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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5:49

선악과의 뜻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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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서4:26-32   사무엘 상서  15:36                                                  

한님나라 ”?  “사탄나라 ”?                  2015/8/31            이재형목사    

 

<2015/6/14 캘거리 한님교회에서 했던 설교문을 기초로해서 보완, 추가한 글입니다.>

<“한님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앞에 실린 원고 하나님”? “하느님”? “한님교회”? (1)를 참고해 주십시오.>

 

<…>이런 괄호 안에 이렇게 작은 글씨로 쓰인 대목은 읽지 마시고, 글씨로 쓰인 설교 본문만을 계속 읽어 가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시고 싶으면, 설교본문을 (몇번) 읽고 다음에, 참고로 읽어 보시고요. >

 

마가복음서 본문을 읽으면서, 지난 2,000년간 기독교의 문제는 씨의 자람 아니고, “무슨 씨를 심어왔는냐?”라는 질문이 먼저 생겼습니다. 한님나라 ?”, “사탄나라 ?” 심어 왔느냐? 라는 질문이 앞섰습니다.

 

<지난 주일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 설교에서선악과 뜻을 가지 법조문으로 풀어 설명했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 뜻을 ( 가지 법조문만이 아니고) 가지 경우(우리 실생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2000년간 에덴동산 이야기가 어떻게 전수되어 왔는지를 보겠습니다. 인류가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은 고사 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게 만들뿐 아니라, 문제를 알송달송 흐리게(혼돈) 만드는 과오를 범해왔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과 이야기가 서양으로 가서 전해온 역사와 문제점

선악과라는 열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당장 먹고싶어 죽을 지경에 빠질 정도랍니다. 이때, 사람 마음은 먹을까 말까 망서리기라도 하지만 (뱀과의 대화), 사람 몸은 당장 달려들어 죽더라도 먹고보자!” 식이어서, 훌쩍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에드몬톤에서 선악과 이야기의 전수역사를 대목까 말했었는데, 오늘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면 이렇습니다.>

잠시 숨었다가 발각되어 심문을 받습니다. 후에 죽습니다. 슬하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이 동생을 죽입니다. 동생을 쳐죽인 이런 아들이라도 있었기에, 그를 통해서 사람족 후손이 지금까지 내려온 거랍니다.

 

그런데 사람 부부가 열매를 먹었을 당시에는, 아직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은 조상이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후, 사인이 밝혀집니다. 부인이 죽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마무도 없었으니, 타살은 아니고, 자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이 성립됩니다. 죽음은 잘못 살아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지 말았어야 독초나, 쥐약 같은 것을 먹었다든지, 몸과 마음에 무리한 스트레스를 주면서 잘못 살아와서, 죽을 병에 걸려 죽었다 든지가, 일종의 자살이라는 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가 죽은 이유는, “먹지 말라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고, 그가 말라는 것을 기어이 먹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야기가 글로 적어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물론 요즘같이 흔한 출판물이 아니고, 손으로 것으로 시작됩니다.>

 

희랍과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사본이 서양으로 들어갑니다. 무렵 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처녀의 몸에 하나님의 영기가 임해서 사람이 태어났고, 어떤 일로 죽임을 당했는데(타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는네 얼마 다시 온다고 기다리고 있다는 니다. <이 이야기에도 기독교가 2000년간 게으르기 짝이 없이 잠꼬대만 해 왔다”,  “반성의 여지가 많다.”는 정도가 아니고, 잘못 흘러오고, 잘못 흘러가고있은 인간고의 역사에 공범자라는 누명을 써서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야기도 글로 적어, 앞에 말한 것과 합본되어, 기독교의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쳤고, 어떤 문제가 생겼나?

기독교는 이야기들을 주로 성전 벽에 그림을 그려서 가르쳤고, 교리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캐톨릭교에서 파생된 모든 기독교의 경전 이해와, 교리의 기본이 됩니다. <물론 경전이 대중화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수천년 그림으로 가르쳐진 내용은, 경전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 중에, 특별한 이야기들과, 둘째 사람에 대한 것들 얼마를 골래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제한되었다는 것보다, 그림들이 이야기의 본뜻까지를 바로 전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문제에 대해 착안한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식으로 2000 전해진 것들이 성경 이야기들의 본뜻과 같을 확율은 극히 낮습니다. 경전을 직접 읽어볼 있게 것은 지금부터 얼마 되지 안했습니다. 그야말로 긴긴 암흑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전연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 본뜻을 찾는 노력도 없이, 교권유지를 위한 교리에 같혀, 수준 이하로 허왕되게, 나돌아 다닌채로 방치 됐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서구에 과학이 급성장하고, 세계 최첨단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서구문명 등에 엎혀서 왔기 때문에, 기독교 이야기의 질도 짜임새 있는 것으로 보고(오해하고), 맹종하는 데서 생긴 폐단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본뜻이 잘못 이해된, 잘못된 씨가, 마구 확산되는 데서 생길 어려움과 혼돈이 것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문제는 경전에 담긴 이야기들이 민간신앙으로 전해온 전통 그대로 이어질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속에 담긴 모순에도 아무런 이론적인 작업도 없이, 교리적인 노력만 있었지, 참된 적인 탐구가 없이, 적당히 넘어가는 동안, 거짓과 위선이 종교체제 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면죄권 판매로 성당건축비를 충당하려 했던 등이겠습니다. 이 면죄권판매 행각은 종교개혁으로 끝났다고 보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금까지도 기독교의 흐름이 성경의 예언자적 종교의 혼을 잃업버리고, “네 죄를 사하노라.”는 식의 성전종교일변도로 치달려온 기독교회 성장역사에, 어 두운 그림자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아무도 부인 못할 실예를 하나 더 든다면, 심지어 우주의 자연질서의 법칙을 말하는 과학자를, 잘못된 교리를 근거로해서, 사형에 처하기도 , 교리의 부당함을 말하는 성직자를 파문하기도 했던 과오 등입니다.

                                                                                                             

이야기가 서구가 아니고 동양으로 들어왔다면?

만일 (기독교)이야기가 서구로 드러가지 않고, 인도문명권이나 중국문명권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을까? 하는 상상을 보게 됩니다. 이야기 안에 내장된 무한한 지혜가, 당시 교권의 절대적인  “”(권력,권세)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교리에 질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짜임새 있고, 멋진 이론체계로 자리잡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인도문화권에서는 이미 있었던 힌두교의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전해온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바탕에서도, 기독교보다 훨신 앞서서, 볼교의 뛰어난 이론체계를 만들어놓았습니다. 현대 과학문명 앞에서도 허구성이 들어나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계에 새로운 발전이 이뤄질수록, 이론체계의 심오함이 증명되고 덧보이게 되어갑니다. (물론 아직도 불교를 빙자한 사기행각 있긴 할 겁니다.)

 

중국문회권에도 고대부터 전해오던 이야기가 인간의 이성적인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 전수됐을 뿐아니라, 사람의 수신 대해서, 허황됨 없는 작품을 완성해냈습니다.

 

문제는, 서구인들이, 과학문명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만을 최고급종교로 오인한데서 생깁니다.

겨우 200여년 전부터 급발전한 현대 서구과확문명의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신, 비서구 사람들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이,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허구까지도, 제대로 갖춰진 이론 체계이고, 유일무이한 진리요, “최고급종교로, 오인하게 되면서, 잘못 변종된 씨가 마구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씨비유의 의도까지도 무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서구에서 선악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고작해야 과일 나무 밑에 벌거벗은 남녀가 있고, 나무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원죄라는 말은  2000 동안 일초도 쉴새없이 앵무새처럼 내뱉아오면서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 없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불행의 원인이무엇인지?  , 경전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못본채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기껏해야 남녀간의 성관계를 유혹으로 생각하게 하는 결과가 고작이었습니다. 성에 대한 죄의식을 심화시켰습니다. 사람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는 성을 부정하는 삶이기나한 것처럼, 극단적인 문화를 창출하는가 하면, 반대로 성개방이란 하나의 극단적인 문화로 치닫는 , 마치 인간의 문제는 성문제 밖에는 없는 것처럼 되어 것이 서구 기독교문화”(?) 풍토였습니다.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마치 남녀 둘만의, 개인적인 문제만을 취급하는 것으로, 본뜻과는 달리, 축소해석을 해버리는 데서 가장 문제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오직 성적존재만으로 보는 오류가  기독교이 잘못된 교리중심적인,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발원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가지의 기본적인 욕망들은 각각, 마치 다른 욕망들은 없고, 어떤 가지 욕망만 있는 처럼, 거의 광적인 행동에 몰입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특정한 가지 어떤 욕망에 목숨 걸고 대결하는 식의 금욕주의는 병적인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 몸이 생겨먹은 대로 모든 기능과 욕구가  균형을 잃지 않게 사는 삶의 지혜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가르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데서 위선이라는 거짓 성의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고, “성의 가려 그늘진 곳에 생기게 마련인 고뇌가 일때마다, “ 죄를 사하노라 마디가 만병통치 약인듯, 그리고 아무 일도 었다 , 역사의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면묜죄권 판매행각이 중세에 끝난 것이 아니고 이런 예식에 숨겨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에서도 특히 성관계만을 다룬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회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싶다마음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할 , 생기는 (~먹고싶다, ~하고싶다, ~갖고싶다, ~보고싶다, ~듣고싶다,등등) 원초적인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기는 ~싶다 마음은 내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싶다 마음은 철두철미 자기 중심적이어서, 한치의 양보도 능력이 없는 것이 본성입니다.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개개인에게 생기는 ~싶다 마음은 철두철미 반사회적입니다. < 물론 개개인의 “~싶다 마음이,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집단(부족이나 국가) “~싶다 커지는 경우가 생기지만,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보면, 여전히 적대관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19세기 식민주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국가간의 적대관계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많이 다스려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의, 예를 들면, 특히 조선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강국이 각각 한치도 양보할 없어하는 개의 “~싶다 역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 지구상에서 먹구름장을 띄우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산다는 말은 사회적인 관계를 바로 맺고 산다는 말인데, ~싶다 개인주의적인 마음이 에덴동산에서(한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치 아주 어린 애기들이 처음에 하는 모든 행동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애기는 자기의 말고, 다른 입도 있다는 사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커가면서야, 예를 들면, 무엇을 먹거나 , 엄마에게도 먹여주는 행동을 재미있어 알게 됩니다.

 

장난감을 때도, 자기에게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같이 다른 아이에게도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숫한 울음과 싸움을 거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익히게 되는, 길고도 괴로운 (여정)입니다.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꿔지는 겉과 같은 일대 혁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님도,“어려서는 어린애 짓을 하고, 성장해서는 어린애 짓을 버린다, 젖을 먹다가 커서는 굳은 음식을 먹는다.” 하신 것입니다. 이유식이 당연한 길이지만, 태어날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한님나라는거듭나야만 체험할 있다고 것입니다.   

      

개개인이 품는 ~ 싶다가 우리 ~ 싶다 넓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가 -> 우리로, 우리가 -> 우리로, 우리가 -> 우리로 넓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사는 나라와 살지 못하는 나라들 사이에 예외없이 사실로 증명되는 가지가 있습니다. 사는 나라는 밖으로 나가서, 도적질해다가 먹고 해적국가들입니다. 살지 못하는 나라들은 도적질 당한 나라들입니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니고, 안에서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밖에서 들어온 도적에게 몽땅 빼았긴 나라들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마다 100가마의 쌀이 있었다고 합시다. 고정된 100 가마의 쌀을 두고, 지배계층이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파싸움을 합니다. 반면, 해적국가들은 안에 있는 100 가마의 쌀을 그대로 두고,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힘을 합해서 밖을로 나가서, 해적노릇을 해서, 1,000가마의 쌀을 갖다 놓고, 푸짐하게 나눠 먹었던 것입니다. 서구의 모든 나라들이 이런 해적나라들이었습니다. 아세아에서는 나라가 이렇게 했습니다. 어느 나라지요?  일본이지요. 원자탄에 혼줄이 터지고서도, 아직도 해적근성을 못버렸는지 없는 일입니다. 없느냐? 하면, 예를  들어 미국이란 나라가 내게 유익하면 (또는 ~하고싶으면), 인근 다른 나라에 해가 가도 (~하고 싶어 안해도) 무엇이든 해낸다.” 식으로 막강한 힘을 앞세운다고 가정해보면, 일본이 해적의 길을 확률이 높아지니까요도적질로 살아온 저들도 처음에는 안에서 파싸움도 하다가, 통일을 놓고는, 밖으로 나가 도적질 하노라고 파싸움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다른 점이지요. 물론 해적국가들이 잘한 짓은 없습니다. 저들은 같이 자기들의 우리 절대적인 우리 착각한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우리에게 (국가주의) 유익하면, 다른 우리에게 해로워도 치우는 도적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헌법 2조를 (설명은 다음에) 어기면서도 기독교 국가인 것으로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개인과 개인간의 개인적인 문제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바로 해결되어야만 지상낙원(에덴동산)에서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2,000년간, 특히 중세 서구 미술 등에서도, 선악과를 주로 남녀의 성관계를 뜻하는 것만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원죄론이라는 <여기에 구원론이 따르고> 교리를 만들게 됩니다. 한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여라라고(1:28) 했다는 말과 모순되는 해석임을 알면서도 그리 건지, 모르고 그리한 건지,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심지어는 예를 들면, 자식을 낳기 위한 목적에서만 부부간의 성생활도 한님의 뜻이지, 행복감이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되면, 원죄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음식을 먹되 몸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으로만 먹어야지, 음식을 먹으며 맛을 즐기거나  행복감을 가지면 죄가 된다는 식인 것입니다. 한님도 모든 창조 과정을 마칠 때마다, “좋았다( 1:4,10,12,18,21,25,31) 하셨다는데, 사람이 좋다 감정을 가지면 원죄에 이어진다는 식의 교리는 온전한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병적인 결백증 환자에게서 나온 이론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에덴동산 선악과 이야기는 성경 처음 나오는 성경의 입니다. 이것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면, 성경전체를 바로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겨에 같은 창조에 관해서 서로 조금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앞에 나옵니다.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앞에 나오고, 인간을 창조해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다는 이아기가 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야기가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2장을 잘못 배워버리면 성경의 처음 기초에서 부터 잘못 출발한 격이 됩니다. 출발점에서 방향이 아주 조끔 틀려도, 틀린 각도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나가면, 도착지점은 지구의 반대 지점이 되는 곳과 같은 결과가 생기는 이 아닙니까?> 

 

잘못된 씨가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씨를 이어받은 교회전통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나큰 비극의 진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해결을 위한 집단적 노력이 요청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고, 진단도 하지 못할 아니라, 문제를 알송달송하게 하는(혼돈) 사탄의 씨가 되어버리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들간의 사적인 성관계와 집단간의 공적인 관계에서 원죄는 어디에?

예를 들면, 부부간이나, 개인과 개인 간의 사적인 어떤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불행을 좌우하는 경우와, 어떤 공적이며 (국가간이라든가 ), 집단적인, 관계가 인류의 -불행을 좌우하는 경우, 어느 것이 심각한 비극을 불러왔을까요?

              

라덴은 부인 다섯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개인적인 성관계가 세계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 것도 알려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집단이 여객기로 뉴욕 고층건물을 불사르기로 결정한 일은 아직도 세계에 불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 클린톤 대통령이 여자관계로 물의가 있었지요? 그의 이런 개인적인 이성관계가, 세계 인류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지 알려진 바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공화당 부쉬 정부가 이락전쟁을 이르키기로 결정은, 그가 물러난 지금도, 인류에게 크나큰 비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녀간 개인적인 성관계가 유혹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에게 (배우자를 비롯해서 직계 가족들과 관련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로운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범위가 사적인 것으로 제한됩니다. 문제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성간의 성을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보는 경향에 성경 이야기를 보는 시각도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 문제가 아닌 것처럼 봐버리는 데서 기독교가 이빨바진 호랑이처럼 됐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최고 덕목이 금욕주의적인 동전녀 찬양과, 독신주의 찬양인 것처럼 외곡된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에덴동산 이야기의 본뜻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개인적인 성관계에서만이 아니고, 인간 의모든 사회적인 관계에서, “내게 이롭다고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로워도 ( 좋아도) 밀고 나가는 강자의 횡포를 막지못하는 일류 사회는 절대로 에덴동산의 행복을 체험할 없다.” 것이 이 성경 이야기의 본뜻입니다.

 

최근에 어떤 여집사님이 사탄이 한님보다 언제나 강한 것처럼 보여요라고 말한(질문한?) 일이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될 경우가 많은 것을 체험합니다. 사실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도 사탄이 말빨이 하나님의 말빨 보다 세었고, 에덴동산 이야기의 해석에서도 지난 2000년간 사탄이 것을 증명해 줍니다.  

 

<서구 제국주의시대 말기에 우리에게 들어온 기독교에 대해서 내가 처음 가져본 질문은 “2000년간 내려온 거짓말 뒤에 도대채 무엇이 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이 바른 질문이었다는 생각했고, 신학을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미 있게 배운것 자체도 "거짓말" 보자기를 온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2015년도 절반을 살면서야 무엇이 거짓말의 보자기인지를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면서, 마음 졌습니다.>

 

먹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먹으라, 그러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 말은, 사람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 아닌 다른) “”, 둘을   우리 (“으로)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실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2)

 

<여기다른 사람 어울려 라고 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라고 것은 아주 중요한 뜻이 있어서입니다. 다른 사람 어울려라는 말은 오늘의 본문(사무엘 ) 같이 백성들이 이상향으로 잘못 생각하는 왕국 맞는 말이고, 나라에는( 아닌, 사람인, 다른) 함께 어울려우리를(한님나라) 이룬다고 말해야 맞는 말이 됩니다. 왕국에서는 왕만이 중심에 (가장 높고 강한 왕좌) 있고, 다른 사람 그의 지배를 받고, 그만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는 조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왕이 없는 (왕좌가 없는) 님나라에서는 백성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어서, 아무 사람도 섬기지 않고, 아무 사람의 지배도 받지않는 조직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인 ,   중심에 자리잡은 입장에서 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도 중심 자리가 아닌 동등한 자리에 있게 되는 하나의 됩니다. 그래서 나라 조직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 아니고, 함께 어울려라는 말을 써야 것입니다. “ 라는 표현도, 앞의 중심에 앉은 잎장에거 변두리 자리로 몰아낸 표현입니다.>

 

여기짝으로창조하셨다는 말은 생욱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됨을(1:18) 말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많아져서 사회를 이루게 됨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이 이상적인 사회를 상징합니다.   이상적인 나라를 뜻하기도 하고, 한님의 나라를 뜻하기도 합니다. 물론 한님 나라는 죽은 다음이 아니고, 땅에서 사람이 체험하기를 바라는 이상을 뜻합니다.

 

한님께서 이미 창조해 놓은 이상향과 사람이 할일

오늘 본문 사무엘 상서는 8장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 배성들이 다른 나라들 처럼 왕국을 창조하고 싶다고 해서, 한님도 어쩔 없이 내버려 다음에 생기는 문재들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이상향(에덴동산) 한님 이미 창조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왕국을 창조한다”, “공산주의 지상천국을 창조한다”, “민주공화국을 창조한다 , 어떤 조직체를, “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으로 선전하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한님 이미 창조해 놓은 에덴동산에서, 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배-피지배, 또는 착취-피착취 등과 같은 관계가 아닌,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어떤 제도에서도, 강자() 자기()에게 유익하면(좋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라도(안좋아도)  밀고 나갈 위험성이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있는 말일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덴을 떠나 지옥까지 시간 여유라도 있고, 그래도 두고 떠나온 에덴동산이 어딘가에 아직도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에덴동산은 그런 아닙니다. 잘못된 관계가 되면, 행복을 떠나서 불행이 있는 (지옥?)으로, 차를 타고 가듯, 가는 아닙니다. 잘못 되는 순간 행복은 살아지고, 불행이 그 자리를 당당 채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말이 서구 독교 교리의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당장 사람 안으로 들어와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일은 어떤 제도를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고, 체채나 정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권유지되는 경우, 체제나 정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끊임없이 평가하고,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것이 사람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참된 한님 교회만년 야당이라야 합니다.

 

< 이하에 삽입된 글들,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가능성으로 남은 하느님의 형상(흔적)”, “창조능력의 부족이 불행의 원인이 아님 기도?”, “불행의 원인은 판단능력의 한계 참된 기도?”, “하지 않음(말라)에서행복을” …등은 설교에 없던 것인데, 여기 삽입합니다. 7년전에 출판한 떠나라 (P.182-19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루기는 했었지만는, 특히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당시에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알게 되어씁니다.

 

(1) 성경은 인간불행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2) “인간불행에서 인간행복을 되찾을 있는 길은 무엇이라고? ” 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는 일에, “선악과 이야기 대한 서구의 잘못된 해석이 도움을 주지 못할 아니라, 결정적으로 방해를 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 ,보완해야 할 점들을 여기에 추가ㅏㅂ니다.>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인간의 창조능력에 대해서는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사회(나라) 창조하는 일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한님이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한님께서 사람을 한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1:26-27) 말도 있기 때문에,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에는 오류가 끼어들기 쉽습니다.

<이런 오류는 창세기 2-3 내용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 1장만을 두고 해석할 생기기 쉬운 잘못입니다.>

 

그러나 차창기 2장과 3장에서 인간은 님의 형상을 상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떠나라”187-189) 다음과 같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이해가 틀리다는 것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창조했느냐? 질문을 해보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한님의 뜻에 어긋나는 왕국도 창조할 수가 있고, 사탄의 나라도 창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사람이 한님의 형상이 아니고, 사탄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야 것입니다. 이것은 한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현실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인간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인간이 질서를 창조한다고 할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완전한 질서가 아니고, 혼돈이 묻어난, 불완전한 질서가 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2차대전이 끝나면서 한반도 남반부에 미군정이 질서를 창조한다고 했는데, 과정에서 일제시대 공직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친일파 인물들이 판을 다시 잡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조선민족의 입장에서보면, 질서가 아니고, 지난 일제시대의 혼돈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새로운 강대국들의 냉전에 휩싸이는 큰더 혼돈으로 빠져들어갔덧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창조한다는 질서 질서의 혜택을 입는 자의 입장에서만 질서입니다. 그러나 피해에게는 혼돈 것입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소위 대일본제국 질서를 강행했었습니다. 그때의 질서 일본민족에게는 유익한 것이었으나, 조선민족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이 말살되는 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창조한다는 질서는 사람에게는 질서로 생각되지만, 다르 사람에게는 혼돈인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백성이 왕국을 창조하려고 했을 ,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까닭이 여기 있는 니다. 왕국질서는 지배와 피지배 체제, 착취와 피착취의 체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질서가 아니고 혼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흔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 쉽습니다. “간자체가 불완정한 존재이고, 인간 사회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 (1) “인간은 혼돈을 온전히 없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