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1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                    눅 15: 11-24, 사 1:18-20
      선한목자장로교회,2/8/04

시작하는 말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그릇된 삶의 자세 때문에 많은 죄를 범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들기 힘든 쓴잔을 마시게 된다. 이런 쓰라린 경험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서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사라지지 않는 아픔과 불안이 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끼친 폐해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하는가. 이것은 한계 있는 우리 인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 책임을 우리가 지어야 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업보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지은 죄의 업보를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 짊어진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하늘을 향해서 지은 죄는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고 한다. 유대교에서도 부모들의 죄 값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믿었다. 나면서 소경이 된 자를 보면서 제자들이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1. 용서하시려는 하느님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용서하시는 아버지로 가르치셨다. 하느님을  깨닫고 가던 길을 돌아서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라고 가르치셨다. 탕자의 비유가 그 좋은 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 결과로 아버지에게서 나누어 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자기 자신도 비참한 삶의 수렁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렇게 된 그가 한 말을 들어 보라. “내가 하느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 일꾼의 하나로라도 받아주십시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꾼의 하나로 받아주어도  그지없이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심정은 다르다. 제 마음대로 하겠다고 나간 아들이 고생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벌써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 아들이 뛰쳐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언젠가는 깨닫고 돌아올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저 먼 언덕길을 바라보고 있은 것이다. 해가 진 뒤에도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깨닫고 돌아와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밤낮으로 기다리신 것이다. 그 아들이 돌아오자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잎인 다음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신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리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를 버린 것이다. 그가 바란 것은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아들이 감히 돌아올 생각을 할 수 있은 것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은연중에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 이해는 예언자들에게 이미 있었다. 이사야 1 장에 표현이 된 하느님의 심정을 보라. 하느님께는 살진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면서도 탐욕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을 거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너희들이 드리는 제사는 구역 기가 난다고, 그런 짓은 집어치우라고 분노하셨다. 그 하느님이 18절에 가서는 음성을 바꾸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깨닫고 돌아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다 하느님을 이렇게 기다리시는 분으로 알았다.

시편 130 편에 보아도 같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있다.
     
“주님께서 죄를 지켜보시고 계시면
  누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우리가 주님을 경외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렇게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탕자와 같은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는 것이다.

    2.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

    돌아온 아들을 보고 그렇게 기뻐한 아버지를 보고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왜 그 아들이 집을 떠날 때 이를 만류하지 않았느냐고. 아들을 타일러서 그 고생을 하지 않게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의 주체성을 막지 않았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그 아들은 반항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성을 살려 자기 욕망대로 살아보고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다음에야 돌아올 것을 아셨다. 동시에 그는 한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승화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이다.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스스로 깨닫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이다. 주체성이 없는 존재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나 조종하는 대로 돌아가는 기계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주적으로 결단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경험을 통해서 참된 삶의 길을 깨닫고 돌아와서 하느님이 하시는 창조의 대업에 동참하도록 경륜하셨다.
    이렇게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하느님은 벌서 아셨다. 인간이 그 자유를 오용해서 하느님의 품을 떠날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또 아셨다. 그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무엇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것인 줄을 깨달아 주체적으로 결단하고 돌아와 생명을 살리는 그의 동역자가 될 것이라고. 그래서 돌아오는 아들을 그렇게 감격스럽게 껴안으신 것이다. 그리고 온 동네를 불러 잔치를 버리신 것이다.

    3. 불만에 찬 형

    이 탕자의 이야기의 형은 조역으로 등장한다. 그는 동생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버리는 것에 화를 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서 불평을 했다. 자기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서 살았는데 자기를 위해서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잡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야속한 이야기다. 어찌 동생이 살어서 돌아 왔는데 이렇게 불평을 한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불평을 하는 형으로 묘사한 것이다. 저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성실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아니꼽게 생각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저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심정은 전연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저들은 동생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할 줄 모르는 냉혈동물과도 같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느님의 심정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비극적인 존재이다.

맺는 말

    우리는 조용히 반성을 해야 한다. 자기 중심주의 때문에 이웃을 해친 일은 없는가?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나 자신 비참한 자리에 떨어진 일은 없는가? 하느님이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닫고 돌아서는 자를 위해서 잔치를 버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결단하고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창조대업에 동참해야 한다.      결코 자기의 종교생활에 도취해서 이웃을 비판하는 바리새파 사람의 과오를 범하지 말자. 심오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체성을 주신 하느님, 깨닫고 돌아설 수 있는 영성을 주신 하느님, 돌아오는 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주시는 하느님에게 감사하면서  기쁜 심정으로 그의 창조대업에 참여하도록 하자.

Title
  1. Theology of wanderers (떠돌이의 신학)

    Date2008.02.12 By운영자 Reply0 Views277
    Read More
  2. 21 세기 평화와 교회-출판기념 특별강연

    Date2008.02.10 By이동진 Reply0 Views238
    Read More
  3. 문동환 목사님의 다음 까페

    Date2006.09.25 By운영자 Reply0 Views215
    Read More
  4. 새로운 계약

    Date2006.07.11 By운영자 Reply0 Views194
    Read More
  5. 生命 나무의 뿌리 세 줄기

    Date2006.07.11 By운영자 Reply0 Views194
    Read More
  6. 생명에 이르는 길

    Date2006.05.05 By운영자 Reply0 Views210
    Read More
  7. 세족자(洗足者)를 기다리는 세상

    Date2006.05.05 By운영자 Reply0 Views164
    Read More
  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Date2006.05.05 By운영자 Reply0 Views208
    Read More
  9. 이 이야기를 땅 끝까지 전하라

    Date2006.05.05 By운영자 Reply0 Views194
    Read More
  10. 예수님의 수난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89
    Read More
  11. 악마의 발악과 신앙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79
    Read More
  12.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82
    Read More
  13. 사람의 원천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68
    Read More
  14. 예수님은 선한 목자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80
    Read More
  15. 악마의 도전을 이기는 신앙

    Date2004.03.14 By문영환 Reply0 Views169
    Read More
  16. 봄맞이 청소

    Date2004.03.14 By 문영환 Reply0 Views176
    Read More
  17. 옛계명과새계명신

    Date2004.01.13 By문영환 Reply0 Views192
    Read More
  18. 내가모든것을새롭게한다

    Date2004.01.08 By문영환 Reply0 Views194
    Read More
  19. 평화의 왕

    Date2003.12.30 By문영환 Reply0 Views188
    Read More
  20. 예수님은 세상의 빛-1

    Date2003.12.30 By문영환 Reply0 Views178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