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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땅 끝까지 전하라 (요: 12:1-8, 출 15: 19-21)

- 문동환 목사
(선한목자장로교회, 3/29/04)

시작하는 말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루어진 일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땅 위에 둘 자리가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 특별히 소중한 한 토막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그렇게도 소중하기에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전하라” 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란 모험을 좋아하는 수제자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화산이 터지는 커다란 기적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한 미천한 여인의 이야기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소중하게 간직했던 옥합을 깨고 값진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붇고 머리털로 닦은 이야기다. 예수님은 이 무언의 행동을 그렇게도 소중히 여겨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이야기가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왜 이 여인의 행동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셨는가?

1. 되어진 일
이 이야기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은 일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가 나드 행유를 예수님의 발에 붇게 된 때란  루살렘에 있는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구수 회의를 하던 음흉한 때이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착한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소외되고 억압된 무리들을 따뜻하게 돌보시자 그들 사이에 아름다운 생명공동체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가 누룩처럼 확산이 되어 갈릴리 민중들 사이에 아름다운 생명운동이 우후 죽순처럼 피어올랐다.
이것을 본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철퇴에라도 얻어맞은 듯 당황해 했다. 예수님의 영향이 확산이 될수록 그들이 선 터전이 허물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이와 같은 기득권자들의 불안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자 그 극에 달했다고 한다. 당황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열어 예수를 처단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사태는 아주 살벌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감수성이 예민한 마리아는 이것을 금방 느꼈다. 이것을 느낀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농 짝 속 깊은 곳에 보관했던 나드 유를 꺼내서 예수님의 발에 붇고 머리털로 닦았다. 틀림없이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예수님의 발을 적셨을 것이다.

이것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여인을 꾸짖었다. “이 것을 팔면 300 데나리온은 받을 것인데 그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을 텐데“ 하고 마리아를 비난했다. 이렇게 말한 저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본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여인을 괴롭히지 말아라. 그 여인은 나의 장례를 위해서 기름을 부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들과 같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너희와 얼마 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3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기름을 낭비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시다니.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라니!“  제자들은 머리를 갸우둥 했을 것이다.


2. 이 이야기의 의미
예수님은 왜 마리아의 행동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셨는가? 유대 전통에 의하면 기름이란 임금님, 예언자, 대사제, 그리고 메시아에게 붇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경우 기름은 머리에 붓는다. 기름을 발에 붓는 경우란 죽은 자를 장례 할 때뿐이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알고 한 행동이다. 그러나 얼른 생각하기에 썩어서 없어질 몸에 기름을 붓는 것 보다 그 것으로 예수님이 늘 돌보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이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육신을 위해서 그런 낭비를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라고 깨우치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값진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는 마리아의 깊은 심정을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왜 마리아의 행동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신 지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게 된 것을 명확히 보았다. 따라서 그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가 고난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도 이것이 저들의 마음에 새겨 지지 않았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애착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말씀이 마이동풍처럼 스쳐 지나고 말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왕위에 앉게 될 때 한 자리 할 것에만 마음을 살잡혀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에는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이 불 보듯이 명확히 보였다. 이것을 보는 마리아의 심정이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 부드러운 여인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돼요!”하고 때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다 주시어 무리들을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신 그가 양떼를 해치려고 으르렁거리는 이리떼와도 같은 무리들을 보시고 그대로 있으실 수가 없으시다 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다. 말려야 쓸 데 없는 것도 그녀는 잘 알았다. 그가 몸을 대고 투쟁하시지 않으면 그 동안 하신 일이 다 수포가 되는 것인데 예수님이 어찌 가시던 길을 돌아설 수가 있을 것인가.

그 뿐이 아니다. 이를  막아서도 아니 된다는 것도 그녀는 잘 알았다. 그가 악의 세력과 투쟁하시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아무 소망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심정을 이렇게 안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이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아니 된다는 것을 안 그녀의 심정이란 이루 더 말할 수 없이 아팠을 것이다. 이 아픈 심정을 그녀는 옥합을 깨는 행동으로 표현했다. 옥합을 깸으로 터지는 듯한 그녀의 심정을 표현했다. 나드 기름을 붇고 머리털로 이를 닦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그녀의 마음을 나타냈다. 이것은 300 데나리온 이라는 금전으로 환산이 될 일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참된 봉헌의 심정이다. 예수님의 삶을 그 밑바닥에서 이해한 사람, 그리고 이에 온 몸으로 응답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3. 예수님을 이해하는 자.
어떻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렇게 깊이에서 이해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온 몸으로 응답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그의 삶과 가르침을 목도하고 귀담아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주님과 같이 그 쓴잔을 마시겠다고 한 세베대의 두 아들도, 주님과 같이 죽겠다고 호언 장담을 한 베드로도 깨닫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 수수꺽기를 푸는 열쇠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무엇이고 마음에 가득 차 있으면 새것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진리를 갈구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욕심과 야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삶의 길을 찾을 수 없다. 자신의 야망, 지위, 명예, 지식등에 사로잡혀 있으면  진리를 깨들을 수 없다. 비워야 한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생명을 살리는 진리만을 갈구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길을 갈구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분토와 같이 버려야 한다. 마리아는 그런 빈 마음의 소유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그 깊이에서 느끼고 그가 하시려는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마리아는 그렇게 자신을 비울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삶의 사회의 밑바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야망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당시 유대 땅의 여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무슨 야망을 가질 수가 있었겠는가. 사제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아무리 율법을 통달한다고 해도 랍비가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민족을 사랑한다고 해도 예열당에 가입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 그리면서도 사회에서는 셈에 들지 못한다. 성전에서도 바깥들에 머물러야 하고 회당에서도 발언권이 없다. 그러기에 아무런 야망도 가질 수가 없다. 그녀가 심중에 바라는 것은 언젠가 자기들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뿐이었다.

이런 허전한 마음을 가진 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의 당당한 인간으로 대해 주신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대해 주신다. 그리고 정성껏 하느님의 나라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 그러기에 그녀는 고마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예수님과 마주 앉아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들을 때처럼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없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구구절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빈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청한 그녀는 예수님의 생각과 느낌을 그 깊이에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을 눈물을 먹으면서 받아드린 것이다. 이런 마리아의 삶의 자세가 너무도 소중해서 예수님은 복음이 전하는 것마다 이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다. 마리아와 같은 빈 마음을 가져야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
어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빈 마음의 소유자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그를 갈망하는 빈 마음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수 없이 많은 우상을 섬기는 만신전과도 같은 것은 아닌가? 끊임 없는 경쟁에 이겨서 내 이름을 날리고 싶은 심정, 밀치고 짓밟고라도 올라가서 한 자리 하려는 심정, 닐아 갈수록 더 호화찬란한 문명의 이기들을 소유해서 신나게 살아보려는 심정,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가드 차서 예수님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닌가? 만일 우리 마음이 이런 우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에수님의 제자들과 다를 것이 아나도 없다.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우상들을 추방하고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 것인가? 물질문명, 경쟁 문화가 우리들의 둘러싸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다. 베다니로 가락 하신다. 거기에 거서 억압받고 수탈을 당하는 수많은 마리아을 만나라고 하신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들을 만나라고 하신다. 그들과 깊이에서 마음을 주고받으면 우리도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마리아의 이야기를 따 끝까지 전하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맺는 이야기

    70 연도에 Basinger 라고 하는 미국 선교사 내와가 한국에 왔다.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려고 찾아 왔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은 군사독재 아래에서 고생하는 무리들이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민중들을 군화로 짓밟고 감옥에 처넣고 고문을 하는 참극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군사독재를 소위 기독교 국이라는 자기의 나라가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본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용기를 잃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을 비우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한국 민중들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땜하는데도 가고 목요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양심수 가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재판정에도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만국 민중들 사이에 하느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것도 느꼈다.
    하로는 제 어머니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Bainger 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매우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미국에 돌아가서 미국이 회개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서 미국을 거듭나게 하는 선교사가 되시오.” 이 말을 들은 Basinger내외는 크게 깨닫고 미국에 돌아가서 미국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나라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면서 저들은 김신묵 여사에게서 파송 받은 선교사로 자처하고 있다. 저들은 한국의 마리아들을 만나 마음을 비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사람답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마라아를 찾아가야 한다.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면서 마음을 비울 수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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