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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노예의 탈출과 재앙이야기
  -모세의 체험(5)-
출 3:11-12, 18-19, 4:1-15, 21,          5:4-9, 21-23, 6:1-13,              7:1-12:50, 14:1-31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

1. 젊었을 때 혈기로 이집트인 노동 감독관을 살해했던 일이 말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어렸을 때 여인들의 힘으로 살아남았던 일은 그의 말년(그의 신앙과 노예해방운동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 성경이야기는 노예해방운동의 시작을 언제로 보고 있을까? 모세가 말년에 노예해방운동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은 때? 폭군의 노예백성 말살정책을 어긴 여인들의 힘으로 모세가 살아남은 일에서부터?
4. 노예해방운동의 사명을 받은 모세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어떻게 극복? 어려움들 중 끝가지 지속된 것은?
5. 노예해방운동이 정치적인 저항운동 또는 개혁운동과  비슷한 점은? 다른 점은?
6. 노예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모세가 반복해서 왕에게 한 말은? 이 말의 뜻은?
7. 이런 요구에 대해 왕의 응답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끝까지 변하지 않은 점은? 
8. 왕이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모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9. 왕의 거절에 대응해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셨다는데, 이 재앙들(심판)의 목적은? 결과는?
10. 탈출직후 뒤로는 이집트군대가 추격해오고 물이 앞길을 가로막았을 때, 백성들이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출14:11-12)라고 원망했다는데, 모세가 백성들의 원망을 옳은 판단으로 인정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때 인도자인 모세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룬 문제는?
11.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잘못된 현실을 떠나야 한다고 했는데, 떠난 다음 반드시 만나게 마련인 역경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을까?
12. 역경에 직면했을 때 생기는 두려움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과 관련시켜볼 때,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출14:22)는 말은 어떤 뜻이 있을까?
13. 재앙을 일으킨 것은 모세의 지팡이? 지팡이에 마술  적인 힘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지팡이로 폭군을 단번에 쳐 없애버릴 수가 있었겠는데 지팡이의 뜻은?
14. 이 재앙들이 그 때만 있었을까? 그 이전에도, 그 후에도,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일일까?
15. 노예백성이 탈출 할 때까지 모세가 지속적으로 한 일은? 탈출할 때 한 일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은?
16. “나는 그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내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하겠다”(출4:21), “그와 그 신하들이 고집을 부리게 한 것은 나다”(출10:1),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출14:4) 등, 왕이 끝까지 거절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런 말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까?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라는 것? 아니면?
17. 이차대전이야기에서 히틀러를 폭군 바로왕의 자리에 둘 수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모세의 위치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18. 이락 전쟁이야기는 누구를 “폭군”의 자리에 두고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폭군”이 이슬처럼 사라졌는데 그 결과는? 이락전쟁에서 모세의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19. 모세가 취한 노예해방운동 이야기와 미국의 흑인노예해방 이야기가 비슷할까? 전연 다를까?
20. 노예해방운동에 모세가 취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식이 적용되는 경우로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
21. 폭력이 역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또는 진리)이 역사를 주관하는 것(주관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폭력을 써도 될까?

노예탈출까지의 모세의 경험

출애굽기 1장에서 14장까지의 이야기는 히브리노예들이 집단적으로 당하고 있는 억압과 착취에서의 해방, 곧 노예제도에서의 해방이야기이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폭력에 어떤 힘으로 대항하느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아니면 어떤 힘으로 대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38. 군주의 폭력과 여인들의 힘> 모세의 출생과 생존이야기는 한갓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노예탈출이야기의 시작이면서, 모세가 노예해방운동을 어떤 힘으로 인도해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인지를 암시해주는 이야기라고 헸습니다. 모세는 이에 대한 해답을 그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했습니다. 그의 경험들로는,

(1) 사내아이를 살해하라는 군주의 폭력에서 여인들의 힘에 의해 살아남은 일,
(2) 이집트에서 살인하고 도피하게 된 경험,
(3) 도피 후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한 광야생활 체험, 그리고
(4) 광야에서 떨기 가운데 이는 불꽃으로 나타난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되는 체험, 이렇게 네 가지가 중요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5) 노예백성이 탈출해서 “자유롭게” 될 때까지의 경험입니다.

이 중 두 번째 경험은 그가 노동현장에서 약자인 히브리 노예를 때리는 강자 이집트인 감독을 쳐 죽인 일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정의감에서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결국 살인범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이 되어 고독과 무력을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함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 아닌 것을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나머지 체험들은 폭력이 아닌 다른 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험들입니다.

되살아난 첫 경험과 노예해방운동

이 중 첫째 사건은 어린 아기로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 이러난 일인데, 이것도 그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기로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을 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생명이 자신의 힘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지켜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성인이 되어 많은 것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생명은 자기가 아닌 보다 더 큰 힘(하나님)의 보살핌에 의해 지켜졌다는 사실을 그는 인생을 다 살 무렵에 가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누군가(하나님)를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가 할 일을 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마음의 평안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생명 유지뿐 아니라, 생명의 전개과정 자체도 자기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눈, 코, 입 등에서부터 정신적인 기능에서도 자기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유전인자대로 되는 것처럼, 그의 사명이 성취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다는 것을 체험하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하나님이 사셨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철이 들어서야 전해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어렸을 때의 사건은 한갓 과거의 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고, 그의 생명과 함께 있어오다가, 광야생활 이후 그의 말년까지의 모든 체험들 속에 함께 묻혀 되살아나는 체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모르고 일어났던 체험과 말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이 다르면서도 하나로 얽혀졌다고 하겠습니다. 왕의 폭력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여인들의 저항의 결과로 살아남은 자기 목숨자체가 노예해방운동이라는 사실을 80에 이를 무렵에야 깨달았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의 방법과 힘

노예제도에 대한 저항방법은 하나님이 왕의 폭력에 대항할 만한 힘을 밖에서 키워 쳐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잘못된 그 사회체제 속으로 사람을 보내서 안에서 저항하도록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산파들이 잘못된 사회체제 속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고, 그 체제의 핵심인 황실 안에 공주가 있어서 왕의 폭력정책이 온전히 시행되는 것을 막았고, 공주를 통해서 노예해방운동의 지도자인 모세를 황실사회체제 안에서 성장시키도록 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산파들의 힘은 생명의 존엄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었고, 공주의 힘은 힘없는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공주의 마음을 움직인 아기 모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아무 힘도 없었다는 그 사실이 힘이었습니다. 힘없는 상태가 힘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기 때만이 아니고 말년에 가서야 전 생애에 걸친 자기 생명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자의 섭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 깨달음이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체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기 모세가 살아남는 과정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노예해방운동도, 그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가 성인이 되면서 그 체제에서 도피해서 40여년을 광야에서 보내다가 말년에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마음의 화평을 되찾고, 다시 그 체제 안으로 들어가 노예해방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체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사건은 그의 다섯 번째의 체험이 됩니다. 이때 그가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것은 “그를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출4:19)고 해서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의 어려움 

노예해방운동의 사명을 받게 되는 대목이 나오기 이전까지의 모세 이야기에서는 노예해방운동의 어려움은 노예민족 말살정책에 동원된 왕의 폭력에 대항할 아무런 힘도 없다는 사실이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사명을 받는 대목에서부터는 왕의 폭력에 대항할 물리적인 힘(무력)이 없다는 문제라기보다는, 몇 가지 정신적인 문제가 핵심적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노예운동을 인도할 모세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문제,
2. 노예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데 대한 백성들의 불신문제, 
3. 노예정책을 강행하려는 왕의 고집문제, 
4. 왕의 강경책에 대한 모세의 행동과 마음가짐 문제.

1. 모세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문제

광야에서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출3:10)고 노예해방의 사명을 모세에게 맡긴다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을 때, 모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출3:11) 하고 자신의 자격과 능력에 자신이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출3:12)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하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은 이제부터 앞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인들을 통해서 그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은 말년에 그가 주체가 되어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니고, 그의 출생과 함께, 자기는 몰랐을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인이 된 다음에 이 운동의 인도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이 운동의 주체는 모세가 아니고, 여인들 속에 함께 하셔서 저들을 움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기의 능력부족에 대하여 한 가지 더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고 물으시며,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하고 말씀드리자,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줄 안다. ... 너는 그에게 말하여 주어라. 네가 할 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에나 그가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출4:10-15)라고 하셨습니다.

말 잘하는 능력보다 할 말이 있는 사람

모세는 할 말은 있으나 말을 잘하는 능력이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말을 잘하고 못하는 능력보다는 꼭 하여야 할 말이 있고 없음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체험을 통해서 불의에 대해서 하여야할 말이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형제에게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노예제도하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이 다 “노예제도는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하여야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런 말을 가르치는 것이 의로운 운동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피조물의 능력보다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확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백성들의 불신문제와 이적(기적)이야기

“그(백성)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하면 어찌합니까?” (출4:1)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불신에 대한 질문이지만 사실은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모세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것입니다. 곧 모세자신의 불신이 문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 이적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첫 이적은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져, 그것이 뱀이 되게 하시고, 손을 내밀어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꼬리를 잡는 순간, 그의 손에서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둘째 이적은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면, 그 손에 악성 피부병이 들어서, 마치 흰 눈이 덮인 것처럼 되었는데, 그의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병들었던 그 손의 살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셋째 이적은 그들이 이 두 이적도 믿지 않고, 모세의 말도 믿지 않으면, 나일 강에서 물을 퍼서 마른 땅에 부어, 그 물이 피가 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출4:1-9). (이런 이적이야기에는 고대 이집트에 성했던 미신적인 마술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에서 모세가 이집트의 마술사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7:11, 8:18-19, 9:11)

이적이야기의 뜻

이 세 가지 이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곧 1) 무서워 피하게 되는 뱀으로 보이기도 했고, 손에 들린 지팡이로 보이기도 했고, 2) 피부병에 걸린 손으로 보이기도 했고, 성한 손으로 보이기도 했고, 3) 피로 보이기도 했고, 물로 보이기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적 이야기의 목적은 세상이나 인생을 보는 눈이 두 가지 정 반대의 경우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한이 쌓이고, 체념 속에 살아왔던 노예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노예를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감격에 넘치게 하려는 것이 이 이적의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말을 보면,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했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굽어 살피시고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출4:30-31)고 했습니다. 쓰라린 인생경험에 굳어졌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경험에 의해 굳어진 잘못된 생각의 틀을 허물고, 바른 생각의 틀을 짜기 시작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나 다 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노예해방운동은 폭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백성들의 힘을 더 큰 폭력으로 키워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고 하던 저들의 생각을 “우리는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고쳐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해야 할 말인 것이고, 해야 할 말이 있는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인도자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이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관계의 문제이고, 인간관계문제는 1)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만이 아니고, 2) 집단과 집단 간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불행이 개인적인 인간관계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 빼앗는 사람들과 빼앗기는 사람들, 지배하는 사람들과 지배당하는 사람들 간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불행이 예나 지금이나 모든 집단적인 인간관계가 바로 되고 바로 되지 못한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이건 집단과 집단 간의 문제이건, 그 문제해결은 과거의 잘못된 경험에 의해 짜인 잘못된 생각의 틀을 바로 된 생각의 틀로 고쳐 짜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노예였던 히브리인들, 곧 피지배자의 생각이 바꿔지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 노예정책을 강행하려는 왕의 고집문제

고난 받는 피지배자의 생각이 바꿔지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불의한 지배자의 마음이 바꿔지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잘 보여줍니다. 폭력으로 노예민족의 사내아이를 죽여 인구성장을 막으려고 했지만, 필요한 만큼 노예 노동력을 보유하려는 것이 왕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이 정책을 고집하려는 왕의 마음이 바꿔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들의 노동을 통해서 이미 가진 것을,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을 알면서, 노예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를 보는 폭군의 눈에는 노동력만 보이지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예해방의 가장 큰 어려움은 모세 자신의 회의나 백성들의 불신이라기보다는 불의한 폭군의 마음이 바꿔지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의한 폭군의 마음을 바꾸기 어려우니, 폭군과 그의 편을 다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많은 저항운동이 취하는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의로운 길을 트기 위해서 불의한 자들을 다 죽여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객을 보내거나,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거나, 군대를 육성해서 쳐들어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런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체험을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4. 왕의 강경책에 대한
  모세의 행동과 마음가짐 문제 

왕이 노예백성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릴 때, 모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그가 폭군을 대항해서 폭력행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이 아니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은 왕의 폭력에 항거하는 정치적인 운동이 되게 마련이었지만, 일반 정치운동과 다른 점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다른 점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그가 할 일과 하지 말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져야 할 마음과 가져서는 안 될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폭군과 백성 앞에 서는 일,
2) 탈출을 준비시키고 탈출을 인도하는 일, 
3) 폭군의 거절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폭력을 쓰지 않은 일.

가)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폭군과 백성 앞에 섬

모세가 할 일은 폭군을 찾아가서 해야 할 말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은 폭군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출3:18) 하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제사 드리게” 허락해 달라는 말은 “예배드리게” 허락해 달라는 말과 같은 말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출8:20,9:13,10:3)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왕을 섬길 왕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을 섬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왕은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고, 왕이 “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노예다”는 왕의 생각을 부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군주(또는 그의 폭력)가 역사의 주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그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밑에 열거하는 대로 노예탈출이 성사되기까지 모세는 왕을 열한차례 배알해서 할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은 “예배드릴 수 있도록 광야로 나가게 해 달라”는 꼭 같은 말의 반복이었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의 인도자인 모세가 할 일은 폭군의 폭력을 어떻게 저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폭군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느냐, 바꿔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노동인력을 확보하여 경제적인 이득에 차질이 없도록 하려는 폭군의 마음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말을 할 사람으로 폭군 앞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노예해방운동의 인도자로서 백성에게 할 말도 내용은 같았습니다. 왕의 경제적 욕심을 채워줄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하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백성 앞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폭군의 자유의지와 고집

그런데 폭군이 모세의 말대로 하고 안하고는 모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폭군의 자유의지에 달린 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폭군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노예를 경제적인 이득을 생산해내는 수단으로 보고 더 쥐어짜는 길을 택하는 것이지, 노예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보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청을 거절할 뿐 아니라(출5:4), 그날로, 노예를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해서,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이전처럼 대주지 말고, 직접 짚을 모아다가 만들도록 노동조건을 더 악화시키면서도,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같게 함으로 더 힘겹게 만듭니다. 예배드리러 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출5:6-9). 극심한 고통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갈망을 없앨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방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안 듣고도 역시 모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백성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일이었습니다. 노동조건이 더 악화되자, 백성들은 “주님께서 당신들(모세와 아론)을 내려다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출5:21) 하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일은 폭군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 잘못 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의 자유의지에 따른 불평도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말을 할 사람으로 저들 앞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반복되는 폭군의 거절과 재앙이야기

벽돌공사에서 더 심해진 고역에 시달리게 된 히브리인들이 모세에 대한 원성이 커지자, 모세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출5:21). 하나님은 다시 모세와 아론을 왕에게 보내시면서, 같은 말을 하도록 합니다. 왕이 이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 지팡이를 땅에 던져 뱀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에 왕은 자기 요술가들을 시켜 같은 이적으로 대응하게 합니다. 왕의 요술가들의 이적으로 생긴 뱀을 모세의 이적으로 생긴 뱀들이 삼킵니다(출7:12). 그런데도, 왕은 고집을 부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출7:9-13).

왕이 거절할 때마다 하나님은 재앙을 일으키셨는데 그 재앙은 1) 물이 피로 변함(출7:14-27), 2) 개구리(출8:1 -15)와, 3) 이(출8:16-20)와, 4) 파리(출8:20-32)가 득실거림, 5) 들에 기르는 가축 병(출9:3-4), 6) 사람과 짐승에게 악성종기(출9:8-12), 7) 우박과 벼락(출9:23-24), 8) 메뚜기 출현(출10:1-20), 9) 어두움(출10:21-23), 10) 맏아들과 짐승 맏배의 죽음(출11:1-10,12:29-32)과 이집트 군대의 몰살(출14:21 -28)등 이었습니다(흔히 노예탈출과 관련해서 “열 재앙”이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11 번째의 재앙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런 재앙은 주로 기상이변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환경오염에서 오는 피해와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물이 피로 변해서 물고기가 죽고, 냄새가 나서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고 한 것은, 여름철에 강물이 불어날 때 황토의 미분자나 미생물의 붉은 빛이 강물을 흐리게 한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인의 생명과 생산성의 원천이라고 할 나일 강물에 이상이 생긴 것은 큰 위기였겠는데도, 왕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출7:14-24).
(2) 개구리가 온 땅에 득실거리고 그 것이 죽을 때 악취가 났다고 했는데, 우기에 나일 강물이 범람한 후 생기는 진흙 벌판은 개구리 번식에 적소였다고 합니다. 개구리를 잡아먹는 새가 개구리의 지나친 번식을 막지 못할 경우에는 그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3) 먼지가 이로 변해 짐승과 사람에게 이가 생겼고(출8:16-20),
(4) 집집마다 파리가 들끓었고, 땅도 파리가 뒤덮게 되었다(출8:20-32)고 했습니다. 나일 강물이 범람한 후 웅덩이가 많이 생겨 모기와 같은 피를 빨아먹는 것들의 증식이 심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5) 들에 있는 가축들이 병들게 됐고(출9:3-4),
(6) 사람과 집짐승에게 악성 종기가 생겼다는데(출9:8 -12), 이는 위 3), 4)번 피 빨이 곤충들에 의한 병일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7) 우박, 천둥벼락(출9:13-35) 역시 자연현상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8) 메뚜기가 우박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먹어 치웠다는데(출10:1-20), 역시 그 지역에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불어온 동풍이 아침녘에 메뚜기 떼를 몰고 왔고, 다음에 강한 서풍으로 바꿔지면서 메뚜기 떼를 홍해에 몰아넣었고 이집트 온 땅에 메뚜기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출10:13, 19).
(9) 사흘 동안 어두움이 덮였다고 한 것(출10:21-29)도, 봄에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먼지와 모래를 몰고 올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호흡고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왕은 처음에 예배드리러 가게 해달라는 말을, “일하기 싫어서”하는 말로 보고(출5:17), 예배를 드리되, 이집트 땅을 떠나지 말고 그 안에서(출8;25) 하라고 하기도 했다가,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되 멀리 나가지 말라고도(출8:28) 했습니다. 또는 장정들만 가서 예배드리고 오라고(출10:10-11)했다가, 양과 소는 남겨 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출10:24), 이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출10:10).

닥친 재앙에 다급해지면 왕은 모세에게 기도해서 재앙을 거두게 해달라고 하기도 했고(출8:7-14,10:16-17), “내가 죄를 지었다. 주께서 옳으셨고, 나와 나의 백성이 옳지 못하였다. 너는 주께 기도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이 천둥소리와 하나님이 내리신 이 우박을 그치게 하여 다오. 내가 너희를 보내겠다. 너희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않아도 괜찮다”(출9:27-28)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9회의 재앙 이야기에서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모세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왕을 처음 만났을 때 거절했던 것까지 합하면 10번째의 거절이었습니다.

(10) 열 번째로 맏아들과 짐승 맏배가 밤에 죽어나가는 재앙이 따릅니다(출11:1-10,12:29-30). 드디어 왕은 노예백성이 짐승까지 데리고 나가 하나님을 섬기라고 허락하게 됩니다(출12:31-32). 그러나 막상 노예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생각을 바꾸고, 노예를 놓아 보낸 것을 후회합니다. 왕의 거절이 이렇게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강자의 욕심이 얼마나 집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특수병거 육백 대로 편성된 정예부대와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 병거부대를 이끌고 추격해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 급히 탈출한 후 노예들은 에담이라는 곳까지 왔다가, 그 지역은 이집트 전방 군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던 길을 되돌아가 바알스본이라는 곳 맞은쪽 바닷가에 장막을 치고 있게 됩니다(출14:2). 막막한 광야에 갇혀 헤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했습니다(출14:2-3).

전방 군대가 주둔해 있는 지역으로 갈 수도 없고, 군대가 추격해 오는 뒤로 갈 수도 없고, 물이 가로막혀 앞으로도 갈 수 없는 형편에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출14:11-14)라고 원망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인도자로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원망에 나타난 백성들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노예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백성들의 판단이 잘못이라는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다룹니다. 역경이 가로막는다고 노예해방의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역경이 있는 것은 그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판단에서, 백성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막힌 역경의 물을 뚫고 가는 길을 택하도록 하십니다(출14:16).

역경을 뚫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언약에는 조건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들어가면” 이라는 “떠남”과 “들어감”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23. “떠나라”?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첫 조건- , 24. 보여주실 땅으로 가면 -복의 근원됨에 필요한 둘째 조건-> “떠남”에 “들어 감”이 따르지 못하면 “현실 개척”이 되지못하고 “현실 도피”에 머물게 된다고 했습니다. 축구에서 공이 이쪽 문에서 떠난 다음 저쪽 문에 들어가야 점수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떠남에도 역경이 있고 들어감에도 역경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떠남에서 들어감까지의 과정에서 역경은 언제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되기에는, 마치 축구에서 방어진을 뚫고 가야하는 것과 같이, 떠남과 들어감에 또 한 가지 조건, 곧 뚫고 감이라는 셋째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이 탈출이야기 중 “바다 물을 뚫고 갔다”는 대목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있던 곳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을 가야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다니던 길을 떠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떠난 다음에는 길이 없던 곳에 새 길을 내면서, 새 길을 뚫고 간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차를 달리는 모든 고속도로도 다 길 없던 곳을 뚫어서 생긴 길들이 아닙니까?

노예제도의 옛 사회구조를 떠나 새 사회구조 창조를 향해서 길이 없는 데를 뚫고,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생 자체가 태어남에서 창조주의 품안으로 들어감까지의 모든 과정은 다 이 뚫고 감의 연속인 것입니다. 떠나고(출), 뚫고 가고(통), 들어가고(입),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진 것으로 믿고 가는 것이 모세가 보여준 하나님 신앙입니다.

이 성경이야기는 역경을 뚫고 간 이 모험을 이적(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경을 극복한 체험을 한 이들은 나중에, 자기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었고, 기적이었다고 감격적인 회상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재앙에 대해서 기상이변과 관련시켜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바다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로 갈대바다(Sea of Reed)로, 홍해(Red Sea)가 아니고 보다 북쪽에 있는 호수 지역 물이 얕은 늪지대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야기는 이적의 가능성 여부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역경을 당할 때의 마음 상태를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역경과 공포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출14:10)고 했습니다. 잘못된 현실에서 떠나자마자 역경이 닥치게 마련인데, 이때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닥친 역경만이 문제가 아니고, 속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공포가 더 큰 문제입니다. 공포가 공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의 마음상태는 모세를 원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묘 자리가 없어서 이 광야에 끌어내어 죽이려 하느냐? 광야에 나가 죽는 것 보다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났다고 하지 않았느냐?”(출14:11-12)는 이 원망이 모세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두려움에 따른 이 원망은 판단의 흐려짐(혼돈)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역경은 공포를, 공포는 원망을, 원망은 판단의 혼돈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적을 벗으로 착각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 된 현실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떠나 온 그 길이 잘못이라고 보게 되고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현실개척이 아니고, 잘못된 현실 예찬론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이 좌우로 갈라져 벽이 되었다는 뜻

창조이야기에서 물이 아랫물과 윗물로 갈라지기 이전 상태를 혼돈과 어두움이라고 <7. 맨 처음에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창1:7.> 표현했었는데, 노예백성들이 역경 앞에서 창조이전의 혼돈과 어두움의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이 점이 가장 큰 위기라는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을 뒤덮은 혼돈과 어두움(흐려진 판단)의 바다를 빛과 질서로 다스릴 새 창조의 역사가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아라. 너희가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출14:13-14). 이것이 모세가 한 말이었습니다. 뒤쫓아 오는 군마를 무서워하는 공포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옳은 일)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는 잘못을 깨우쳐 주는 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주를 두려워하고, 주와 주의 종 모세를 믿었다”(출14:31)고 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기에는 공포의 극복이 앞서야 하고, 공포의 극복은 공포의 대상이 바꿔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 대한 성경이야기의 표현은 “주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출14:21-22)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창조이야기에서 첫 단계에서 “어두움에 빛이, 그리고 낮과 밤이 생기게”하신 다음, 둘째 단계로 혼돈을 뜻하는“물을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지게 하셨다”는 것과 같이, 출애굽이야기에서 물을 좌우로 갈라지게 했다고 한 것은 혼돈의 물을 다스리는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계21:1)라고 해서 “바다도 없어졌다”고 한 말은 다스려지기 이전의 바다가 없어져 혼돈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질서가 채워졌다는 말이고, 노예백성이 이 새 질서의 땅을 밟고 걸어갔다는 말인 것입니다.

모세의 힘은 진리가 혼돈의 물을 좌우(옳고 그름)로 가려내야 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시련을 뚫고 갈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시련을 뚫고 갈 수 있게 하십니다)(고전10:13)라는 바울 사도님의 말씀도 이런 뜻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과 같이, 사람에게는 언제나 과거에서 따라오는 문제만이 아니고, 앞을 가로 막는 새로운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길을 간다(하나님을 믿는다)고, 앞을 가로막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을 막는 역경이 계속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그 역경을 뒤에 두는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다는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모세의 확신으로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노예백성은 혼돈을 극복한 새 질서의 창조를 체험한 데 반하여, 훈련받은 군대는 왕의 욕심에 좌우되다가 결국 질서를 잃고 창조이전의 혼돈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물에 매장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11) 여기에 열한 번째의 재앙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노예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추격해온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혼란 속에 빠집니다. 병거의 바퀴가 벗겨져서 전진하기 어렵게 되는데, 동풍으로 밀려났던 물이 새벽녘에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와 병거와 기병을 뒤덮쳐 전몰시킵니다(출14:23-28). 기마와 병거로 중무장한 왕의 군대는 자기 무게에 의해 늪지대에 빠진 것입니다. 

이 재앙이야기에서 바로 왕을 대항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으면서,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출6:6). “나는...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겠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이고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겠다”(출7:3-5).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말하는 데서도 “이제 주님(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임(역사의 주님)을  임금님께 기어이 알리고야 말겠다”(출7:16)고 하셨습니다. 개구리 재앙 때도 “네가 그들을 보내지 않으면, 나(하나님)는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벌하겠다”(출8:2), “주님께서 때를 정하시고서 ‘나 주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이튿날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니, 이집트 사람의 집짐승은 모두 죽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집짐승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출9:5-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매우 큰 우박을 퍼부을 것이니”(출9:18), “모세가 하늘로 그의 지팡이를 내미니, 주님께서 천둥소리를 나게 하시고 우박을 내리셨다. 벼락이 땅에 떨어졌다. 주님께서 이집트 땅 위에 우박을 퍼부으신 것이다”(9:22-23)라고.]

다른 재앙 때는 지팡이라는 말도 없이, 하나님이 재앙을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바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의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나는,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과 너의 궁궐에 파리를 보내서, 이집트 사람의 집집마다 파리가 들끓게 하고, 땅도 파리가 뒤덮게 하겠다”(출8:21),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너의 집짐승들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 떼를 쳐서, 심히 무서운 병이 들게 할 것이다”(출9:3), “네가 나의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하면, 나는 내일 너의 영토 안으로 메뚜기 떼가 들어가게 할 것이다”(출10:4)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가 죽는 재앙에서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 바로에게와 이집트 땅 위에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겠다. ... 내가 한밤중에 이집트 사람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니,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을 것이다”(출11:1,4), “그 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라고(출12:12) 해서, 하나님이 직접 재앙을 일으키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탈출을 준비시키고 탈출을 인도하는 일만을 

이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탈출에 앞선 준비를 시키는 일만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준비 중 중요한 것은 가족이나 이웃이 공동체단위로 양을 잡아 구워 먹는데, 이때 받아놓은 양의 피를 우슬초 묶음에 적셔서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집트 사람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 문 앞을 그냥 지나가실 수 있도록 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이때 노예백성들은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고, 집안에 있다가 적시에 급히 탈출하는 것으로(출12:7-13,21-23,28) 되어 있습니다.

왕의 병거와 기마병이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이 “내가 이제 바로에게와 이집트 땅 위에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겠다”(출11:1)라고 예고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밀어 내신 것도 하나님 이시라”(출14:21)고 했습니다. 밀린 물이 다시 되돌아왔다는 대목에서도,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셨다”(출14:27)고 했습니다. 재앙을 일으키고 벌을 내린 것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할 일은 반복되는 재앙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절하는 왕의 고집에 대하여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내며, 탈출을 준비시키고 탈출을 인도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적 지팡이”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셔서 바로의 앞에서 모든 이적을 나타내 보이도록 하셨다고 했고(출4:21), 이적 때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게 하셨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적을 일으키는 마술적인 힘이 이 지팡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물이 피가 되는 재앙 때도, 모세와 아론에게 “지팡이로 강물을 치게 하셨다”(출7:16,8:16), 개구리 재앙 때도, “지팡이를 들고 강과 운하와 늪 쪽으로 손을 내밀게 하셨다”(출8:5)고 했고, 악성종기 재앙 때도, “지팡이를 내밀어 땅의 먼지를 치게 하셨다”(출8:16), 우박과 벼락 재앙 때도, “하늘로 팔을 내밀게 하셨다”(출9:2)고, 그리고 바로의 병거와 기마대가 물에 빠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팔을 바다 위로 내밀게 하셨다(출14:26-27).] 그래서 이 지팡이가 천재지변의 재앙을 일으켰고, 이 재앙에 의해서 이집트 폭군의 통치자체가 붕괴된 것처럼 (추격해 왔던 군대가 패한 것뿐이었지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런 이해가 전통적인 해석이 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적을 일으키는 지팡이”에 의해 문제가 다 해결되었던(다 해결된 것도 아니었지만) 것으로 봐버린다면, 이 노예탈출이야기는 현실적인 의미가 없어지고, 이런 해석은 이 이야기의 본뜻을 캐내는데도 방해가 됩니다. 이 지팡이는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지팡이가 상징하는 그 힘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이 이야기의 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팡이의 뜻

모세의 “지팡이”에 대한 말은 그의 손에는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을 뿐, 폭력이 될 만한 칼도 창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지팡이는 바로 왕을 대항해서 싸울 무기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늙은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지팡이를 잡은 그의 손은 오래전 젊었을 때 노동현장에서 히브리인 노예를 학대하는 이집트인 강제노동감독관을 쳐 죽였던 그런 주먹을 쥘 수도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지팡이가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폭군을 처치할 무기로 주신 것이었다면, 수차례의 거절과 재앙이 반복될 필요도 없이, 단 한 번으로 모세로 하여금 폭군의 이마빡을 내리쳐 천지개벽의 새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 아닐까요?

모든 재앙은 폭군의 “교만”(출10:3)을 하나님이 “손수 치신”(출3:19-20), 하나님이 이집트 사람에게 내리신 “벌”(출8:2,9:4,26,10:2,23)이었다고 했습니다. 재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에 의한 재난들이었지, 모세의 지팡이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른 일들을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지팡이는 폭군의 불의한 거절에 폭력으로 맞서거나 폭력으로 폭군을 살해하는 일은 물론, 그런 마음도 가질 수 없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고, 이것만이 복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힘은 그가 든 지팡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역사의 주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확신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지팡이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이일을 합니다)”(고후6:7) 또는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라고 하신 바울 사도님의 확신과 같이, 의로움만이, 진리만이 이긴다는 확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노예탈출과 해방을 성취시킨 힘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 폭군의 거절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폭력을 쓰지 않은 일

노예탈출이야기는 폭군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폭군에게 허락을 받아서 떠나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왕이 고집을 부리고 히브리인을 놔주지 않을 것을 아실뿐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고집을 부리게 해서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대목을 예로 들면 처음 모세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그러나 내가 이집트의 왕을 강한 손으로 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출3:19-20)라고 하셨고, 더 나가서, “그러나 나는 그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내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하겠다”(4:21)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에도 불구하고 매번 거절했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출7:13,22,8:15,19,9:12,9:35), “너는 바로에게 가거라. 그와 그 신하들이 고집을 부리게 한 것은 나다”(출10:1), 또는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으며,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출10:20,27)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노예탈출 후 병거로 추격한데 대해서도,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출14:4)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주님께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니, 바로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았다”(출14:8)고 했습니다.

악의 근원이 하나님? 

여기서 “그렇다면 폭군의 고집(악)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말인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악의 근원이 하나님이란 말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대목은 마치 창세기 에덴동산이야기가 선악과나무와 뱀을 만들고, 사람을 뱀에게 넘어가도록 만드셨다는 대목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창조이야기가 오직 한 가지 질문,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나?”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려는 것이고, 이에 대한 대답은 자유의지를 “한 가지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쓰지 않고, 말씀을 거역하는데 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선악을 아는 지식과 신의를 지키는 의지- > 이와 마찬가지로, 이 출애굽기 노예탈출 이야기에서도 왕의 폭정이라는 악의 근원은 그가 자유의지를 잘못 쓴 것임을 말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모세가 폭군의 악에 대응함에 자유의지를 바로 쓰는 길은 무엇이냐, 악을 행하는 폭군에 대해 모세가 어떤 행동과 어떤 마음을 가짐이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셨다는 뜻은?

폭군이 계속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미친 듯 발악하면서 약자를 더 심하게 괴롭힐 때, 모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폭군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이 끝까지 거절할 때 몹시 화를 내면서 바로 앞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출11:8).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폭군의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을 금하실 뿐 아이라,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려는 그런 마음가짐까지도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셨다는 말은 악을 행하는 폭군도 결국 의를 이루고야 마실 하나님의 섭리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폭군에 대한 모세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제한한다(다스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폭군의 잘못된 역사를 중단시키고 바른 새 역사를 창조하신다는 창조주신앙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주신앙은 하나님이 혼돈에 질서를, 어두움에 빛을, 잘못된 것에서 바른 것을, 생명이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생명을 키우고 보존해줄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7. 맨 처음에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잘못된 것에서 바로 된 것을 창조->

이런 모세의 이야기의 독특한 점을 보기 위해서 역사상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와 대조해 보겠습니다. 첫 째는 히틀러 저격 시도 사건, 둘째는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연합군이 저지시킨 이차대전 종식 이야기, 셋째는 이락 전쟁 이야기입니다. 

(1)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한
  성직자이야기와의 비교

이런 예를 생각해 봅시다. 어느 국가 원수가 폭력으로 인근국가를 침략해 들어가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세계시민을 태운 기차를 정신이상이 생긴 미친 사람이 기사가 되어 죽음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본 한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갖은 시도를 다해 보았으나 운전사의 광기는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최후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두꺼운 성경 속을 칼로 도려내어 그 자리에 권총을 숨기고, 그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관차 가까이 자리 잡았다가 적시적소에서 그 미친 운전사를 저격하려고 했습니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발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당했습니다(히틀러를 암살하려다 2차 대전이 끝나기 며칠 전에 발각 채포되어 처형당한 본훼퍼 목사의 히틀러 암살시도 사건을 이렇게 비유해본 것입니다).

여기 미친 기사 히틀러를 폭군 바로 왕으로 볼 수 있고, 성직자를 모세의 역을 맡은 사람으로 대조해서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예탈출 이야기에서는 폭군을 죽이지 않고 노예정책을 더 이행하지 못하게 했다는데 반하여, 히틀러 저격시도 이야기에서는 폭군을 직접 사살하려고 했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2)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한
  이차대전이야기와의 비교

본훼퍼 목사가 주도한 저격사건이 실패한지 며칠 후 연합군의 폭격(폭력)에 의해서 미친 기사가 운전하던 열차의 죽음을 향한 질주를 멈추게 합니다. 이차대전의 종식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폭군의 폭력을 연합군의 더 큰 무력(폭력)으로 저지 시킨 것입니다.

노예탈출 이야기에서는 여러 가지 “재앙의” 힘으로 바로 왕의 폭력을 저지시킨 것이었는데, 열째 재앙 이야기와, 이집트 군대가 수장되었다는 열한 번째 재앙 이야기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점에서 재앙도 일종의 “폭력”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습니다.[특히 왕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죽었다는 열 번째 재앙 이야기(출12:21-30)에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 문 앞을 그냥 지나가실 것이며, 파괴자가 여러분의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출12:23)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폭력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역할을 연합군이 이행한 것”으로 보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전개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이론에서는 역사의 주가 하나님이 아니고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더 큰 무력(폭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노예탈출 이야기에서 모세는 끝까지 폭력과 같은 인간의 어떤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섭리)이 역사의 주이심을 믿고 그 길을 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대로 노예탈출 이야기에서는 사람을 죽인 것이 모세의 폭력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벌”(심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곧 모세는 한 번도 폭력행사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도 품지 않도록 하셨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벌”(심판)의 목적은 폭군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려두되 그의 잘못된 계획(고집)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진정한 참회를 이끌어내지는 못하더라도, 폭군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욕심을 포기하거나 단념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것이면서, 폭정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인심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강한 손에 밀려서, 그들을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서야, 그들을 이 땅에서 내쫓다시피 할 것이다”(출6:1)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판의식의 확산과 인심의 변천에 대한 예를 들면, 거듭되는 거절에 이어지는 재앙에 시달린 신하들이 “언제까지 이 사람(모세)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함정이 되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을 내보내서 그들의 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출10:7)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고 한 것이나, 이집트 사람은 “‘우리 모두 다 죽게 되었다’ 하면서, ‘어서 이 땅에서 떠나라’고 재촉하였다”(출12:33)라고 한 것도 노예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 절정에 이르렀던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남자는 이웃에 사는 남자에게, 여자는 이웃에 사는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를 요구하게 하여라”(출11:2)고 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이집트 사람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요구하였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에게 환심을 사도록 하셨으므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대로 다 내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서,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출12:35-36)라고 한 말도 폭정에 시달린 노예백성들을 이웃 사람들이 동정하게 된 인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실 뿐 아니라, 또 “이집트 땅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이 이 사람 모세를 아주 위대한 인물로 여기게 하셨다”(출11:3)라고까지 했고,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다”(출12:37)고도 했습니다. 이는 이집트 사회에서 노예와 같은 천민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함께 동조한 노예탈출운동이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천민 층을 통틀어서 “히브리인”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것(출5:3,7:16)으로 되어 있습니다.

(3)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한
  이락전쟁 이야기와의 비교

이락전쟁도 당시 후세인 대통령의 “폭력”을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국가들의 더 큰 폭력(무력)으로 퇴치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후세인을 “폭군”인 바로왕의 위치에 둔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탈출이야기는 후세인과 그의 폭력을 폭력으로 제거 하는 길이 아니고, 그의 “악”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되어 후세인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욕심”을 포기하거나 단념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군사적 해결이 아닌 정치 및 외교적 해결의 길을 갔어야 했다는 말이 됩니다. 군사적 해결과 정치 및 외교적 해결의 길을 병행하는 것이 통례인데, 군사적 해결의 길은 온전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노예해방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이런 성경의 기본입장이 타당한 것임이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증명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종전 식민지시대에는 강국의 무력(폭력)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이락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들 수 있습니다. 이락전쟁에 대해서는 히틀러를 폭군의 위치에 둔 이차대전 때와도 다른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이차대전에서는 독일과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 들어간 불의에 대한 반격이었다는 점에서, 반격에 동원된 무력(폭력)행사에 아무런 비판도 없었습니다. 이락이 쿠웨이트를 침공해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락전쟁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무력행사의 명분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이다가 주도한 테러사건 후, 후세인이 알카이다 저항군과 연관이 있고, 대량학살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와 관련해서 “후세인이 빈라덴에게 이런 무기를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구실로 해서 침공해 들어갔는데, 이 두 가지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데서(후세인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락이 핵 보유국이 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일부러 흘려 내보낸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고 해도 부쉬 행정부가 내세운 이락 침공 구실은 거짓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미 행정부의 “잘못”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그 예로 유엔의 입장을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엔 전 사무총장이 2006년 말로 임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대의 침입으로 시작된 이라크전쟁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막는데 실패한 것이 10년 재직 중 가장 크게 후회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량학살 무기보유여부 감시위원들에게 임무를 마칠 수 있도록 좀 더 시간을 주었더라면, 이 전쟁은 피할 수가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세계역사는 식민지주의 시대가 지난 “후-식민지시대”인데,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식민주의적 전쟁”이라는 평도 나왔습니다(이 전쟁 후 재건비용도 이라크에서 생산되는 기름 수입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 부쉬 행정부의 설득이었는데, 이런 계산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후세인의 (쑤니 족) 극심한 폭정에 시달린 두 민족(씨아이트와 커뒤쉬)이 정의를 바란 것까지는 옳은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의 실현의 방법으로 미군의 폭력(무력)에 의존하려는 움직임에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호전적인” 야심이 맞물려 “선제공격”으로 들어간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고 포드씨와의 인터뷰 기록에서(사망 후에야 알려지도록 되었던 것), 부쉬 행정부 주요 간부들을 “호전적”이라는 말로 평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쉬 대통령이 대량학살무기를 구실로 내세운 것은 “잘못”이었다고 평했습니다(미군이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락을 점령할 경우 이락에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과 그 지역에 반미 테러리스트 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 미 정보부의 경고(2003 1월) 문서가 있었다는 사실이 2007년 5월에 공개되었습니다. 이런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시작한 사실도 미 행정부의 “호전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세인 정권만 무너뜨리면 “승리할”것으로 보았던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5년째로 접어든 2007/1/26자 공식 발표: 미군 사망자 3067, 부상자가 23,124, 이락 군 12,000- 15,000, 이락 시민 420,000-790,000. 2007년 5월 미 국민여론조사에서는 “미군 파군이 잘못이었다”는 의견이 58%, 잘못이 아니라는 의견이 40%로 나타났고, 미군이 이락에서 성공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36%, 가능성이 없다는 여론이 55%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부쉬 대통령도 작전수행상의 과오를 자인하면서 그 책임을 진다고 공언했습니다(2007.1.11). 미국으로서는 지난 잘못의 책임을 물을 겨를도 없는 진퇴양난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 것이 국가안전과 이익을 위해 가장 상책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국론이 갈라진 채 2008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후세인을 “폭군” 바로왕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치고 시작한 전쟁이었는데, 후세인을 그 폭군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사형 집행한 것이 옛날이야기처럼 되었는데, 마치 “다른 사람”이 “폭군”의 자리에  들어가 앉은 듯싶은 착각을 일으킬 형편이 되었습니다. 바로 왕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듯이, 이 “다른 사람”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랍계 반미 투쟁집단인 알카이다는 미 행정부가 이런 판국에 이르렀다는 전제하에 폭력행사에 들어간 것이라고 하겠는데, 대표적인 것이 911 폭력사태였고, 이 폭력에 폭력으로 응징하려한 것이 이락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락전쟁이 시작될 때 알카이다와 후세인과는 관련이 없었고, 이락에 알카이다는 없었지만, 2006년에서 2007년 전반기에는 국제 알카이다 저항군이 이락에 침투해서 내란상태를 극대화 시켜갔기 때문에, 후세인 후 새로 세워진 이락에 알카이다 세력이 발 부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2007년 후반 이락전쟁의 목표로 되어 있습니다. 결국 알카이다의 폭력이 미군의 폭력행사에 좋은 구실을 보태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카이다가 폭력행사에 들어가든, 미행정부가 폭력행사에 들어가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모세 이야기가 말해주는 바는 폭력행사는 가서는 안 될 길이고, 누가 폭군이든지 간에 그 폭군이 더 이상 잘못을 지속할 수 없도록 폭력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인간의 첫 폭력행사는 형이 동생을 죽인 살인사건이었습니다. 형 가인이 폭력을 써서 동생 아벨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는 폭력행사는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창4:9-15)는 것도 <17. 왜 살인자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을까?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2)-> 모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이런 성경의 기본입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가 간 길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이야기가 이 길을 유일한 길로 제시하고 있는 데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앞에서 본대로 정권과 부력에 대한 폭군의 욕심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권력과 부력을 탐하는 “폭군”이 스스로 마음을 바꾸기를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2) 어떤 왕조나 어떤 정권만을 교체하고 국민 또는 시민의식에 아무런 개혁이 없으면 종전의 불의한 제도와 사회구조가 반복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3) 이 노예탈출이야기에서는 왕권을 견양하는 어떤 말이라든가, 정치경제 문제를 언급하는 말을 쓰지 않고, 히브리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절대로 살생해서는 안 된다”(창9:6)는 <14. 하나님의 형상> 지상의 계명을 핵심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의식구조가 폭력을 쓰는 “폭군”이 지구상 어디에도, 어떤 체제하에서도, 어떤 종교의 미명하에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단계까지 끌어올려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노예해방운동과 미국의 흑인노예해방

이 독특한 점을 좀 더 밝히기 위해서 미국의 흑인노예해방이야기와 대조해 보겠습니다. 두 이야기가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동기와 방법과 운동의 주체에 있어서 전연 다릅니다.

목화씨 빼내는 기계가 발명되면서(1793년) 미국의 목화산업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전성기를 이뤘는데, 이는 오직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사탕수수, 쌀, 담배 생산업도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였습니다. 1790년 미국 인구 3,929,214명 중 흑인이 757,208명으로 전체 인구의 19%가 흑인들이었습니다). 돈 주고 샀고, 돈 받고 팔수 있는 흑인 노예를 풀어주는 일을 감수할 기업주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노동력 부족으로 중요 산업이 당장 무너질 판인데 노예해방운동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북부에는 본래 노예가 없었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여론이 생기면서(1774부터) 해외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것을 금하게 되지만(1808), 남부지방에서는 여전이 노예매매가 계속되었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한 것은 흑인의 인권을 위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찬반입장 곧 남북전쟁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경제적인 타산이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장노동인력이 모자라는 판국이 되었는데, 기업주들은 노예가 해방되면 남부에서 풀려난 노예들이 북부로 밀려와 필요한 노동인력이 충당될 것을 기대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부에서는 그 지방 신생공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되는 물품에 관세를 부과할 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주로 농업지역인 남부는 많은 공산품을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기 때문에 이 관세부과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찬반이 다르지만 쌍방이 다 경제적인 이익을 바라는 집념에 있어서는 같았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바로왕의 입장과 비슷한 것이지 모세의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이점에서 교회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미 침례교회를 위시해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도 각각 남북교회로 분열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남북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1844년에 미 침례교회가 노예소유자는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선언한데 반대하여,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으며, 기독신도는 노예를 소유할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1845년 남 침례교회를 분립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는 성경해석은 잘못 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철회되었습니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도 각각 마찬가지로 남북교회로 분열될 정도였고, 1850대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직체는 미 민주당 하나뿐이었는데, 이 민주당마자도 1860년 선거를 기해서 분열되었다고 합니다. 노예제도가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주한 노예에 관한 법령이 1850년에 제정되었는데, 연방보안관이 도주한 노예를 체포하지 않은 경우, 1,000불 벌금을 내고, 도주자 노예로 보이는 자는 수색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그 노예의 소유자라는 선서를 하면 다른 증거가 없이도, 소유권 주장자의 노예가 되도록 했습니다. 도주자로 의심되는 흑인 노예는 재판을 요구할 수도 없고 자신을 변호할 수도 없었습니다. 노예의 도주를 돕거나, 거처나 음식, 또는 다른 어떤 도움을 제공한 사람도 6개월의 징역과 1,000불의 벌금을 내게 했습니다. 도주노예를 체포한 관리에게는 보상금이 주어지게 되었는데, 자유 흑인을 납치해서 노예상인에게 파는 일이 생기기도 했답니다. 남북 간의 전쟁에서 북쪽이 승세를 보이면서 1862년에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었었으나 전면적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고, 1865년에 헌법 제 13차 수정안에서 흑인노예매매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1896년에 흑인 인종차별법이 제정되었고, 1975년에 와서야 이 법이 철폐되었음).

히브리인 노예해방운동과 다른 점

1) 목적이 경제적 이해타산이었습니다.
리치몬드라는 도시 공략에서 북군이 승리했을 때, 입성한 링컨 대통령 앞에 한 흑인이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자, “내게 무릎 꿇지 말고 하나님에게만 무릎을 꿇고 네가 얻은 자유를 위해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남북전쟁의 목적이 노예해방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앞에서 말한 대로 전쟁의 중요한 동기는 남북의 상반되는 경제적 이해타산이었습니다(당시 링컨대통령은 "이 전쟁에서 이루고자하는 나의 주목적은 통일이지,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것도, 노예제도를 파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노예를 아무도 해방시키지 않고도 통일을 이룰 수가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다 해방시켜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또 일부 노예를 해방시키고 일부는 해방시키지 않고서도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습니다. “My paramount object in this struggle is to save the Union, and is not either to save or destroy slavery. If I could save the Union without freeing any slave,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save it by freeing all the slaves,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do it by freeing some and leaving others alone, I would also do that”).

2) 흑인노예들이 해방운동의 주체가 아니었음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각 군사력의 열세를 막기 위해서 남북이 다 군복무를 의무화하는 징집법령이 제정되면서(1863), 흑인부대도 형성된 것이었다고 합니다(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300불을 내면 대리복무를 할 수 있어서, 결국 “부자의 전쟁에, 싸우기는 가난한자가 한다”는 평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This was a rich man's war and a poor man's fight. 1865년 종전될 때 흑인군인 수자가 190,000 명이었다고 합니다).

3) 전적으로 폭력(무력)을 사용한 점입니다(120,000 여 명이 전사, 64,000 여명이 부상에 따른 사망, 186,000여명이 참전 중 각종 질병으로 사망, 종전 후 6일 만에 링컨대통령도 저격당했습니다).

앞에 인용된 링컨 대통령의 말이 얼마나 역사적 고증을 거친 사실인지 미국 역사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비록 백보를 양보해서 미 남북전쟁이 오직 “흑인 노예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백인들 간의 무력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곧 상대를 죽여 없앰으로 상대의 자유의지를 부인했다는 점에서 모세의 노예탈출이야기와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폭군 바로의 고집, 곧 그가 잘못 쓴 자유의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불의한 자의 자유의지까지도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정의,” “자유,” “평등” 등 아무리 좋은 이상이나, 아무리 위대한 정책을 위해서도 칼을 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성경 이야기의 기본입장입니다. 칼을 쓰는 순간 그도 폭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본 입장이기도 합니다(마26:52). 의를 위해서는 칼을 써도 되고, 써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고, 이런 판단이 특히 강대국 시민들의 피에 흐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상은 미국 남북전쟁의 전통일 수는 있으나, 모세의 노예탈출 이야기의 기본입장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폭력을 쓰지 않고 이상이나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하는 길이 가능하냐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 성경이야기의 기본 입장은 이 외길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출애굽이야기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정권과 부력을 가진 “폭군”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욕심을 포기하거나 단념할 수밖에 없이 될 때까지, 그리고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될 때까지, 모세로 하여금 할 말을 계속하는 길을 택하도록 하셨다”는 이 이야기와 비슷한 예를 요즘에 일어나는 일에서 찾아본다면. 환경오염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노예탈출 이전까지 기상이변에 의한 재앙이 있었던 것과 같이 요즘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에 따른 피해가 극한에 이르게 되면서, 시민들의 관심이 이 문제로 쏠리게 되어갑니다. 부력과 무력을 가진 “폭군”들도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게 되어 가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추세는 몸에 해로운 지방질에 대한 시민들의 경계의식이 높아지면서, 업체들이 스스로 이런 지방질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추세로 되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입니다.

폭력이 역사의 주가 아님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

노예해방이야기는 “폭군”이 옛날에 한 번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언제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권력과 부력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언제나 이런 “폭군”이 되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들의 욕심과 고집은 마치 하나님의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끈질긴 것으로 세상이 바로 될 수 없도록 막는 가장 큰 거침돌이고, 저들의 권력과 부력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게 마련입니다. 이래서 권력과 부력이 휘두르는 폭력이 역사의 주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함은 역시 폭력이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옳다는 편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폭력을 쓰는 순간, 하나님(진리)이 역사의 주이심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폭력만이 아니고 불의한 폭력에 항거하는 “의롭다는 자의” 폭력까지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진리)이 역사의 주이심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증언자의 자리에 세워진 사람으로서의 체험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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