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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혼돈에서 질서로-”   
<2008년 10월 19일 주일  캘거리 한인연합교회가 주최한 “떠나라” 출판기념회 강연 원고를 첨부합니다.>

감사말씀
오 늘 출판기념회의 목적은 책을 소개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만, 먼저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캘거리 한인 연합교회 home page에 연재해 오던 원고를 모아 책을 출간하는 일을 해 주신 김창한 목사님과 고우님들은 물론, 인쇄비를 위해 헌금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캘거리 교회와 판권
책 원고와 판권도 이 교회에 기증되어 있어있습니다. 이유는 캐나다에 한인 연합교회가 10여개 있는데, 그 중 이 교회가 가장 작은 교회이지만, 신앙 풍토에 있어서, 경직된 무지와 교만으로 닫혀있기 쉬운 잘못을 극복할 수 있고, 열려있는 교회로, 미래지향적인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된 일입니다.

200질 제한 출판
책은 모금액에 맞춰서 200질로 제한 출판 했는데, 헌금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책을 기증하고, 선교용으로 비치해 두되, 꼭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판매도 해서, 목회 및 선교비로 쓰이게 됩니다. 밴쿠버와 캘거리에 각각 100질씩을 두기로 했는데, 밴쿠버에는 이미 80질정도 나갔고, 여기서는 오늘 처음 홍보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이미 20 여질은 나간 것으로 들었습니다.

“추천의 말”, “이 책을 읽는 분들게”, “머리말”, “떠나라는 말의 뜻”
책 머리에 나와 있는 “추천사”, “이 책을 읽는 분들께”, “머리말”, 이 세 글을 읽으시면, 책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글은 책 표지에도 짧게나마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책표지에 나와 있는 “떠나라는 말의 뜻”이라는 글을 읽어보시면, 성경에서 이 “떠나라”는 말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얼마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은퇴 후 6,7 년 만에 마무리된, 650 쪽이 넘는 방대한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에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만,
오 늘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오신 여러분들 중 책을 읽어보지 못하실 분들에게도 헛된 시간이 되지 않고, 이민생활에 유익한 성경의 교훈과 지혜를 얻고 가실 수 있도록 말씀을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주로 제1권 중 몇 장을 골라 요약해서 준비 했습니다.

책을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시고, 그럴 사정이 되실 분들을 위한 안내의 말씀
(1) 먼저 책이 제1권, 제 2권 두 권으로 된 데 대한 설명입니다. 원고분량이 한 권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둘로 나누면서도, 두 번에 나눠 따로 출간하지 않고, 한 번에 출판한 데는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창 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차원에서 신앙문제를 다루고 있고, 출애굽기는 공동체의 집단적인 차원에서 신앙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둘은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되고, 마치 왼 팔과 오른 팔이 한 몸을 이루듯, 하나의 이야기로 봐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1권은 창세기에 대한 것, 2권은 출애굽기에 대한 것으로 나눈 것은 아닙니다. 전체 원고 분량을 대략 절반으로 나눠서 둘로 한 것입니다. 어느 한 권만 보시는 것 보다, 두 권을 하나로 생각하시고 보시는 것이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신앙생활에도 보다 유익할 것입니다.

어느 치과 의사가 1,2권으로 된 책을 받아보고는, 이 방대한 것을 어떻게 다 읽나 염려되었는데, 책을 펴보니 활자가 큰 것으로 되어있어서 다소 안심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해서 몇 장만 넘기면, 그다음 어떻게 되나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한다고 보신 분의 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2) 성경을 본의 아니게 잘못 해석하는 경우의 예가 1장- 6장까지
나오는데, 남어지 46장까지도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쓴 것
성 경을 본의 아니게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종류를 저는 6 가지로 구분해서 각각 그 실 예를 1장-6장까지 싫었습니다. 그리고 46장까지의 모든 글들도 다 잘못된 해석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시정하여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바로 해석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들입니다.

3) 각 장마다 질문으로 시작
각 장마다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성경에 대해 전연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앞에 있는 질문들은 보지 말고, 각장의 글을 먼저 읽고 나서, 성경 이야기 내용에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고 생각되시면, 질문을 읽어 보시는 방법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 “나는 이미 아는 바가 많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꼭 문제부터 읽고 난 다음에 본문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그 렇지만, 질문의 목적은 정답을 찾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을 대할 때 이미 굳어진 어떤 선입관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입관(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을 가지고 읽으면 100번을 읽어도 새로운 깨침을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곧 성경이 닫힌 책으로 남고, 살아있는 말씀이 죽은 말씀으로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함께 읽으실 경우에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아 이것이구나!” 하고 새로운 깨침이 올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내 현실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가짐으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두 가지를 첩부하겠습니다. 책을 읽으시다가 인용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표시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과, 이 책에서 제시하는 성경이야기 해석이 우리 자녀들에게 도움이 될 것들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심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상 안내의 말씀을 마치고 책 내용의 중요한 부분들 몇 가지를 골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떠나라는 책 제목 설명
“떠나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책 표지에 요약해서 나와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책 제목을 떠나라고 한데 대해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창 세기는 거의 전부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이 긴 이야기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디 어디를 떠나라”는(창12:1)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살던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오신 여러분들의 이민생활도 “떠남”에서 시작되듯,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 아브라함의 이민생활 역사도 “떠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도 노예로 있던 백성을 인도하여 이집트를 “떠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떠나라고 하셨을 때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떠나라고 하셨지요? 그 목적이 무엇인지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떠나서 내가 보여 줄 곳으로 가면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그가 화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에 되게 하려는 것이었답니다.

사 람은 화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복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 그리고 그 후손이 과연 복의 근원이 되는 이 목적달성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이 성경의 길고 긴 이야기의 내용인 것과 마찬 가지로, 떠나라는 제목을 부친 이 책의 내용도 이 목적에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말의 중요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1.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 누가 복의 근원이고 누가 화의 근원일까?
2. 모든 떠남이 다 하나님의 뜻일까?(떠남과 현실 도피)
3.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우리 현실 생활에 어떤 뜻이 있을까? (현실생활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4. 창조이야기는 “무에서의 창조”(없는 데서 있는 것을 창조)를 말하나?
5. 창조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좋은 일이, 행복이, 먼저 있다가, 후에 궂은 일이, 불행이, 생기는 것으로 말하고 있을까? 아니면 반대일까요?


1. 누가 복의 근원? 화의 근원?
대 통령으로 선출한 부쉬라는 사람이 지난 8년간 전 세계에 화의 근원이 되었을까? 복의 근원이 되었을까? 죤 케리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더 현실적인 질문을 한다면, 이락전쟁을 찬성한 맥케인과 그 전쟁을 반대한 오바마 두 위원 중 누가 더 복의 근원이 되고, 누가 더 화의 근원이 될 수 있을까? (국민의 관심이 경제 문제로 돌려진 요즘에는 극소수의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내게 하고,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중산층에게는 세금을 내리는 정책을 말하는 오바마 위원을 “사회주의자”요 “재산재분배자”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덜 내게 함으로 나눠먹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맥케인의 주장에 오바마는 파이가 더 커지지 않고 줄어들고 있다고 맞섰습니다. 세제를 통해서 부자들이 더 큰 부를 축척하게 하는 것도 “재산재분배”일 텐데? 누가 더 혜택을 누리느냐? 에서 다른 것뿐이고.)

우리나라의 예를 든다면, 김일성주석과 이승만 대통령 누가 더 우리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었고, 누가 더 큰 화의 근원이었을까?

또는 여러분이 아는 집안에, 또는 여러분 집안에 들어온 김모라는 어떤 며느리가, 또는 이모라는 어떤 사위가, 집안에 복의 근원이 되었을까? 아니면, 화의 근원이 되었을까?

사회의 일원이 되고, 다른 집안의 며느리가 되기도 하고, 사위가 되기도 할 자식을 화의 근원이 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품격으로 키우는 일에 성공하는 이민부모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이민성공자라는 말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나기 이전에는 화의근원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살던 그 곳에 누군가가 화의 근원이 된 사람이 있어서, 떠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가 종전까지 있던 그 곳에는 무엇인가 잘못 되어 있었고, “불행했었다.”는 말이 됩니다. 행복을 위해서 “불행에서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떠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2. 모든 떠남이 다 하나님의 뜻일까?
그 렇지 못하다는 예를 성경에서 두 가지 들고, 우리 사회에서 흔한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한 가지 예는 창세기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와 그의 몸종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못 낳자, 몸종 하갈의 몸에서 아들을 얻도록 주선해서, 아들을 얻으면 후사로 삼기로 합니다. 과연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라는 몸종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재산 상속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하갈을 학대합니다. 학대에 못 이겨서 집을 떠납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죽음 일보 전에 이릅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질문으로, 모자의 사연을 들어 보고는, “널 학대하는 사라가 있는 그 집으로 돌아가서 억울함을 참으며 살라.”고 합니다. <불의한 학대를 그저 참으라고 하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런 떠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올바른 떠남이 못되고, 잘못된 현실도피이기 때문입니다.

출 애굽기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면, 모세가 젊었을 때, 하루는 노동자를 감독하는 이집트 작업감독관이 자기와 같은 민족인 한 노예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것을 더 볼 수가 없어서, 홧김에 그를 쳐 죽이고는 모래에 파 묻어버립니다. 왕에게 그 살인사건이 알려진 것을 알고, 거기를 떠나서 미디안 광야에 가서 숨어 살게 됩니다.

그가 이집트 작업감독관을 살해했지만, 노동자의 학대는 오히려 더 심해 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서 노예해방운동 인도자로 할 일을 하라고 합니다. 모세의 떠남은 잘못된 현실에서의 도피였기 때문이겠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보는 쉬운 예를 들어보십시다. 어려움에 빠질 경우, 견디기 어려운 고민에서 떠나려는 시도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장 흔한 예는 고민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술을 마시는 장명입니다. 고민이 지나쳐 견디기 어렵고, 절망에 빠지면, 거기서 떠나려고, 최악의 경우에는, 뉴스에 종종 나오듯 자살 사건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살 보다 더 단호한 떠남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여배우의 자살이 또 있었습니다.

모든 사연이 각각 천차만별이지만,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잘못된 처지에서, 곧 불행에서 떠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 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떠남은 살던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주실 새 땅으로 들어가서 사는 떠남입니다. 불행에서 생명을 끊어버리는 떠남이 아니고, 불행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행복에로 들어가 행복하게 사는 떠남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저 떠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고, 떠나서 주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떠나되 끝장내지 않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삶을 살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 성경의 창조 이야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 이야기가 우리 현실생활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성 경의 창조이야기의 목적은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생성과정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 줌으로, 사람이 화의 근원이 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의 지혜, 신앙적 지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과학시간에 쓸 교과서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삶의 현실에서 피할 수 없는 불행에서 행복을 창조해나갈 수 있을지, 신앙생활의 지혜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 그 목적입니다.

강연 제목 "떠나라"는 말에 이어서 "혼돈에서 질서로”라는 말이 더해졌는데, 이 "혼돈"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에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 "혼돈"이라는 말만이 아니고, "어두움"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하신 분이시고, 어두움에서 빛을 창조하신 분시라는 말입니다. 과학 교과서라면, 혼돈에서 질서가 어떻게 생겼고,  어두움에서 어떻게 빛이 생겼느냐? 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설명할 것인데, 성경에는 "어떻게" 라는 설명이 없이, 그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는 “어떻게?”라는 과정설명이 아니고,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의 것을? 그리고 왜?  누구를 위해서? 이런 창조를 하셨느냐? 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렇게 만드신 것을 사람에게 주시고, 잘 돌보라고 하셨다고 함으로, 사람을 위하되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행복의 동산 에덴동산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사람은  마땅히 할 것이 있고, 마땅히 해서는 안될 것이 있고, 이를 꼭 지켜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거기서 쫓겨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결국 창조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는 행복의 조건을 말하면서, 동시에 불행의 원인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의 목적은 사람은, 처음부터(“원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행에서 어떻게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 래서, 오늘 우리 강연 제목 “떠나라: 혼돈에서 질서로”라는 말은 “떠나라: 어두움에서 빛으로” 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인데, 더 나가서, 우리 현실생활과 직결되는 말로 고친다면, "떠나라: 불행에서 행복에로”, 또는 “떠나라: 궂은 일에서 좋은 일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창조이야기(성경)는 “무에서의 창조”(없는 데서 있는 것을 창조)를 말하고 있을까?

흔히 창세기 1장 이야기를 “없는 데서 있는 것을 창조한” “무에서의 창조”라고 이해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창 1장 3절 이하에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이전 상태에 대해서 창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2:2 에는,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나서, 온 땅을 적셨다”(창2:2-6)라고 했습니다. 곧 사막과 같은 좋지 않은 첫 상태에서 물댄 동산과 같이 좋은 둘째 상태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혼돈한 땅” 또는 “형체가 없고 아무 것도 없어 황량한 땅”과, “어두움 밑에 있는 깊은 물,” 그리고 “위에는 하나님의 영이 휘돌고 있었고, 그 밑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있었던 이 물을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지라 하셨고(창1:6), 하늘 아래 있는 물도 한 곳으로 모여 땅이 드러나고 바다가 되라고 하셨다(창1:9)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도 이미 있는 흙을 빚어 만드셨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창조이야기는 없던 식물과 생물을, 없던 해와 달과 별 등을, 그리고 없던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무에서의 창조라고는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이런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5) 창조이야기(성경)는 우리의 삶에 좋은 일이, 행복이, 먼저 있다가, 후에 궂은 일이, 불행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반대일까요?

사 람마다 체험이 다르고 생각도 달리 할 수 있겠지만, 흔히는 행복이 먼저 있다가 불행이 나중에 따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볼 때는 처음에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나중에 불행하게 되고,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경지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이야기에서는 “맨 처음에 혼돈과 어두움이”있었고, 하나님은 바로 여기서 창조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곧 먼저 행복이 있었는데 다음에 불행이 따랐고, 처음에 좋은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궂은 일이 따랐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순서를 바꿔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이 창조주신앙의 독특한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불행에서 행복을 창조하시고, 궂은일에서 좋은 일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점을 단도직입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창조이야기 속에서 찾는다면(이점은 책에는 쓰지 못한 점입니다만), 엿새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하는 중에서 하루의 창조를 마칠 때마다, 그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셨다고? 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창조 이전 상태가 좋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현실도피의 예로 들었던 아브라함의 첩 하갈 이야기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몸종제도에 희생되어 첩이 된 불행에서 도망치지(현실도피) 말고, 되돌아가서, 고통을 견디면서라도 한 생명의 어머니가 된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창조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창조주신앙 공식을 그대로 인간 역사에 적용시킨 것이, 출애굽기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노예 됨의 불행에서, 자유인의 행복을 창조해야 한다는 사명을 모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성 경은 신앙을 가지면 궂은 일, 불행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은 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신앙을 가졌다면, 사람에게 닥치게 마련인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창조하려는 그 길을 가야하고, 궂은 일속에서 좋다고 할 만한 일을 창조하려는 그런 길을 남은 힘을 다해서 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창조이야기가 우리 현실 생활에 주는 교훈입니다.

이런 해석이 옳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댄다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의 가장 핵심적인 뜻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처럼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닮게 만드셨다는 말일까요?

(1)  사람도 하나님처럼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할 수 있게 만드셨고, 어두움에서 빛을 창조할 수 있게 만드셨다는 말이고, 좋지 못한데서 좋은 것을 창조할 수 있게 만드셨다는 뜻이고, 불행에서 행복을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둘 째 중요한 뜻은 사람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어떤 폭력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모세 이야기에서 폭군을 상대한 노예해방운동에서 무력을 쓰는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성경의 기본 입장은 “전쟁 절대 반대론”인 것입니다.

만일 미국 교회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의 이런 뜻을 바로 깨닫고 실천할 수 있었다면, 곧 반전운동을 했었다면, 이락전쟁을 계기로 한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행복에서 불행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불행에서 행복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또 하나의 다른 불행의 씨를 심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전쟁은 사람을 복의 근원이 아니고, 화의 근원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 박사님께서 추천의 말을 마치면서, 우리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말 세 가지를 골라 써놓으셨는데, 여기서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1) “잘못된 성전종교를 헐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잘못된 앎도 헐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앎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헐어야 하는데, 이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잘못 알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어두움과 혼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1권, p. 29).

(2) “악마는 성경을 모르는 자가 아니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인 것입니다”(제 1권, p. 90).

(3) “어느 민족의 부모든 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달라지도록 모든 종교는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 자식은 죽지 않고, 남의 자식은 죽어도 좋다는 식의 기도는 어느 종교인의 기도이건 바른 기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 1권, p. 262).

기독 신도로서 전쟁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면 이런 잘못된 기도를 드리게 마련입니다.

이 셋 중 둘째 인용 구; (2) “악마는 성경을 모르는 자가 아니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인 것입니다”는 말에 대에 조금 부언하겠습니다.

행복의 두 가지 조건
“ 떠나서,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면, 복의(행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에는 복(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조건은 떠남이고, 둘째 조건은 떠난 다음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조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떠난 다음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독신도에게는( 성경의 권위만이라기 보다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천주교인에게는 다르지만)  오직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갈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되고, 화의 근원, 불행의 근원,이 되게 마련이라는 어려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는 이마에 뿔이 나고 험상궂은 그런 생물이 아니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또는 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살인보다도 더 큰,  가장 큰 죄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대답이 창세기(3장 에덴동산 이야기)에 나와 있는데,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뱀이 하나님의 뜻과 달리 해석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도록 한 것이 화의 근원, 불행의 근원이 되게 한  가장 큰 죄였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가장 큰 죄가 뱀이 인도한 잘못 된 성경공부, 잘못된 설교였다는 말입니다.

행복의 둘째 조건 곧 성경해석의 문제가 어렵다는 문제가 우리 현실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부쉬 정부가 이락전쟁에 뛰어 들 때, 당시 야당인 민주당 상원위원들도(오바마 위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쟁에 찬성했답니다.  그 때, 부쉬의 당선을 지지한 교회들은 물론, 신 구교 대부분의 교회들도 전쟁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만일  제가 미국 어느 교단의 목사였다고 합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성경의 입장은 전쟁절대반대론”이라는 강연을 했다고 합시다. 이런 강연에 대해서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항의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성경에는 “의로운 전쟁, 예를 들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공전쟁 등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고.

이 런 질문에 대한 치밀한  해답을 책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모세이야기 해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거기를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만 오늘 이런 주장이 적어도 성경에 근거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요약해서 말씀드림으로 제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성경에  악마의 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써놓았고, 더 나가서, 구약에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는 것을 써놓았습니다.

그 증거로는 예수님께서 “‘율법이 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써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도 사랑해라’”고 하신 것과 같은 대목들입니다. 이웃은 동족을 말하고, 원수는 타민족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타민족은 죽여도 좋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해석해 오던 것을 예수님은 잘못이라고 지적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고쳐서, ‘원수도 사랑하라’” 고. 곧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구약에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전제를 앞세워 놓고,  “본뜻을 찾아야만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의 본뜻을 찾는 질문”으로 각 장의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 해석이 성경의 본뜻을 찾는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  근거가 무어냐? 는 당연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옳고 글음은 그를 판정할 잣대(표준)가 있어야 합니다.  내 해석이 바른 해석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는 그 잣대가 예수님이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과 세상의 어떤 문제이건 약자와 강자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마련인데, 우선 약자의 아픔을 보시고, 그다음 약자와 강자 모두에게 옳은 길을 찾으시는 방법이었다고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쓰신 성경해석의 원리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일단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다 보면, 모든 법은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해로운 것으로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강자가 강자의 이익을 위해서 제정한 악법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 강자의 편에 서기 쉽고,  그러고 나면, 경전을 강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예 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심으로 구약의 소위 “의로운” 전쟁론을 책망하시고 부인하신 것입니다. 소위 아무리 “의로운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폭력, 무력”을 쓰는 순간, 그 전쟁은 불의한 전쟁으로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피를 흘려, 돈을 버는 무기생산업자만 살찌게 하는  살인마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해석의 잣대를 다른 한 마디로 표현하며,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강자의 힘이 강압하는 나라를 돕는 성경해석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에 도움이 되는 성경해석만이  바른 해석이라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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