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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기 평화와 교회  2/3/2008 

-문동환 목사

캘거리 한인연합교회 주체 [기린갑이-고만네 회고록[, [문익환 평전[ 출판기념 연설)

2008년 2월 3일 오후 2시


우리 문 씨 가문은 한 민족의 평화통일에 미쳐 있었다. 제 아버지가 1985 년 12 월에 운명하시면서 그 마지막 말씀이 “원산은 지났다.  평양은 아직 멀었지?” 였다. 5 년 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통일은 다 됐다.” 이셨다.

제 형이 1989년 정월 초하루에 서울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달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시를 쓰고 미친 듯이 평양으로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껴안아 갖가지 비난을 받으면서 감옥살이를 했었다.

그 후에도 미친 듯이 동분서주 하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목청을 높이다가 1994년 정월에  통일을 위한 글을 쓰신 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문 씨 가문이 이렇게 평화통일에 미친 것은
두만강 북 쪽에 있는 명동이라고 하는 민족애에 불타 있은 한 공동체 때문이다.

20 세기로 들어서는 1990 년 겨울 함경북도에 사는 네 선비의 가문들이 일가친척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비옥한 땅에서 살면서 인재들을 길러 고국의 앞날에 기여하려고 했었다.

두만강에서 6,70리 되는 곳에 정착한 저들은 그 곳 이름을 명동이라고 부르면서 피땀을 흘려 그곳을 개간하는 동시에 서당을 열어서 젊은이들의 교육에 전염을 했었다.

그리던 어느 날 서울의 정부가 제 외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함경도와 간도의 장학사로 임명을 하면서앞으로는 신학문을 하라는 지시가 전달이 되었다.

이 전달을 받은 네 선비는 그들의 서당을 합쳐서 “명동 서숙”을 만들기로 했다. 이 일에 앞장을 서신 분이 만주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김약연 선생이었다. 그러든 차 간도에 가서 교육 사업을 하라고 신민회의 파송을 받은 정재면 선생이 간도로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약연 선생은 그를 만나 명동서숙에서 ‘신교육’을 실시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이 요청에 대하여 정 재명 선생은 조건을 붙였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약연 선생은 이를 쾌히 승낙을 했다.

정재면 선생이 크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정재면 성생은 그 후 여러 좋은 선생들을 불러 모아 신나게 교육을 발전시켰고 네 선비를 위시한 학부모들은 크게 기뻐했었다. 이렇게 신나게 가르치던 전 재명 선생은 일 년 지난 어느 날 짐을 꾸리는 것이 아닌가! 놀란 학부모들을 그에게 물었다. 왜 짐을 싸느냐고.

“학생들에게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기만 해서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도 교인이 되셔야 나라와 민족을 돕는 교육이 됩니다. 부모님들도 예수를 믿으신 다면
남아 있도록 하지요.“ 라고 대답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유학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들은 3 일 동안 구수회의를 한 뒤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민족을 새롭게 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후 학교교육과 교회운동이 이신동체가 되었다. 제 아버지는 이런 교육을 받은 명동중학교의 일회 졸업생이요 제 어머니는 새로 설립이 된 여학교의 일회 졸업생이다. 온 명동의 삶의 모든 국면에 ‘나라와 미족을 위해 살지 않은 삶이란 헛된 것이다.‘ 라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내가 철없는 일곱 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나는 동리에 아주머니들과 같이 성탄절 축하예배를 드리려 교회에 가고 있었다.

그날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길을 헤친다고 선언을 하면서 앞장을 섰었다. 그것이 귀엽다고 생각한 동네 한 아주머니가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었다. 그 물음을 듣자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김약연 목사이었다. 김 목사야 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사신분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 철없는 어린 시절에 한 말이 기어코 나를
목사기 되게 했다. 윤동주, 문익환 등이 다 이런 정신에 세례를 받은 분들이다. 그렇게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8.15 의 해방이란 우리들에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나팔을 불고 춤을 추었다. 제 아버지는 긴 광목에 “동포여. 하나가 되자.!”  라고 쓰셔서 교회 종각에 높이 거시었다. 이조 시절처럼 동족이 다시 갈라지는 것이 걱정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어처구니없이 민족이 외세로 말미암아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셨다. 형이 동분서주하면서 미친 듯이 평화통일을 부르짖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세 분인 돌아가신 6 년 뒤에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 전개되었다. 2000년 6월 15일에 남과 북의 정상들이 모여서 무기들을 다 집어치우고 평화적으로 민족 통일을 이룩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자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은 저 세상에 가신 세 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성명인데. .’ 하고 말이다. 이 6.15 공동성명은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의 도의 선포이다.
이것은 인류사에 있어서 처음 이루어진 평화 선언이다.

이때까지의 평화 선언이란 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은 뒤 강자의 하라는 대로 살라고 하는 평화이다. PAX  ROMANA 가 그런 것이었고 일본이 주장했던 ‘대동아 공영권’ 역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무력대결이란 공멸하는 것,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는 상생의 진리를 깨달아 38 선이 아직 엄연히 존재하고 평화협정도 이루어 지지 않았음에도 불고하고 평화통일을 선언한 것이다.

사실 이 상생의 원리란 21 세기의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삶의 길이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일삼던 2O 세기의 악령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인류를 계속 공포 속으로 몰고 가는 지금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는 상생의 진리가 아지랑이처럼 온 인류에게 퍼져야 21 세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 진리를 우리 민족이 쓰라린 고통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기어이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삶으로 이 상생의 진리를 온 천하에 전해야 한다. 그래야 동북아의 평화가 올 것이요 인류의 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평화를 창출하는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다.

이 평화란 성서를 관통하여 하느님 이룩하시려는 인류 역사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온 인류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의 도를 따라야 한다고 성서는 가르친다. 동시에 그 평화를 이룩하는 “생명의 길”을 명확히 가르쳐 준다.

창세기 12 장 1-3 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은 떠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째로 “너에게 비옥한 땅을 주마.”라고 하신다. 삶의 근거가 되는 땅이 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둘째로 “너에게 번성하는 후손을 주마.” 서로 돕고 섬기는 동족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

셋째로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들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마.” 민족들이 서로 살생 전투를 버리면 땅도 공동체도 보존할 수 없다.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아야 삶의 평화가 이룩된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후예를 통해서 이룩하시려는 것은 민족과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는 새로운 내일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집 없이 두루 방황하는 떠돌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 평화의 주제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에도 반복이 되었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우셨을 때 들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군찬사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 그의 사랑을 받는 이들에겐 평화.

땅에 평화가 있어야 하느님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 경륜이 평화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 장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라. 하느님의 뜻이 이룩된 새 예루살렘이 땅 위에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그 예루살렘의 풍경이란 봄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듯한 온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좌에서 생명 강이 도성 한 가운데를 흘려 내린다. 강 양 옆에는 철마다 열매를 맺는 생명과일 나무가 줄을 지어 섰고 그 나무의 잎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한다.

보좌에서 발하는 빛이 동산을 환히 뒤덮어 아무 설교하는 자가 없어도 모두 하느님의 뜻을 환히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산에 이방나라 임금들도 그들의 영광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한 그들의 영광을 말이다. 그리고 보좌에서 나오는 말씀이 “나는 만물을 나날이 새롭게 한다.” 라는 것이다. 이 평화의 공동체는 날로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창조에 역행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 그 세력은 밤낮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리고 다윗 왕을 위시해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다 이에 넘어가 민중들을 처참한 고난의 골짜기로 몰고 갔다. 평화를 이룩하려면  이 사탄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단(斷)을 내리고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예수님이 물리치신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들은 로마와 손을 잡고 율법과 선전을 오용하면서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모두 사탄의 시험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때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 강변에 나타나서 외쳤다. “회개 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그리자 동서남북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떠돌이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사는 갈릴래아 민중들의 아픔을 나누면서 새 날을 기다리던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다고 보고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가담하려고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광야에 나가서 금식기도하면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탐구하고 계셨다. 그리자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세 가지 조목의 시험을 했다.

첫째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 모두 너처럼 굶주려있는데 물질이 풍부해야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 아닌가? “풍요의 문화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산업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농경시대의 빠알 문화도 풍요지향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물질이 풍부해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이 풍부해도 기득권자들이 다 수탈하고 떠돌이들은 여전히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맨다.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한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 라고 그는 응수했다.

둘째로 사탄은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게 한 뒤 뛰어 내리라고 했다.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이 발에 부닥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를 잘 이용해야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다 이렇게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다윗 왕을 위시한 모든 유대나라 왕들도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다윗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사상 역시 종교를 이용한 그릇된 이념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다.
요즈음 너무나 많은 교회들은 이 시험에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거부했다.

셋째로 사탄은 예수를 높은 산 위에 올라가게 하여 온 천하의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게 한 뒤
“나에게 엎드리어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줄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야 말로 힘의 유혹이다. 그리고 이 유혹이야 말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인류를 패망의 길로 몰고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사탄아 물러나라. 주 여호와 외에 아무도 섬겨서는 아니 된다.“ 사실 이것은 십계명의 제 일 조목에 관계되는 것이다. 십계명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겪었던 열 가지 악의 조목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 첫째 조목이 여호와 외의 아무 신도 섬겨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 조목이 말하는 것은
앞으로 임금님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왕을 위시해서 모든 왕들은 다 자신을 신적인 조재로 주장을 하면서 절대 복종을 강요했었다. 그런 힘을 오용하는 왕들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야훼 이외에 아무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시험들의 핵을 꿰뚫어 보시고 이 모든 것에 단을 내리시었는가? 그것은
악의 세력에 억눌려서 오랜 세월을 고생을 한 떠돌이들의 쓰라린 경험들을 살펴봄으로 악을 악으로 보고 이에 대치되는 삶의 길을 터득한 것이다. 오랜 동안 노예의 생활을 한 노예들이 악의 정체를 직시하고 열 가지 해서 안 되는 것을 깨닫고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평화공동체를 창출한 것도 고난을 통한 의식화 때문이다.

이렇게 사탄의 시험에 단을 내리신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떠돌이들에게 외치셨다.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 라고. 회개란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이 때 까지 가던 길에 대하여 “단”을 내라고 돌아서서 전게되려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가담하라는 것이다.
그 돌아서라는 길이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나누는 것.

“주여! 주여!” 하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서로 용서하면서 사는 것. 힘으로 남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깨우치신 평화의 길이다.

요한복음서 기자가 말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것이 바로 평화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삶으로 나도 사는” 평화의 길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사셨다. 그는 빵을 위시해서 모든 것을 정처 없이 사는 떠돌이들에게 주셨다. 그는 죄인 취급을 받는 저들을 그대로 껴안아 주셨다. 그 아무도 정죄하시지 않았다. 선교 초부터 이방인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말과 삶으로 평화의 길을 선포하자 많은 민중들이 가던 길에서 돌아서서 이 생명의 길에 들어섰다. 집단적으로 단을 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서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우후죽순처럼 탄생을 했다. 그는 이 평화공동체를 보시면서 저들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었다고 선언을 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평화공동체를 이룩하실 뿐만 아니라 탐욕에 사로잡혀 살생의 참극을 이룩하는
악한 제도에 도전하시기도 했다. 갈릴래아에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실 때 이를 모함하는 거룩하다는 무리들을 회칠한 무덤과도 같다고 꾸짖으시던 그는 마침내 그들의 대본산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숙청하시면서 그 곳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선포하신 그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미 잘 아셨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가 이런 단을 내리신 것은 기득권자들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폭로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측하신대로 그는 잔혹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셨고 대사제들은  말성꾸럭이를 처형했다고 자축을 하고 있었으나 사흘이 지나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자 “그를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외쳤던 예루살렘 시민들의 눈이 뜨이어 악을 악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거룩하다는 대사제들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에 3 천 명 식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의 고난이 의식화 교육을 하여
무리들로 악을 악으로 보고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21 세기를 보라.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길인 줄로 알아 미친 듯이 날뛰고
생태계도 파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를 오용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옥을 돌릴 뿐만 아니라
무력을 남용하여 간 곳마다 참극을 연출하고 있다.

땅 위에 평화라곤 찾아 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무엇이 선이요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해야 할 때가 왔다. 이대로 가면 인류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교회는 명확히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물리치신 악령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단을 내리고 돌아서서
서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생명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악의 제도에 도전해야 한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그것이 모두를 깨우치는 길이기에 과감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주이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한다.

http://cafe.daum.net/moontonghwan/AoWA/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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