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2011.02.13 10:35

머리말

조회 수 23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  -성경해석의 문제-        마태복음서 7:6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그것을 발로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7:6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유 중에 돼지는 먹을 것이나 알아보고 반기지, 진주의 값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발로 진주를 짓밟을 것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것이다”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진주를 던졌다고 그 사람을 물어뜯을 돼지는 없습니다. 이런 돼지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그리고 진주는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진주는 당시 바리새교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이해한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해하신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 진리가 진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한 당시 종교인들이 참된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을 물어뜯은 돼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기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된 진리보다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앞세우다 보면 물어뜯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아니고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저들이 하려는 대로 맹종한 일반 군중신도들이 예수님을 물어뜯은 돼지 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헐어야 할 돼지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치심, 성경의 본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돼지우리만도 못한 것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라는 바, 갈망하는 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바라고 갈망하고 기도하는 내용들이 돼지가 바라는 것과 같은 정도라면, 진주를 몰라보는 돼지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종교인들이나 현대 교인들을 격하시키려는 의도에서 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주를 몰라보는 돼지와 같은 우리를 진주의 값을 알아보는 참 사람으로 격상시키시려고 하신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진주를 몰라본 사람들 중에는 제자(유다)도 끼어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처음에는 진주를 몰라보았다가 나중에야 알아보고 참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는 사울도 처음에는 진주를 알아보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알아보고 이름을 바울로 고쳤다고 합니다.

헐어야할 잘못된 앎

예수님은 당시 잘못된 성전을 보시고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라고 하셨습니다. 돼지우리는 헐리고 진주를 알아보는 참 제자들의 공동체가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잘못된 성전종교를 헐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잘못된 앎도 헐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앎을 받아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헐어야 하는데, 이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잘못 알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어두움과 혼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진주 아닌 것을 진주로

그래도 예수님 당시는 예수님이 참 진주를 던져주셨던 것이니, 진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돼지들이 몰라보았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안 계시니, 진주를 직접 던져 주실 분이 안 계십니다. 진주를 뒤늦게라도 알아보았던 제자님들도, 바울 사도님도 지금은 안 계십니다. 곧 우리 앞에 진주를 직접 던져 주셨던 분들이 안 계시고, 성경을 통해서 진주가 우리 앞에 던져지기를 바라는 길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적어 놓은 복음서나, 제자님들이 보고들은 것과 행적과 깨달음을 적어놓은 사도행전이나 서신, 그리고 바울 사도님의 깨달으심과 권고의 말씀들을 적어 놓은 서신들이 담긴 신약성서, 그리고 예수님이 즐겨 읽으시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셨던 구약성경을 통해서 진주가 우리 앞에 던져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다고 진주가 우리 눈에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이해에 오류가 생기는 점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성경이야기를 잘못 이해하면 진주가 아니고 악마의 말이 되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에 대해서는 5.“성경에 악마의 말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진주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진주라고 속여 파는 사람도 간혹 있을 수가 있겠고, 더 심각한 문제는 진주 아닌 것을 진주로 잘못 알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고도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곧 현대 교계의 문제는 진주를 몰라보는 문제라기보다는, 진주 아닌 것을 진주로 믿으라고 하고 또 그렇게 믿어 버리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 신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뜻을 바로 알아보는 일이겠는데, 이 일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마13:44-46). 진주를 알아내고 캐내는 기쁨이 바로 하늘나라 체험입니다.

“보이는”, “보이지 않은” 공동체,
“만져지는”, “바라는” 또는 “바라야 할” 공동체

존경하는 오강남 교수님이 제 설교 집을 내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고마우면서도, “숱한 것이 설교 집인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평소에 생각하던 터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로 “참된 기독공동체가 보이지 않아서 별 의욕이 없군요”라고 했을 때, 오 교수님은 “보이지 않은 공동체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 “보이지 않은 공동체”가 마치 “만져지는 공동체”처럼 느꼈던 즐거움을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에도 이런 체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보이는” 공동체로 남아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는 못했다는 대답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의 현실체험이었습니다. “보이는” 공동체와 “보이지 않은” 공동체에 대해 회의적인 여운을 남겨둔 채, 설교 집은 안 내더라도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찾아보는 일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이는” 공동체와 “보이지 않은” 공동체 문제에 대한 나로서의 분명한 대답은 이 책의 마감원고들을 쓰는 도중(2007년)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곧 성경이야기는 물론 “보이는 공동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 그렇다고 “보이지 않은 공동체”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바라는 공동체” 또는 “바라야 할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는 사실이었습니다. < 제5편 모세 이야기 중 특히 45. “새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와 46. 둘째 돌판 이야기기의 뜻 >

그리고 “참된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국한 된 일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도 다 같이 해당된다고 봅니다. 곧 십계명이 새 공동체를 바라보는 이상일 뿐, 당시 또는 지금의 공동체가 이 이상을 그대로 실현시킨 것은 아닌 것처럼, 다른 종교에서도 그 종교의 이상을 온전히 실현한 공동체가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각각 그 종교의 이상을 실현시켜보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헛말”과 “진주”

물리에 흥미를 가졌던 학생 시절에 성경이야기 해석이“헛말”처럼 들리는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헛말” 뒤에 감춰졌을, 수 천 년 묵은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아보려는 것이 제 신학 공부의 동기였습니다. 성경이야기가 “헛말”처럼 들려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진주를 캐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기 자체가 “헛말”이 아니고, 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헛말”일 것입니다.

목회 중 교육휴가 때 등록해서 공부한 과목들도 주로 성경해석 방법론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내 생의 마지막 데드라인(deadline)이 하나 남아 있을 뿐, 목회생활 때의 많은 데드라인에서 풀려난 지금(2000월 6월 30일 은퇴),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데 도움이 될 대목들을 골라 살펴나가면서 깨달은 바를 정리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참된 공동체 체험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진주와 돼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제 글을 읽고 장범식 박사님이 소감을 적어 보내주셨기에 답장을 써 보냈던 글 중 제 의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만 한 대목을 골라 이 머리말에 첨부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소감까지 써 보내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을 읽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랬다면 제 글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이 진주이며 누가 돼지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저도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제목에 “?”표를 달아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초점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해서 무엇이 진주였고, 어떤 사람들이 돼지였을 지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바울님도 제자님들도 처음에는 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니,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만이 아니고) 저들도 다 돼지들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참된 기독 신도들도 처음에는 다 “돼지들”이었다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그 당시가 아니고,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사회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 중 누가 진주를 바로 알아보는 이들이고, 누가 진주를 몰라보는 이들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제 생각대로 판단하고 싶은데 ‘I hope I am right.’라고 밖에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해가 갑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서 해석학적이면서도 사회학 및 인류학 등 각 전문분야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결론을 제시하려는 이들의 “진주를 알아보고 찾아내려는” 정성은 분명히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로 종교재판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문제에서, 내가 옳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넘어서서, 분명히 옳고 그름이 있었다는 역사를 회상해 보게 될 때, 더욱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듣기 좋은 말들을 진주라고 여겼고 제가 싫어하는 또는 미워하는 사람들을 돼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했는데,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점점 더 ‘Am I wrong? I may be wrong. I must be wrong’할 때가 많아집니다”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1) 종전에 “듣기 좋음”을 기준으로 진주를 정의하고,  “싫어하고 미워함”을 기준으로 돼지를 판단했을 때는 “마음은 편했는데”라고 하셨는데, 이런 경우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나이를 먹을수록 ‘Am I wrong? I may be wrong. I  must be wrong’할 때가 많아집니다”라고 하셨는데, 옳은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듣기 좋은” 말이 진주이기보다는 “듣기 싫은” 말이 진주일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겠고, 미운 사람을 “돼지”라고 하는 것도 객관성을 잃은 판단일 확률이 적지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좋다, 싫다, 밉다”등의 생각이 “옳다, 그르다”라는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판단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좋다, 나쁘다”등 주관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 글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3) 그러나, “무엇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돈할 경우에는  “내가 틀릴 수 있겠는데?”라는 입장을 취할 수가 있고,  필요도 하겠지만, 참 진주를 발견한 경우에는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마13:44-46)고 하신 것과 같은 결단이 요청되는 경지가 있으니까요.

천동설과 지동설을 두고 교권과 과학이 시시비비할 때, 갈릴레오가 목숨을 내걸기까지 한(가진 것을 다 판)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겠는데?”하는 경지는 이미 지난 경우였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겠는데”하는 자세를 당시 교권이 취했었다면 바람직한 일이었겠지요.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이, 돼지 눈에는 돼지가

끝으로 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조 이성계와 왕사가 말놀이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는데, 기억되는 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왕사: “대왕께는 제가 무엇으로 보입니까?”
태조: “돼지로 보이오. 나는 무엇으로 보이오?”
왕사: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태조: “나는 그대를 돼지라 했는데, 어찌 나를 부처라 하는고?”
왕사: “돼지에게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에게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올시다.”

이런 것이라면 누가 “돼지냐?” 하는 문제도 별 것 아니겠습니다만, 예수님이 “돼지”이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을 돼지로 보신 것은 아니었으니, 누가 “진주를 몰라보는 돼지냐?”는 문제는 문제가 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돼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나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말씀으로만” 기억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하지 않은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5:22)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비인부전”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드라마 “허준”에서 유 의원이 친자식이 심의가 되기에는 그 그릇이 모자람을 보고, “옛 성인의 말에 비인부전이라 했거늘, 혈연에 연연해서 모자라는 너에게 의술을 가르친 내가 잘못했다!”고 슬피 후회하며, 의절까지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과거에 입격까지 한 자식을 천하게 보고자 함이 아니요, 의술의 숭고함을 삶으로 실천하시는 그분의 서글픈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사람 아닌 사람(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심정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얻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상고해 보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누가 돼지냐?”하는 질문을 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성경이야기에 들어있는 진주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내고, 어떻게 캐내느냐 하는 질문을 앞세우고 탐구해보자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은 돼지를 찾자는 것이 아니고, 진주를 알아보고 캐내는 사람의 기쁨을 체험해 보기 위함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모아진 마음들이 서로를 움직이는 그런 공동체를 일궈보기 위함입니다.

성경해석의 뜻하지 않은 오류를 막는 길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종교 지도자들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신앙인으로 자처하지만,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바로 깨닫지 못한 저들은 참 사람이 못 되고, 돼지나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바로 깨닫는 일을 진주를 알아보는 일로 비유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의 아닌 과오가 생기는 경우는:

1)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지 않고 눈앞에 나온 부분만 보고 해석하는 경우로, “도중하차”식 해석의 문제라고 해 보았습니다. 요나서이야기(예1)와 성경의 과부 이야기 중 룻기 이야기(예2)를  예로 들고 살펴보겠습니다.

2) 앞뒤 문맥과는 관련 없이 어떤 성경구절을 따로 떼어내서 보고 해석하거나, 또는 앞뒤에 나오는 이야기와 관련 없이,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배경을 모른 채, 어떤 구절이나 어떤 이야기만을 따로 떼어내서 보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식 해석의 문제라고 해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이야기” 중 과부의 헌금이야기(예3)를 예로 들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3)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주장을 위해서 어떤  성경이야기나 구절을 인용하려고 할 경우인데, “귀걸이코걸이”식 해석의 문제라고 해 보았습니다. “남녀창조와 타락이야기”(예4)를 예로 들고 살펴보겠습니다.

4) 성경이야기나 구절을 대할 때, 거룩한 성경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분별없이 대할 때 생기는 경우로, “선입관에 잡힌” 해석의 문제라 하고, 창조이야기에 나오는 “뱀 이야기”(예5)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뜻하지 않은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구절이나 이야기를 해석할 때, 내용 하나하나의 뜻을 철두철미하게 캐어내되, 성경전체사상의 흐름과 관련시켜서 통전적으로 해석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입장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 “통전적”이라는 말은, 예를 들면, “구슬(진주)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과 비슷한 뜻입니다.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곧 1) 구슬이 진짜여야 하고, 2) 구슬을 꿸 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야기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이야기에서 찾아낼 하나하나의 구슬이 참 진주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하되, 그 확인하는 방도가 성경전체의 사상이라는 줄에, 한 걸음 더 나가서(기독 신도들에게는) 예수님의 사상이라는 줄에 꿰어지는지, 꿰어지지 않는지 하나하나 맞춰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배를 만들기 위해서 구슬을 꿰는 줄은 내 주머니에서 나오든 어디서 구해 오든 튼튼하기만 하면 되지만, 성경해석에 있어서 캐어낸 참 진주를 꿰어 보배를 만드는 데 쓰는 줄은 해석자가 자기 입장이라는 주머니에서 꺼낸 줄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야기를 차려진 밥상처럼

하나하나의 성경이야기에 묻혀있을 진주를 알아보고 캐내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를 대할 때 차려진 밥상을 대하듯 함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차림을 보고 사진을 찍어 놓듯이, 기억이나 해 놓아서는(그리고 앵무새처럼 내뱉기나 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밥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을 잘 씹어 먹어야 하듯이, 성경 이야기 내용을 한 가지 한 가지 잘 음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이 몸 안에서 분해과정과 흡수과정까지 거쳐야 하는 것처럼, 성경 이야기도 그대로 삼켜버려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 절차를 돕는 것으로 저는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여려가지 질문을 앞세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를 들여다 볼 때 마다, 그 이야기에 해당되는(그러나 성경 전체의 사상이라는 줄에 연결되는) 질문들을 먼저 나열하고 시작하겠습니다.

Title
  1.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목자들의 교회-

    Date2016.06.21 By이재형 Reply0 Views408
    Read More
  2. 주일 성경본문 해설 2015-10-11 (감사 주일) 오순절 후 20 주일 B

    Date2015.11.13 By이재형 Reply0 Views247
    Read More
  3. 성경본문 해설 2015/10/4 오순절 후 제 19 주일 (B)

    Date2015.11.12 By이재형 Reply0 Views238
    Read More
  4. 주일 성경본문 해설 2015-9-27 오순절 후 제 18 B

    Date2015.11.12 By이재형 Reply0 Views226
    Read More
  5. 주일 성격본문 해설 2015-9-20 오순절 제 17 주일 B

    Date2015.09.18 By이재형 Reply0 Views291
    Read More
  6. 주일 성경 본문 해설 2015-09-13 오순절 후 16주일 B

    Date2015.09.09 By이재형 Reply0 Views284
    Read More
  7. 주일 성경본문 해설 2015-09-06 오순절 후 제15주일 B

    Date2015.08.31 By이재형 Reply0 Views346
    Read More
  8. 선악과의 뜻 (2)

    Date2015.08.31 By이재형 Reply0 Views394
    Read More
  9. 새 원고에 앞서서 (1) - “하나님”? “하느님”? “한님교회”? (1)

    Date2015.08.26 By관리자 Reply0 Views365
    Read More
  10. 성서읽기 1

    Date2015.07.19 By관리자 Reply0 Views326
    Read More
  11. 선악과의 뜻 1

    Date2015.07.19 By관리자 Reply0 Views577
    Read More
  12. 이재형 목사의 성서강좌 재개

    Date2015.07.19 By관리자 Reply0 Views378
    Read More
  13. 머리말

    Date2011.02.13 By이재형 Reply0 Views2382
    Read More
  14. 26. "자식" -이미 늦은 때에-

    Date2011.02.13 By이재형 Reply0 Views2226
    Read More
  15. 43. 노예탈출 성공 후의 역경과 그 극복

    Date2011.02.13 By이재형 Reply0 Views2304
    Read More
  16. 새 공동체 형성의 이상 -노예근성과 주체교육

    Date2011.02.13 By 이재형 Reply0 Views2372
    Read More
  17. 노예의 탈출과 재앙이야기 -모세의 체험(5)

    Date2011.02.13 By이재형 Reply0 Views2416
    Read More
  18. 캐나다연합교회와 캘거리한인연합교회

    Date2010.11.29 By이재형 Reply0 Views5150
    Read More
  19. “떠나라: -혼돈에서 질서로-”

    Date2010.11.27 By이재형 Reply0 Views2550
    Read More
  20. 48. 제자 교회 -이민자와 신앙(교회)생활-

    Date2008.11.07 By이재형 Reply0 Views2443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