를 만들게 됩니다. 


  카발라에 의하면 태초에 우주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허, 무(無)의 상태였죠. 이 무한(아인 소프) 속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의 에센스, 즉 존재화 될 잠재성을 지닌 원질은 그 안에 편만해 있었습니다. 영겁 속에서 그 원질들은 하나의 초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에센스의 집중이 이루어진 결과 '빛'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절대 조화의 밝은 빛이 탄생할 때 부수적으로 어두운 빛이 같이 생겨나게 됩니다. 빛의 탄생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이차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죠. 빛이 있는 곳에 항상 그림자가 생기게 되 듯이요. 이렇듯 빛과 질서와 선의 탄생에는 어둠과 무질서와 악의 탄생이 수반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신이 외부를 보니 거기 어둠이 있습니다. 그는 그 어둠 또한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과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과 빛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둠을 빛으로 흡수한 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는 그 어둠에 접촉하고자 다가갑니다. 그러나 빛(절대 선)은 어둠(절대 악)과 접촉하지 못합니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성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연결이 불가능했던 거지요. 마치 물과 기름이 같은 액체이면서도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신(빛)은 자신의 전압을 낮추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빛의 광도를 조금 낮추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첫 번째로 발출된 빛이 케테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호크마, 비나,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 네차흐, 호드, 예소드의 순으로 전압을 낮추며 발출되고, 마지막 세피라 말쿠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부의 어둠과 접촉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10단계에 걸쳐 전압을 낮추어온 과정이 바로 10세피로트의 생성과정이고,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생명나무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세피로트는 몇 개의 단위별로 묶여 존재의 4계(界)를 구성하게 됩니다. 아칠루트계(발출계), 브리어계(창조계), 예치라계(형성계), 아시야계(행위계). 우리가 사는 물질계는 세피라 말쿠트에 해당하는 아시야계입니다. 
  그림자가 빛에 비친 사물의 형태를 닮듯이 악 또한 선의 체계를 닮습니다. 생명나무가 창조되는 순간 신성의 강렬한 빛을 받아 그 반영으로 암흑나무라는 그림자가 생겨나게 되지요. 이로써 양자는 대 광명과 대 흑암을 잇는 거대한 두 개의 사다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생명나무에 10개의 세피로트가 있듯이 암흑나무에는 10개의 클리포트(단수는 클리파, 껍데기라는 뜻)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천사와 대천사, 신성이 지배하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지요. 이 신성한 세계를 시트라 디케두샤(sitra di kedusha)라고도 하는데 '신성한 쪽', '신성한 세계'라는 뜻이지요.  이런 낙원 같은 세계에 비해 암흑나무의 세계는 악마와 대 악마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시트라 아라(Sitra ahra)라고도 하는데 '다른 쪽', '다른 세계'라는 뜻이지요. 


  이 두 세계는 생명나무의 마지막 영역인 말쿠트, 즉 물질계에서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생명나무와 암흑나무의 영향을 동시에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식이 평화와 사랑과 질서 속에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생명나무를 통해 흘러나오는 신성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의식이 분노와 탐욕과 무질서 속에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시트라 아라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구요.

  우리는 흔히 '신이 왜 세상을 창조했을까?' 또는 '신이 왜 인간을 창조했을까?'하는 의문을 품곤 합니다. 카발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해답은 자명합니다. 바로 '성장'을 위해서죠. 신은 단순히 유희를 위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카발라에서는 신도 끊임없이 진화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다만 지금 이 순간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죠.
  10번째 세피라 말쿠트까지 발출함으로써 어둠과의 접촉에 성공한 신은 이제 어둠(무질서)을 빛(질서)으로 변화시킬 존재를 제계(諸界)에 내려보냅니다. 바로 자신의 분신들을 내려보내는 것이죠. 거대한 화염이 신이라면 그 화염의 불꽃들을 내려보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영혼)들이죠.



  싱클레어는 자신이 밝고 올바른 세계(생명나무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세계(암흑나무의 세계, 시트라 아라), 그 금지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속한 밝은 세계를 권태롭고 황량하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웃 아이들과 놀다가 크로머라는 소년을 알게됩니다. 크로머는 키도 크고 힘도 센 거친 아이였습니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악동이었던 거죠. 그를 대장 삼아 놀던 아이들은 소 영웅심에 자기들이 저지른 나쁜 행위들을 자랑삼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무리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 싱클레어는 자신도 과수원에서 사과 한 자루를 훔친 적이 있노라고 이야기를 지어내 떠벌립니다. 그러나 영악한 크로머는 재빨리 기세를 이용해 그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 아닌 사실임을 억지로 다짐받아 내고는, 실은 자기도 그 사건을 알고 있었으며 과수원 집 주인이 도둑을 신고한 사람에게 2 마르크의 현상금을 주기로 했다고 꾸며대지요. 그리고 일러바치지 않는 대가로 싱클레어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이때부터 어린 싱클레어는 심각한 고통과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그는 밝은 세계에 속하지 않게 되었고 어두운 세계에 묶여 속박된 삶을 살게 됩니다. 큰돈이 없던 그는 수 차례에 나눠 돈을 줘야했고 그러기 위해 매번 부모를 속여야 했고 부정한 행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악순환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밝은 세계에 더 이상 끼어 들 수 없었다. 나는 아무리 비벼 닦아도 떨어
  지지 않는 더러운 오물을 발에 묻힌 채 집안의 세계가 전혀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들
  어 온 것이다. 나의 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간부터 영원히 악의 세계에 속하게 되고 악한 자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복종하며 그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걸려들어 꼼짝없이 고통받게 된 사건은 인간의 신성 실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인 것이죠. 말쿠트에 내려와 조화롭게 활동하던 영혼들이 법칙을 넘어서 금단의 영역인 다른 세계, 즉 시트라 아라(Sitra ahra)에 대해 지나치게 마음의 문을 열어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열의라 부르든 호기심이라 부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네거티브 소화(消化) 활동에 따르는 우주 법칙을 어겼다는 것이죠. 조화를 상실한 결과, 인간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암흑의 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영체로 활동하던 인간들에게 육체가 생긴 것도 여기에 기원한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죠.
  싱클레어의 다른 세계에 대한 철모르는 호기심, 다른 세계의 존재들과의 어울림, 예기치 못한 악의 강력한 힘, 마수에 걸려듦, 이것들은 바로 인간의 신성 실락 과정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악마에게는 자비가 없습니다.(자비가 있으면 악마가 아니겠지요.) 싱클레어는 미처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제 2 장(章). 카인



  싱클레어의 고뇌에 대한 구제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어느 날 라틴어 학교에 신입생 하나가 전학을 옵니다. 그가 바로 데미안! 어느 날 학교 사정으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학급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매혹적인 외모와 고요한 태도에 무척 끌리게 됩니다.
  그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뒤를 따라와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넵니다. 싱클레어의 집 앞까지 온 데미안은 문 위의 특이한 문장(紋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매의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매 문장(紋章)은 소설의 전체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소재로, 이에 대해서는 5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 날 둘이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의 주제는 성경 시간에 공부했던 카인과 아벨 이야기였습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매우 특이하게 해석합니다. 요컨대 카인은 죄인이 아니라 강한 힘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를 가진 자였고 그것이 형상화 된 것이 이마에 난 표적이라는 것이었죠. 그의 독특한 해석에 싱클레어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싱클레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탐구의 출발점이 됩니다.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카인과 아벨이 그들이었습니다. 카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카인은 땅의 소산물인 곡식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고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죠. 그러자 질투심에 불탄 카인이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그러자 진노한 하나님이 그 지면에서 카인을 내쫓아 땅에서 방랑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카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이를 호소하자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를 주어 만나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면하게 해줍니다.



  카인과 아벨, 그리고 카인의 표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카발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카인은 본디 '대장장이'라는 뜻이고 아벨은 '공허'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대장장이가 공허를 죽였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공허는 바로 카발라의 아인 소프(Ayin Soph)를 의미하죠. 아인 소프는 무한으로서, 그 안에는 어떠한 피조물도, 대대(對待)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상태입니다. 아인 소프는 본질적으로 무한성을 가지기 때문에 유한성을 띤 것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창조란 유한한 것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창조를 위해 아인 소프는 자신의 일 점 속으로 철수했고 그 철수된 일 점 속에 유한 공간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이것을 카발라에서는 '짐줌'이라고 합니다. 


  무한이 사라졌기에 그 자리에 유한 공간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원시 공간을 카발라에서는 '테이루'라고 합니다. 창조, 즉 존재계의 창설은 바로 이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죠. 무한이 철수하면서 나타난 신이 바로 성경에서 언급되는 '스스로 있는 자', '에흐예'입니다. 그가 바로 창조주이죠. 이 창조주는 카발라에서 흔히 대장장이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가 벌겋게 달군 쇠를 불꽃을 튀기며 떵떵 두드리는 모습은 우주를 창조하는 모습의 상징인 것입니다.


  아벨(공허)이 양치는 자로 된 이유는 그 무위성(無爲性) 때문이죠. 양치기는 일이 적습니다. 그의 한가함은 무한이 갖는 비창조성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카인이 농사꾼으로 묘사된 것은 끊임없는 창조성을 상징합니다. 농부는 결실을 거두기 위해 밭 갈고, 씨 뿌리고, 김 매고, 수확하는 노동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부단한 활동성은 창조주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은 어째서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신이 육식주의자여서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겠죠. 그 해답은 이렇습니다. 여기서의 신은 바로 무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한자이기 때문에 그 속성상 무한성을 지닌 것, 즉 아벨의 제물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카인의 제물은 유한성을 띱니다. 따라서 무한자에게 열납될 수 없었던 것이죠. 이것은 속성의 문제이지 신이 어느 누구를 더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맥락에서 볼 때 카인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카인은 신(무한자)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

  여기서 지면은 무한계를, 방랑하게 될 땅은 유한계를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 자식들인 카인과 아벨 중에서 아벨이 죽었으니 세상에 남은 것은 카인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카인은 자기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이 자기를 죽일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의 다른 구절 속에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여기서 뱀은 물질성을, 여자는 영성을 각각 상징합니다. 여자 하와(생명이라는 뜻)의 후손은 카인입니다. 따라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로 예언된 자가 바로 카인인 것이죠. 반대로 카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자로 예언된 자들이 있으니 뱀의 후손이 그들입니다. 카인이 땅에서 만나기를 두려워 한 사람들은 바로 이 뱀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뱀의 후손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호소에 대한 신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카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카인이 정말로 죄인이라면 왜 신은 그를 죽이는 자에게 벌을 칠 배나 더 주겠다고 말하며, 더군다나 표시까지 주어 그를 보호했겠습니까. 카인은 신성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성으로부터 발출 되어 나온 카인의 후예들이고요. 데미안이 말하는, 이마에 난 카인의 표적은 신성이 강림한 '제3의 눈'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 '제3의 눈' 때문에 우리는 물질성(뱀)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 뱀에게 물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윤회(카발라 용어로는 '길굴')를 통해 그 상처는 회복되고 언젠가 우리는 모두 물질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신성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아버지인 카인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카발라의 생명나무 상에 적용하면 카인은 바로 최초의 세피라, 케테르가 됩니다. 카인의 후예인 인간들은 말쿠트에서 뱀의 후예들(시트라 아라의 거주자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말쿠트 안에서 두 개의 세계가 만나고 있기 때문이죠.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처음 약속한 돈을 다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싱클레어가 그 돈들을 훔쳐 갖고 온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약점을 이용했던 것이죠. 싱클레어는 오히려 전보다 크로머의 손에 더 깊이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어느 날,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채 걷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뒤에서 그를 부드럽게 붙잡는 손길. 데미안이었습니다. 말없는 시선의 교환….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크로머가 만나는 것을 보고 있었고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죠.


  데미안은 그를 돕고싶다고 말합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도록 싱클레어를 불러내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집 앞에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을 계속 지니고 있던 그는 어느 날 골목에서 크로머와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움찔 놀라 도망쳐버리는 게 아닌가요. 크로머가 자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싱클레어는 기쁨과 경이를 느낍니다. 


  후에 데미안을 만났을 때 그가 크로머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그가 자신을 그때 크로머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면 평생 병들고 타락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기적이 일어난 뒤 그는 데미안을 멀리합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 일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애쓰게 되죠.


  그는 이제 예전의 밝은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다시 아벨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누리는 무의식적 천국일 뿐입니다. 헤세가 말한 인간형성 과정의 제 1 단계인 것이죠. 그는 <단편 신학>이라는 글에서 인간형성의 단계를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형성의 첫 단계는 무죄의 단계입니다. 즉 어린 시절 순진 무구한 천국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두 번째 단계는 악을 인지하고 이상향을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이 단계를 진지하게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절망으로 끝나게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몰락으로 가거나 아니면 정신의 제 3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제 3 세계란  바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 신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에 대한 봉사자로, 그에게 귀의해야 함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헤세는 이 마지막 단계를 '신비주의적 단계'라고 칭하며 이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을 그는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싱클레어를 괴롭힌 크로머는 시트라 아라의 존재, 쉽게 말해 악마(클리포트의 힘)를 상징합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외부로부터 다가온 악령 또는 네거티브한 존재, 발꿈치를 무는 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것이고 데미안(카인의 후예, 뱀의 머리를 밟는 자)이 그것을 제거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제 3 장. 도둑



  아이러니칼하게도 크로머 사건이 있은 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서로 서먹한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몇 해 동안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묘하게 그 둘을 다시 연결시켜 놓기 시작합니다. 견신례 수업을 둘이 한 교실에서 받게 된 것이죠. 한동안 싱클레어는 크로머 사건의 부담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를 피합니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오면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게 되고, 그 후부터 서로 다시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 무렵 데미안은 가벼운 대화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인간의 의지가 갖는 초월적 힘, 종교 교리의 융통성 있는 해석 등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결과적으로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견신례는 교회로의 입문이 아니라 데미안에 의해 알게된 사상의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할 정도가 돼버리죠. 종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보다 그에게서 배운 것이 싱클레어를 훨씬 더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은 이밖에도 말없는 침묵으로, 실천으로 명상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재치 있는 말은 아무 가치도 없어. 전혀 없어. 단지 자기 자신
  에게서 떨어져 나갈 뿐이야.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이야말로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완전히 침잠하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수업 시간 중에 그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줍니다. 수업을 한참 받던 싱클레어는 갑자기 옆자리가 완전히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엄습해 오는 바람에 고개를 돌려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 데미안이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눈은 반개(半開)한 채 초점이 없었고 몸은 미동도 않았으며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적막한 우주 공간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각처럼 꼿꼿이 앉아 있는 그의 이마에 마침 파리가 앉더니 천천히 코와 입술 위를 걸어다닙니다. 그러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싱클레어는 전율하며 생각하죠. 이것이야말로 진짜 데미안이라고. 이제까지 자기와 걷고 얘기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던 데미안은 단지 반쪽에 불과했었다고. '데미안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이 당시 데미안이 종교 교리를 해석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싱클레어가 진리라고 생각해 왔던 믿음들을 한 순간에 뒤엎는 충격적인 것이었죠.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생각 없이 그것들을 무조건 받아들여 왔는가 깨닫게 됩니다. 
  데미안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종교(기독교)의 결점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예가 하나있어. 성서에 보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훌륭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나타내야 할 원래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초점
  이야. 하나님은 선한 것,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높은 것이기도 하지. 아주 옳아! 그러나 세상
  은 또 다른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어. 그 다른 세계를 기독교에서는 악으로 치부, 완전 묵살, 은폐
  시켜버리고 있어.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숭배하고 마땅히 신성하게 여겨야 된다고 생각해.
  단지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공인된 반쪽 세계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사람들은 악마까지도 자기
  속에 포함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을 창조해야 돼.'   



  데미안의 이러한 신관(神觀)은 정확히 카발라적인 것입니다. 카발라가 유대교 또는 기독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을 말한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인 소프(Ayin Soph)입니다. 아인 소프에는 선과 악이 에센스의 상태로 혼재돼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신의 반영 때문이라고 하죠. 즉, 신속에 악의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투영으로서 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자 속에 없는 속성이 피조물 속에 표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생명나무와 암흑나무는 사실 모두 신의 반영인 것입니다. 선과 악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돼죠. 
 
  데미안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은 두 명의 도둑에 대해서도 색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이 장(제3장)의 제목, [도둑]은 바로 이 십자가 상의 도둑들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와 함께 매달린 두 명의 도둑 중 한 명이 예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니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도둑이 그를 꾸짖으면서 '우리는 마땅히 벌받을 짓을 해서 벌받는 거야. 하지만 이 사람(예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 뒤 예수에게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참회의 말을 하지요.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앞의 도둑은 끝까지 회개치 않는 완고한 죄인으로, 뒤의 도둑은 마지막 순간에 훌륭한 믿음을 보여준 회개자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데미안은 전자를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간 줏대있는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 반면 후자는 이랬다저랬다 하고 울기 잘하는 감상주의자로 폄하하지요.
  물론 데미안의 이 역설적 해석을 반드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데미안의 말속에는 성경을 거꾸로 뒤집어 보고 다른 관점에서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의 색채가 강하기 때문이죠. 데미안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그의 자유로운 교리 해석 방식에 따라 위 이야기에 내포된 상징성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진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골고다는 인간의 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 위에 세 명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 때 좌우 두 명의 도둑은 각각 두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가운데 있는 예수는 중간의 간뇌를 상징합니다.  처음 도둑은 수학적, 논리적인 본질(기능)을 가진 좌반구를, 나중 도둑은 감상적인 본질(기능)을 가진 우반구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인간의 좌뇌는 언어, 계산, 논리를 관장하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좌뇌를 상징하는 도둑이 예수에게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차가운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우뇌는 직감과 통찰로 사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기능을 가집니다. 우뇌는 리듬, 음악, 색상, 그림, 상상력 등의 영역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예술가, 신비가의 두뇌라 할 수 있죠. 우뇌를 나타내는 두 번째 도둑의 말속에서 우리는 다시 이점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오컬티즘에서는 이 두 개의 반구가 균형 잡힌 활동을 할 때 비로소 간뇌가 작용하기 시작하고 상실된 '제3의 눈'의 기능이 회복되어 초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좌뇌 중심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의 활동은 거의 좌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죠. 따라서 되도록 좌뇌를 진정시키고 우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균형을 잡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이래서 '우뇌로 생각하기', '우뇌 계발법' 등의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두 명의 도둑, 강도는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상념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우리를 해치는 유일한 존재(강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상념이기 때문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요동치며 흐르는 인간의 상념이야말로 신성과의 조우를 방해하는 유일한 강탈자이기 때문이죠. 앞서 살펴본 데미안의 명상은 이 도둑을 몰아내는 방편의 실천적 제시인 것입니다.
       

 

  제 4 장. 베아트리체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싱클레어는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데미안과도 이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절 그는 알 수 없는 공허, 고독, 세상에 대한 멸시감에 빠져 술에 절은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를 괴롭히던 것 중의 하나는 성(性)적인 문제였습니다. 성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적으로, 파괴자로, 금지된 유혹으로, 죄악으로 엄습해 온 것이었죠. 

  나는 다시 한 번 완전히 어두운 세계에, 악마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세계에선 멋들어진 놈으로
  통하게 되었다.[...]중요한 것은 그 '어두운 세계' 즉 '또 하나의 세계'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찍이 크로머였던 것이 지금은 내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세계'가 다시 내 위
  에 위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를 괴롭히던 크로머가 외부에 존재하는 시트라 아라의 힘이라면 지금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시트라 아라의 힘입니다. 신성 실락 이후 인간은 시트라 아라의 네거티브한 힘에 묶였기 때문에 누구든 내면에 무질서한 속성이 깃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싱클레어는 지금 헤세가 말한 인간형성의 제 2 단계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향의 추구와 좌절의 단계를 말이죠.
  이런 고뇌의 시기를 겪고 있던 그에게 탕아의 생활을 종식시켜 주는 하나의 계기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 그는 매혹적인 여성 베아트리체와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성적인 충동을 압도해 버리는 어떤 존경과 사모심을 느끼게 됩니다. 베아트리체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이제까지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게 되지요.     



  어린 시절 그가 누린 '밝은 세계'가 무의식적 천국의 세계라면 지금 그가 향하고 있는 세계는 의식적 천국의 세계입니다. 즉, 거듭남의 길로 들어선 것이죠. 예수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 다시 순진 무구한 의식 상태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헤세가 말한 인간형성의 제 3 단계(신비주의 단계)입니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붓 가는 대로 그립니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그녀의 실제 모습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습니다.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반은 남자, 반은 여자같았고,
  나이도 없고, 일종의 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싱클레어는 그 그림이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확실히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순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어째서 그것을 이렇게 늦게야 알았던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싱클레어의 삶에 일대 전기를 가져다준 베아트리체는 우리 안에 있는 여성원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싱클레어는 남성원리를 나타내게 되지요. 한 인간(남성이든 여성이든) 안에는 남성원리(양陽)와 여성원리(음陰)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신체의 오른쪽과 왼쪽, 상반신과 하반신, 핑갈라(양의 신경채널)와 이다(음의 신경채널) 등. 인간은 결국 음양의 결합체인 것이죠. 카발라에서는 이것을 생명나무의 우측기둥(양)과 좌측기둥(음)으로 표현, 설명합니다. 오컬트 철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 남성-여성 원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해탈의 열쇠가 이 양대 원리의 합일에 숨어 있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죠.

  한 동안 싱클레어는 그 그림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얀트라(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는 도화)처럼 항시 이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에 비친 그림을 보다가 문득 그것이 베아트리체도 아니고 데미안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내면, 나의 운명, 나의 영이었다'
 
  베아트리체가, 하나의 원리에 대한 표상적 인물이듯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미안의 정체(본질)는 과연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데미안은 바로 싱클레어의 혼, 고급자아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신으로부터 발출된 불꽃입니다. 이 신성한 불꽃이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죠. 데미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데미안이 등장하는 것은 제 2 장 서두입니다. 거기서 헤세는 데미안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작가의 이러한 설정 행위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과부의 아들'에는 형이상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죠. 


  오컬티즘에서 중요시되는 전설이나 신화 속 인물들 중에는 과부의 아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히람 아비프,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 트야나의 아폴로니우스…. 예수 또한 이와 유사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과부의 아들'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시스와 마리아는 동정의 상태에서 아이를 배었죠. 이것은 그녀들을 통해 태어난 아들의 아버지가 저급한 세간 남정네가 아니라 바로 신(神)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컨대 '과부의 아들'이란 '신의 아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소설 <데미안> 속에는 데미안의 아버지에 대해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등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라고 봅니다. 즉, 헤세는 데미안이 '신의 아들'임을 침묵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의 영혼은 신의 아들입니다. 과부의 아들, 신의 아들, 데미안은 우리들의 내면에 거하는 고급자아, 내면의 스승인 것입니다. '데미안(demian)'의 어원을 '데몬(demon)'에서 찾을 때, 이 데몬은 다시 그리스어 '다이몬(daimon)'에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이몬은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 속에 잠겨 있는 신적 존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본성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다이몬이라고 했으며 플라톤 이래 다이몬은 인간과 신의 중개자로 생각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소크라테스의 내면의 소리(안내자)인 '다이몬'입니다. 



  데미안을 묘사하는 표현들 속에서 우리는 그가 사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얼굴의 특징은 한마디로 무시간성에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소년의 얼굴도 어른의 얼굴도 아니며 몇 천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해 있는 듯 보이지요. 이는 신성에 대한 카발라적 명칭인 '고대자(古代者)', 성경상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개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미안의 얼굴은 때로 여자처럼 보입니다. 반은 남자, 반은 여자의 남녀 양성적 모습인 것이죠. 일인칭 화자 싱클레어에 의해 서술되는 데미안의 외모는 사실 그의 외적인 특징이 아니라 내적인 본질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미안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임을 헤세 스스로도 밝히고 있죠. 1954년의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데미안은 원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가, 하나의 교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체현된 것이다.


 

제 5 장.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 속에 싱클레어는 그와의 지난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됩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데미안이 그(싱클레어)의 집 대문 위에 있던 새 문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일까지. 그 날 밤 싱클레어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데미안은 내게 문장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내가 그것을 삼켰을 때 나는 끔찍스러운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삼킨 문장의 새가 내 몸 속에서 살아나 나를 가득 채우며, 안에서 나를 쪼아먹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차, 나는 깜짝 놀라 깨었다.   

  싱클레어는, 이번에는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막연한 내적 충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그려 나가게 되죠. 며칠만에 완성된 그림, 그것은 거대한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냅니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수업 시간에 책갈피 속에 쪽지가 접혀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펼치게 됩니다. 그 종이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얼어붙고 말죠.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그것은 바로 데미안의 답장이었던 것입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그 글귀 중 특히 아브락사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는, 선생이 '아브락사스'라고 외치는 소리에 놀라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됩니다.

  아브락사스는 내 생각에 보다 의미 있는 무엇인 것 같습니다. 가령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신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는 헤로도투스 과목 시간이었고 마침 고대 신비주의에 대해 선생이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아브락사스에 대한 얘기가 나온 것이구요. 그 날부터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에 씌어진 문구는 이 소설 중에 나온 모든 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동시에 가장 깊은 상징성이 내포된 말이기도 하구요. 사람들은 흔히 그 구절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의미의 차원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런 의미가 내포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심원한 신비 철학적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카발라적인 관점에서 위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알은 아인 소프가 편만히 존재하는 무한계를 상징합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유한계를 상징하구요. 바로 생명나무의 세계인 것이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짐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그대로 다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벨은 알이고, 카인은 알을 깨고(아벨을 죽이고) 나오는 새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는 또한 인간의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모두 아인 소프로부터 투척된 불꽃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요. 인간의 영혼을 표상 하는 새는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라는 신에게로 날아갑니다. 이 소설에서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이 하나로 결합된 신을 일컫는 상징으로 쓰이고 있지요. 아인 소프로부터 투척되어 나온 인간의 영혼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게 되고 다시 자신의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새가 날아가는 본향이 바로 아브락사스, 아인 소프인 것입니다. 이때 신은 인간이 성장한 만큼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무질서로부터 인간이 일구어낸 조화, 균형, 질서의 의식이 바로 신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인간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어느 신비가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지요. 신은 인간이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당시에 싱클레어는 이상한 꿈을 자주 반복하여 꾸게 됩니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꿈의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에는 가문(家紋)인 새가 파란 바탕 위에 노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집 안에서 어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를 껴안으려고 하자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키가
  크고 억세게 생겼으며, 데미안과 비슷한 듯했고 내가 그린 그림과도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으며 힘있게 생겼는데도 매우 여성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나를 끌어당겨 무섭도
  록 소름끼치는 애무로 나를 받아들였다. 쾌락과 공포가 뒤섞인 그 포옹은 신에 대한 봉사
  이며 동시에 죄악이었다.



  그는 꿈속의 여인을 어머니이자 애인으로 여깁니다. 그는 마음 속에서 데미안과 매와 함께 살았고 그의 운명, 그의 연인인 꿈속의 모습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아브락사스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 꿈속의 연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현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헤세가 카발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1557년, 카발라의 성전(聖典)인 <세페르 예치라(창조의 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데미안>과 카발라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피스토리우스라는 이름의 설정 또한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할 것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먼저, 불과 구름을 통한 명상과 예지, 아스트랄 비행, 성스러운 만트라 '옴(om)', 베다 등의 인도 신비, 이집트, 그리스, 미트라 비의 등에 대해 배웁니다. 그와 피스토리우스 사이에는 나중에 정신 감응(텔레파시)을 통한 의식의 교류까지 이루어지게 되죠.
 
  피스토리우스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싱클레어가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되지요.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깨달은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그것이
  어디로 가는 길이든 따지지 않고 더듬어 전진하는 한 가지 일밖에는 아무런 의무도 존재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명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뿐이다.



  피스토리우스는 외부의 스승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내면의 스승을 나타내는 데미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따라서 싱클레어가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도록(즉, 새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싱클레어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지시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가 아브락사스 신에게 날아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길이기에….


  피스토리우스(외적인 스승)를 떠나던 날 싱클레어는 캄캄한 심연의 혼돈을 느낍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스승의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은 데미안과 흡사했습니다. 그는 종이에 이렇게 씁니다.

  한 지도자가 나를 버렸다. 나는 완전히 암흑 속에 홀로 서있다. 나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다.
  도와다오.       
       
이것은 데미안, 즉 내면의 스승, 자신의 고급자아에게 하는 기도의 소리인 것입니다.




  제 6 장. 야곱의 투쟁



  싱클레어는 잠에 빠져들면 언제나 예의 그 어머니이자 애인인 꿈의 연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지요. 며칠 뒤 완성된 그림은 데미안의 얼굴과 비슷했으며 남자이기도 했고 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저녁이면 그 그림을 앞에 두고 그것을 보면서 명상과 기도를 하곤 했죠. 어느 날 그는 피스토리우스가 들려준 얘기를 떠올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사와 야곱과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였죠.


  야곱은 성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대퇴부가 골절될 정도로 말이지요. 날이 새어 천사가 제발 놔주라고 해도 계속 붙들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을 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고 우기면서요. 천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이번에야말로 야곱처럼 사생 결단을 내기로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다지고 그림에 집중하던 그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자 봄날의 폭풍우처럼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새로운 느낌이 밀어닥쳤고 별이 그 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그는 자신의 탄생 이전과 현생과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싱클레어가 매일 벽에 걸어 놓고 쳐다보며 명상을 한 그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말 그대로라면 그것은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람의 그림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존재는 바로 카발라에서 말하는 대우주인(大宇宙人), 아담 카드몬(Adam kadmon)입니다. 아담 카드몬은 인간의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몸은 전 우주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물질계는 물론 불가시의 고급계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그를 통해 존재합니다. 아담 카드몬은 열 개의 세피로트로 이루어진 카발라의 생명나무가 의인화된 표상입니다. 결국 아담 카드몬은 생명나무 자체인 것이죠. 생명나무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측 기둥은 남성원리, 좌측 기둥은 여성원리, 중간 기둥은 양성일체로 되어 있습니다. 양성이 공존하는 성질 때문에 아담 카드몬은 종종 여성과 남성이 결합돼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싱클레어는 바로 이 카발라의 아담 카드몬을 명상한 것입니다.


  싱클레어가 말 그대로 꿈속의 애인 모습을 그려놓고 도취에 빠진 것이라면 그 행위의 결과와 내용상 앞뒤가 맞지 않게 됩니다. 그가 야곱처럼 사생결단을 내고 그림에 매달린 것은 이상향의 여성에 대한 사춘기적 동경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신성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자아 실현의 열망 때문인 것입니다.
  싱클레어는 야곱의 투쟁정신으로 깊은 명상에 몰입했고 마침내 그에게 내면의 빛(별로 상징됨)이 비추며 자신의 전생과 현생, 미래를 보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죠. 그는 그림을 태우고 그 재를 먹었는데 이것은 그가 순간적으로 내면의 신성을 체험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이 계속되던 시기에 싱클레어 자신이 또한 다른 사람(동급생 크나우어)에게 외적인 스승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의식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크나우어는 싱클레어를 처음 찾아갔을 때 자신도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있다고 말하며 백마술과 정신집중법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싱클레어에게 정말로 조언을 구한 것은 성적인 문제였죠. 그는 구도의 길을 감에 있어서 금욕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영적인 진일보의 체험을 한 그 날 밤, 싱클레어는 알 수 없는 내적 충동에 이끌려 집밖으로 나옵니다. 그가 어느 건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크나우어가 자살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고뇌의 차원이던 성욕 문제가 크나우어에게 서 급기야 절망의 차원, 즉 자살의 시도로 드러난 것이죠. 
  크나우어는 싱클레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맹목적으로 싱클레어를 따르게 됩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카발라'에 대해 배우고 싶어했고 많은 관련 서적과 글들을 싱클레어에게 가져옵니다. 그의 괴상한 질문과 광적인 탐구심은 싱클레어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싱클레어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진 사람이며 오히려 그가 자신의 스승이요 길인 것처럼 느낍니다.


  바로 소설의 이 부분에서 헤세는 정확히 '카발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8장에서 '카발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구요. 이것은 헤세가 카발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해 줄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카발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부여해 줍니다.
 



  제 7 장. 에바 부인



  싱클레어의 고등학교 시절은 끝나고 이제 대학으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 사이 방학 기간 중에  그는 데미안의 집을 찾아가 봅니다. 이미 이사간 뒤였지만 거기서 그는 데미안의 어머니 사진을 보게됩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멎어버립니다. 거기에 바로 자신의 꿈의 여인이, 어머니이자 애인인 그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죠. 꿈속의 여인이 지상에 살고 있었다니…, 그것도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였다니! 
  대학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길에서 데미안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어엿한 성년이  된 두 사람의 만남. 싱클레어가 말합니다.
 
  "나를 금방 알 수 있었어?"
  "물론이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표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까."
  "표적이라니? 무슨 표적?"
  "우리는 옛날에 그걸 카인의 표적이라 불렀었지. 그것은 우리의 표적이야. 너는 그것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내 친구가 된 거야.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더 뚜렷해졌어."
 
  이 만남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정식 초대를 받게 됩니다. 다음 날 그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에 설레며 찾아갑니다. 놀랍게도 현관에는 그가 그린, 알을 깨고 나오는 황금빛 매의 그림이 걸려있었죠.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부인이 나타납니다.

 
  에바…. 시간도 연령도 없고, 영혼에 넘친 의지만을 담고 있는 얼굴, 검고 신비스러운 눈, 신선하고 성숙한 입, 표적을 지닌 넓고 근엄한 이마, 젊고 달콤한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탄력 있는 금빛 피부, 꽃처럼 아름다운 입술.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그녀는 고향이었고 그녀의 시선은 성취를 의미했고 그녀 곁에 있다는 것은 사랑과 행복이며 실현을 의미했습니다. 그녀가 그에게 어머니가 되든, 애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간에….

  그녀가 매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


  "막스(데미안)가 당신한테서 이 그림을 받았을 때만큼 기뻐한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나도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림을 받았을 때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고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하루는 내 아들이 학교
  에서 돌아와서 말했어요. 이마에 표적이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내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 소년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당신의 길은 평탄치 않았으나 우리는 당신을 믿었
  어요. 당신은 언젠가 방학 때 집에 와서 막스하고 다시 만났지요. 막스가 그때 얘기를 해 주
  었어요. 막스는 내게 말했어요. 지금 싱클레어는 가장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어요. 그는
  무리 속으로 도망가려 하고 있고 술꾼까지 되었지만 끝까지 그러진 못할걸요. 그의 표적
  은 감춰져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태우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네, 바로 그랬어요. 그 뒤 나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마침내는 스승이 내게 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입니다. 부인, 아니 어머니, 나는 그 당시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인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어려운가요?"
  "새로 태어난다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거예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아시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고 물어 보세요!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지는 않았던가!"



  여기서 에바 부인은 신성의 상징입니다. 아브락사스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대우주인, 아담 카드몬의 표상이기도 하죠. 싱클레어가 그녀를 고향, 실현, 행복, 사랑, 목적 등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신의 내면에 거하고 있는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에바 부인의 외모를 황홀할 정도로 지극히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은 솔로몬의 아가(雅歌)에서와 같은 신성 예찬 방식이지요.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입술은 홍색 실같고 네 뺨은 속류 한쪽 같구나' 이런 식이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 인물은 싱클레어, 데미안, 에바 부인, 이 세 사람입니다. 이 삼중 구도 속에는 카발라의 삼중혼 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인간에게 삼중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동물적 생명과 욕망, 감정을 표현하는 네페쉬, 둘째는 선악을 분별하는 이성인 루아흐, 셋째는 영혼의 가장 높은 단계인 순수 영, 네샤마입니다. 네페쉬는 생명나무의 예소드, 루아는 티페레트, 네샤마는 케테르에 각각 상응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구프'라고 하며 말쿠트에 상응하죠. 예소드는 사이킥 의식을, 티페레트는 원인 자아의 의식을, 케테르는 지상아(至上我)의 의식을 각각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이 예소드 차원에 있을 때는 그에게 오감을 넘어선 초감각이 열립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자아 실현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의 의식이 발전하여 티페레트 차원에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아를 실현한 단계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상향의 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케테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케테르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관점에서 볼 때 싱클레어는 네페쉬(예소드)를, 데미안은 루아흐(티페레트)를, 에바 부인은 네샤마(케테르)를 각각 상징합니다. 싱클레어는 이미 보통 인간의 의식 수준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 결과 물질계의 베일을 찢고 영의 세계를 일별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아직 자아실현의 단계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자아, 혼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 위에는 대령(大靈)인 신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에바 부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소설 속에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단순한 모자지간의 정을 넘어선 애정관계처럼 묘사됩니다. 직접적인 서술로가 아니라 '소문에 그렇다'는 식으로 몇 차례 언급되지요. 이것은 인간의 혼과 신성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 속에 굳이 그런 언급-그것도 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식으로-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헤세는 그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세상적인 '어머니-아들' 사이가 아니라 영적인 모자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성과 신성으로 부터 발출된 혼, 이것이 바로 에바 부인과 데미안의 진정한 관계인 것입니다.     


  위의 삼중혼 개념을 통해 볼 때, 우리는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의 삶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염려하며 지켜 보아온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됩니다. 한 인간의 네페쉬는 언제든지 타락의 길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란 늘 그런 유혹 속에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네페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루아흐와 네샤마가 돌보았던 것입니다. 루아흐(데미안)는 직접 가까이서 네페쉬(싱클레어)를 이끌고, 네샤마(에바 부인)는 멀리서 지켜보면서 간접적인 방식(싱클레어의 꿈에 나타나는 방식)으로요.

  싱클레어의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날로 깊어갑니다. 정신적인 사랑과 관능적인 사랑이 뒤섞인 감정이었습니다. 에바 부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런 소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완전
  하고 올바르게 소망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 실현을 마음 속에서 확실할 정도로 바란
  다면 언젠가는 실현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망을 하면서도 후회를 하고 두려움을 느낍
  니다. 그 모든 것은 극복돼야 해요.[...]사랑은 구걸해서는 안돼요. 또 강요해서도 안 되고.
  사랑은 자기 내부에서 확실성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이 됩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 끌려오고
  있어요. 언제든지 당신의 사랑이 나를 이끈다면 나는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빼앗아 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어느 날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타오르자 싱클레어는 이제야 말로 그녀를  끌어당겨 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나의 모든 의식을 집중하여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또 나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내 영혼의 힘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내게로 와야 했고, 그래서 내 포옹을 갈망해야 했고, 나의 입맞춤은 그녀의 성숙한 사랑의
  입술을 끝없이 파헤쳐야만 했다. 나는 손과 발이 싸늘해질 때까지 마음을 긴장시켰다. 나는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잠깐 동안 밝고 차가운 무엇이 나의 내부에 꽉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수정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자아라는 것
  을 알았다.



  무서운 긴장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무엇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에바가 방으로 들어 올 것을 타는 듯한 갈망과 황홀함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온 것은 데미안이었지요. 에바 부인이 보냈던 것이죠. 그 날 저녁 데미안의 집에서 에바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싱클레어, 당신은 오늘 나를 불렀어요. 내가 왜 직접 가지 않았는가를 당신은 아시지요?
  그러나 당신이 이제는 부를 줄 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러니 표적을 가진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부르세요."



  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단순히 친구 어머니와의 부도덕한 연애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과의 교감, 그 황홀경에의 갈망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신비주의에서는 진리 또는 신성을 여신 이시스에 곧잘 비유합니다. 이 여신의 몸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을 볼 수 있는 자는 일정한 영적인 단계에 오른 비전가들뿐이었습니다. 충만한 영성으로 자아를 실현한 자에게 그녀는 베일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가, 신성이 자신의 영광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지요. 그것을 일컬어 '베일 벗은 이시스'라 하는 것입니다. 에바 부인은 여신 이시스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이시스를 사랑하고, 그녀의 몸을 끌어안아 애무하고, 그녀와 하나되고자 갈구하는 싱클레어는 이 세상 모든 구도자들의 표본인 것입니다. 에바 부인이 '나를 빼앗으라'고 한 말은 이시스의 유혹입니다. 내면의 신성이 우리와 하나되고자 우리를 부르는 유혹의 속삭임인 것이죠.


  싱클레어가 입정상태에서 에바 부인(신성)을 부를 때, 그 마지막 순간 느낀 것은 가슴속에 있는 수정 같은 자아였습니다. 가슴은 생명나무의 타페레트에 해당됩니다. 티페레트는 우리의 자아, 혼이 거하는 곳이지요. 그리고 그에게 달려온 것은 에바 부인이 아니라 데미안이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데미안은 우리의 자아, 혼, 티페레트를 의미합니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직접 가지 않았는가를 당신은 아시죠?'  그녀는 왜 직접 오지 않고 아들을 보냈을까요.


  신성, 케테르는 결코 직접 인간에게 현현하지 않습니다. 그는 티페레트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할 뿐입니다. 사도 빌립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케테르이고 예수는 그의 아들, 티페레트입니다. 인간은 티페레트를 통해서만 케테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일단 티페레트의 단계를 성취한다면 케테르와의 합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케테르와 하나된 자는 그 합일의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즉, 그의 육신이 분해돼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원컨대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라고 하자 여호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 육체의 저급한 진동은 어마어마한 신성력의 현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계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인간이 신과 합일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겠죠.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육체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 그대로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인간에게 신성력(케텔의 빛)이 직접 노출되면 그것은 단지 육체의 파괴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제 8 장 종말의 시작



  에바 부인은 작은 공동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싱클레어도 그 일원이 되었음은 물론이지요. 싱클레어의 표현에 따르면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표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깨달은 자, 또는 깨닫고 있는 자들로, 그들의 노력이 지향하는 바는 완전하고 지속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공동체 속에는 여러 형태의 구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카발리스트, 점성술사, 채식주의자, 요가 수행자, 톨스토이나 기타 신흥 종파의 추종자 등등.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탐구했지만 서로 각자의 비밀, 생의 꿈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신에 대한 모색, 새로운 세계상에 대한 모색을 고대 지혜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의무, 운명이라고 느낀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는데 다름 아닌 각자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내면에 살아 있는 자연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었죠.   


  그들은 진지한 탐구의 과정에서 현 시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생겼고 '모든 것의 파괴와 새로운 것의 탄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산책길에서 바람과 구름이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그리며 폭풍을 몰고 오는 것을 봅니다. 데미안은 그것을 낡은 세계가 붕괴하게 될 전조로 해석하지요.



  "싱클레어, 우리의 세계가 꽤 부패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아.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계의
  몰락을 예언할 아무 근거도 되지 않아. 그러나 나는 몇 년 동안 꿈을 꾸었어. 그 꿈으로부터
  나는 낡은 세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고 아득한 예감이지
  만 갈수록 뚜렷해지고 점점 강해졌어. 아직도 나는 나와 관계되는 어떤 끔찍하고 큰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밖에는 알지 못해. 싱클레어! 우리는 우리가 종종 말해왔던 것을 경험
  하게 될 거야! 세계는 새로워지려고 해. 죽음의 냄새가 나. 죽음 없이는 아무 새로운 것도
  오지 않아.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야."   
 
  며칠 뒤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전쟁 소식을 듣게 됩니다. 데미안도 곧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태는 급진전되어 곧 전쟁이 시작되었고 데미안도 싱클레어도 전쟁터로 나가게 되지요.

  여기서 알을 깨고 나오는 새,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오는 새는 물질주의의 낡은 세계가 파괴되고 새로운 영적 세계가 도래함을 나타냅니다. 데미안은 앞으로 새로운 이상, 새로운 인종의 출현이 도래할 것이라고 했고, 그 때 그것을 주도해 나갈 사람들이 표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낡은 세계가 붕괴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 이것은 큰 전쟁이, 아주 큰 전쟁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도 역시 시작에 불과해.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어. 새로운 것은 낡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일일 거야.'

  데미안이 말하고 있는 대 파국, 세계의 몰락은 아마겟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소설이 씌어진 것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데미안이 말한 대 파국이 세계대전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데미안은 아주 큰 전쟁(세계대전)도 대 파국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데미안의 말은 곧 작가 헤세의 말입니다. 헤세처럼 폭넓은 영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마겟돈을 모를 리가 없겠죠. 소설 속에서 파국 뒤에 다가올 새로운 이상, 새로운 인종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계의 몰락은 바로 아마겟돈을 뜻함에 틀림없습니다.     

   
  카발라에는 우주 사이클에 대한 교의가 있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우주 주기를 '세미토트'라고 하며 한 우주사이클을 '세미타'라고 합니다. 우주 사이클은 생명나무의 각 세피라에 의해 지배받게 되는데, 이때 신성계를 구성하는 상위의 세 세피로트는 제외됩니다. 따라서 하위의 일곱 세피로트가 하나의 우주 사이클을 지배하므로 총 일곱 우주 사이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느 세미타에 속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카발리스트들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류가 지금 세피라 게부라(엄격한 정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심판의 세미타에 살고 있다고 하며, 어떤 이는 현 인류가 최후의 세미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론을 취하든 지금 우리가 그다지 좋은 때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듯 합니다.


  성경에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아마겟돈이라는 대 파국을 인류가 맞이할 것이며 그 이후에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상천국, 황금시대를 맞기 위해서는 낡은 세계의 파괴가 불가피합니다.



  어느 날 밤 점령지의 한 농가에서 보초를 서던 싱클레어는 환영을 보게 됩니다.

  구름 속에서는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한 복판에 산처럼 거대하며 반짝이는 별을 머리에 단
  신이, 마치 에바 부인과 같은 모습을 지닌 어떤 강렬한 신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모습 속으로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듯 들어가 사라졌다. 여신은 땅에 몸을 구부
  렸다.  그 여신의 이마 위의 점이 밝은 빛을 발했다. 어떤 꿈이 그 여자를 억누르는 것 같았
  다. 여신은 두 눈을 감았으며 커다란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여신은 비명
  을 질렀다. 그러자 여신의 이마에서 수천 개의 빛나는 별이 쏟아져 나와 아름다운 곡선과
  반원을 그으면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그 중 하나의 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내게 날아와서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한 폭음을 내며, 수천 개의 불꽃
  으로 갈라지면서 나를 끌어 올렸다가는 다시 땅바닥에 내던졌다.
   
  이 환영은 매우 의미 있는 상징성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러나 환영이 후반부에서, 폭탄 파편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싱클레어와 연결돼버렸기 때문에 그 의미 파악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싱클레어가 환영 속에 본 여신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여인입니다.

    태양을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왕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이 여자가 아이를 낳으니 그는 장차 철장(鐵杖)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계12;1-5) 



  싱클레어의 환영 속에 나오는 여신 또한 별을 머리에 달고 있고 해산의 고통을 통해 이마(즉 카인의 표적)에서 수천 개의 별을 낳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별들 중 하나에 맞게 되고요. 계시록에서 여자가 낳은 아이는 그리스도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는 마리아로, 그녀가 낳은 자식은 예수로 볼 수도 있고, 여자는 이시스, 그 자식은 호루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가 되었든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신성으로부터 그리스도 의식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 속에서 그리스도 의식이 꽃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 할 수 있죠. 싱클레어의 환영 속에서는 여신이 한 명의 자식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을 낳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의식이 내면에서 꽃피어난 무수한 사람들, 새로운 인류, 신인종의 탄생을 나타냅니다. 황금시대를 이끌어갈 '수정(水晶)인종'을 말이죠. 그 별들 중의 하나가 싱클레어에게 맞았다는 것은 그에게 자아실현(깨달음)의 때가 다가왔다는 의미의 복선인 것입니다.


  환영 속의 여신은 에바 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바(EVA)는 이브(EVE)에 대한 독일식 표현입니다. 따라서 에바는 바로 이브인 것이죠. 이브와 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2 장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여자와 뱀은 원수가 될 것이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도 원수가 될 것인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죠.
  창세기의 이 내용은 계시록 속에서 계속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데 용이 그것을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에서는 이 용을 옛뱀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용(뱀)이 여자를 괴롭히다가 실패하자 그 여자의 후손들과 대적하려고 한다는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자는 영성, 용(뱀)은 물질성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이브 또는 에바)의 후손은 데미안(카인)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서 에바 부인이 별들(후손)을 낳고 그 중 하나의 별에 싱클레어가 맞음으로써 결국 싱클레어는 에바(여자)의 후손이 되게 되지요. 따라서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동격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환영은 전조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암시인 셈이죠.


  이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새'로 다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은 다양한 차원(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상징으로 가능한 많은 현상들이 설명될 때 그 상징은 뛰어난 상징이라 할 수 있죠. 소설 속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새는 매입니다. 왜 하필 매일까요. 새 중의 왕, 독수리면 더 멋있을 텐데 말이죠. 독수리는 최고신의 심벌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최고신, 제우스의 신조(神鳥)이며 북유럽의 최고신, 오딘의 신조이죠. 이에 비해 매는 호루스의 심벌입니다. 이시스로부터 태어난 호루스는 매의 머리를 한 신입니다. 이시스는 이브(에바) 또는 마리아에 해당하며 호루스는 카인(데미안) 또는 예수에 해당합니다. 결국 호루스, 카인, 예수, 데미안 등은 신성으로부터 강림한 그리스도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죠. 카발라의 생명나무로 볼 때에는 티페레트에 해당됩니다. 환영 속에서 에바의 후손이 된 싱클레어는 바로 그러한 의식의 차원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등장 인물들은 결국 하나의 상징이고, 상징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다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죠.) 



  싱클레어는 파편에 맞아 부상당했고 차에 실려 후방으로 후송됩니다. 그는 내면에서 어떤 힘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현실적으로는 차에 실려 계속 이동하고 있었지만 그 차의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그 힘이었습니다.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인력과의 충돌을 내부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어떤 홀 안의 바닥에 뉘어졌을 때 그는 자기가 부름 받은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봅니다. 옆 침대에 누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싱클레어)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표적을 달고 있었습니다. 바로 데미안이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데미안이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무한히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끊임없이 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그는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마침내 우리의 얼굴은 거의 부딪힐 만큼 가까워졌다.
  "싱클레어!"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표시로 눈짓을 했다.
  "어린 꼬마야"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입은 이제 바로 내 입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크로머를 기억하니?"
  그가 물었다.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대답을 했고 미소도 지었다.
  "이봐, 싱클레어! 내 말 잘 들어! 나는 가야만 해. 너는 언젠가 내가 다시 필요하게 될 거야.
  크로머나 또는 다른 일로 말야. 그 때는 네가 나를 불러도 예전처럼 말을 타거나 기차
  를 타고 그렇게 와줄 수는 없을 거야. 그땐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네 마음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알겠어? 그리고 또 한가지! 에바 부인의 부탁인
  데, 나한테 키스를 해주면서, 만일 싱클레어가 불행하게 되거든 그녀가 해주는 거라고 말하
  고 이 키스를 전해 주라고 했어.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눈을 감았다. 데미안이 피가 흐르는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곧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데미안은 이미 없었다.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들 역시 모두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문을
  열고 내 자신의 내면 세계로 내려가 어두운 거울 위에 운명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 검은 거울 위에 내 자신의 모습이,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였던
  데미안과 꼭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데미안을 통한 에바 부인의 키스
?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글쓰기 및 편집 방법 2 file 다중이 2016.06.12 48524
441 문의드립니다..^^ 김만진 2005.01.12 8950
440 MSN 메신저 이용한 웜 급속 확산 운영자 2005.02.02 9380
439 20년을 이짓했네, 40년 더`… 운영자 2005.02.08 8104
438 [영어회화1] 호텔과 상점에서 운영자 2005.02.12 9198
437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글사랑 2005.02.24 8423
436 한장의 사진-퍼옴 이동진 2005.03.12 8760
435 simpleliving 웹사이트 소개 이동진 2005.05.03 10317
434 전우여, 그 한국인 위안부에 고통준 것 대신 사과해주게` 운영자 2005.08.12 8936
433 CBC Radio 정신대 할머니(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타리 방송안내 이동진 2005.07.19 16144
432 희귀 난치 근육병 환우들의 공동체를 도와주세요 조혜원 2005.08.15 8391
431 思夫曲 운영자 2005.08.19 9003
430 정신대 할머니의 슬픔 운영자 2005.08.21 8879
429 주가 나를 이끄시네 운영자 2005.08.27 9556
428 풍요의 계절, 잘 먹으면 암 예방 운영자 2005.09.01 8521
427 옥스퍼드 영어사전 개정판의 신조어 들여다보니 운영자 2005.09.01 9991
426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 운영자 2005.09.13 8895
425 인터넷언어 갈수록 암호화 운영자 2005.09.30 8934
424 까비르 시인의 깨달음 이동진 2005.10.25 9520
423 한국에서 인사드립니다 김용재 2005.11.01 9212
422 종비련 - 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 종비련 2005.11.26 12291
421 겨울기도 운영자 2005.11.26 9720
420 무엇이 이단인가? 좋은글 2006.03.14 9317
419 너 자신을 알라 기적수업 2006.03.29 9694
418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기적이다 기적수업 2006.04.01 9993
417 단 한가지의 목적 기적수업 2006.04.06 8683
416 “‘민주건달’님들, 살림살이 확 나아지셨습니까?” 운영자 2006.04.21 8713
415 기적수업 홈페이지 구정희 2006.05.01 9497
» 데미안과 함께 떠나는 카발라 여행 구정희 2006.05.08 8549
413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中에서 구정희 2006.05.16 9856
412 어머니 날 구정희 2006.05.16 916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0 Next
/ 20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