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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자(洗足者)를 기다리는 세상 (요 13:1-10, 출 32: 30-34)
     
-문동환 목사 (선한목자장록회, 4/18/04)

시작하는 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 상식으로는 받기 어려운 일들을 명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십자가를 지라. 밀 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라.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나보다 부모나 처자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등등이 그런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닥쳐오는 위기를 바라보면서 우리더라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어라” 라고 명령하신다. 이것 역시 인간 상식으로는 수용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내려가서 더러운 다른 사람의 발을 씻을 수가 있을 것인가. 당시의 유대인들의 발이란 몹시 더러웠다. 저들은 먼지가 많은 길을 쌘달을 신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 더러운 발을 씻으라고 말씀하신다. 얼른 보기에는 이것은 억지 가르침 같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가르침이란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자리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발을 씻는 행사가 요한 복음서를 쓴 기자에게 있어선 성만찬에 맞먹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왜 이 가르침이 그렇게 소중한가?

1. 자기 위주의 삶이란 저주를 초래한다.

그것은 자기 위주의 삶이란 인류에게 저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보나 이와 같은 그릇된 삶의 자세가 보편화되어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그렇게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여러 해 동안 같이 지나면서 깨우쳐주신 제자들까지도 서로 다윗 왕국에서 윗자리에 앉겠다고 시기 질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삶의 자세는 어떻게든지 극복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로 자기를 과장한다. 자기야말로 누구보다도 윗자리에 앉을 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의 약점들을 숨기고 장점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내적인 분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 분열이 각가지 비극을 초래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라 스스로 거룩한 척 외식을 한다. 실제로는 저들은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연회장에 가서도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이런 허위에 가득 찬 삶이란 간 곳마다 죽음을 산출한다.

이렇게 자신을 높이려 하는 자들은 동시에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 그들의 약점을 찾아서 헛듣고 비방을 한다. 상대방의 몰락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세로 사는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의 약점만이 눈에 뜨이지 장점은 보이지 안는다. 그래서 비방하고 헛듣는다. 그들에게 치명상을 주려고 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의 자세가 그랬다. 자기들처럼 율법의 조목들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을 자라고 선언한다. 가난해도 죄인이요, 병들어도 저주받을 사람이다. 그래서 모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자기들만이 거룩한 척 으스댄다.

이렇게 되면 인류 공동체는 산산조각이 나 이 세상은 산 지옥이 된다. 간 곳마다 시기와 질투로 찢어지고 약육강식의 비극이 일어난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영적으로 기아의 수렁에서 허덕이게 된다.

사람들의 삶이란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에서만 생기를 얻는 법이다. 다르더라도 서로 이해로 화합이 되고 잘못을 저질렀다해도 서로 용서할 때 우리들의 삶에는 생기가 돈다. 자기만 제일이라고 하고 남을 깎아 내릴 때에는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법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어디가나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다윗 왕국의 윗자리에 앉겠다고 자라다툼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 날 주님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으로 이런 그릇된 삶의 자세에 대하여 재자들을 해방시키려 했다.

2. 발을 씻는 마음

어떻게 우리들도 이런 그릇된 삶의 자세를 떨치고 일어나 주님처럼 겉옷을 벗고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을 수 있을 것인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버릴 수가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스승이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그 마음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아파하는 마음이다. 그는 자기만 제일이라고 하는 자들 밑에 억눌려서 신음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셨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진 무리들을 보시면서 괴로워 하셨다. 거듭 깨우쳐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 자기들의 터전이 흔들리자 미친 듯이 예수를 죽이려는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껴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희 자녀들을 품에 안으려고 했더냐!“ 
하고 한탄하셨다. 이런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어야 겉옷을 벗고 내려가서 이웃의 발을 씻게 된다.

사실 이 아파하시는 마음이란 하느님의 마음이시기도 하다. 시내 산 떨기나무에 타오른 불꽃 사이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심정이 그런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애굽 발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는 것을 보시고 그는 아파 견딜 수가 없으셔서 시내 산에 하강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와 대결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모세도 그 하느님의 심정을 체 받았다. 그가 산상에 올라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는 동안 아직 철들지 않은 이스라엘이 아론을 설득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을 본 모세는 하느님에게 애절하게 호소했다. 이 백성을 멸절할 것이라면 차라리 자기를 하느님의 생명 책에서 지워달라고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애절한 심정을 볼 수 있다. 그 후 예언자라고 하는 예언자들은 다 이와 같은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멸망의 길로 치닫는 무리들을 보고 저들은 아파해 마지않았다.
   
둘째로 이런 아파하는 마음이란 생명을 지상의 가치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심정에서 태어난다. 생명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던지게 된다. 이것이 독생자를 보내신 하느님의 심정이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심정이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게 하려 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모른다. 생명 불감증에 걸렸다. 권세욕과 소유욕에 가로막혀서 생명을 느끼지 못한다. 우는 자와 같이 울지도 못하고 웃는 자와 같이 웃지도 못한다. 자기의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상처받아 우는 자들의 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의 마음은 차디찬 돌과도 같다.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나 광주 민주인사들을 짓밟은 군사 독재는 더 말할 것이 없고 나날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도 형제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도 아무 느낌도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해결의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도 생명의 소중한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 아끼는 삶을 살수가 있을까? 우리 주변에 있는 수억을 헤아리는 무리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을 보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따뜻한 봄의 훈풍이 불어와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생명이 피어오르는 나비가 춤을 추는 봄 동산을 경험해야 한다. 누군가가 와서 우리를 따뜻하게 껴안아 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 꽁꽁 얼어붙었던 우리들의 마음이 살같이 녹아  우리들의 심정에서도 생명의 샘이 솟아오른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따뜻한 사랑의 훈풍으로 봄 동산을 이룩해 주신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늘나라 잔치를 맛보게 하셨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을 경험해야 나누고 섬기고 용서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래도 이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리고 많은 우리도 그 범주에 속한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인내력을 가지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생명 공동체의 전위대로 삼으셨다.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맙기 그지없다.

3. 세족자(洗足者)를 기다리는 세상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 보자. 21 세기를 맞이하는 오늘의 세계는 어떠한가?  서로 위하고 아끼는 평화의 세계인가? 우리들의 가정은 어떠한가?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우리 교포 사회는 어떠한가? 나라와 나라 사이는 어떠한가? 사랑의 훈풍에 둘러싸인 봄 동산인가?  아니면 자기만 제일이라고 갈가리 찢어진 것은 아닌가? 이 세상 역시 것 옷을 벗고 발을 씻어 주시는 사랑의 주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한국 사회와 정치를 보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동향을 보라. 그 어디에서나 생명을 보듭는 봄바람을 느끼기 힘들다. 간 곳마다 자기 위주의 경쟁을 일삼아 생명을 죽이는 살생극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참극이란  정당과 정당, 나라와 나라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되어 있다. 평화의 주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자리다툼이 있고 네 파 내 파가 있어서 서글픈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까닭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만 앞장세워 이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누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 위주의 사고에 사로잡혀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이 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것 옷을 벗고 내려와서 형제의 발을 씻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도 내려와 형제의 발을 씻어야 한다. 이 세상은 이런 세족자를 기다린다.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살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경험한 자들이다. 이제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한 일이 있는가? 거저 주시는 그의 은총으로 새로 남을 경험한 일이 있는가? 그래서 하느님에게 감사찬송을 드린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겉옷을 벗고 형제의 발을 씻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 내 가정을 위해서, 내 교회를 위해서,내 나라, 아니 온 인류를 위해서 발을 씻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 매세추세츠 주에 에릴리 띠킨스라고 하는 유명한 여류시인이 있었다.  그녀는 생명과 호흡하는 것을 즐겨 비가 올 때마다 숲 속을 산책했다고 한다. 그리면서 느끼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그녀는 생명과 접하는 그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를 썼을 뿐

이를 세상에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생시에 세상에 알려진 시란 두 편 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다.

    내가 한 사람의 심장 찢기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면
    내 인생은 헛된 것이 아니리.
    내가 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아픔을 식혀줄 수 있다면
    기절한 울새를 도와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내 인생 헛된 것 아니라.      (홍승표 목사의 글에서)
             
에밀리 띠긴스는 하느님의 심정과 통한 축복된 여인이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형제의 발을 씻으면서 산 보람찬 삶을 즐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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