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서4:26-32 사무엘 상서 15:36
“한님나라 씨”? “사탄나라 씨”? 2015/8/31 이재형목사
<2015/6/14 캘거리 한님교회에서 했던 설교문을 기초로해서 보완, 추가한 글입니다.>
<“한님”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앞에 실린 원고 “하나님”? “하느님”? “한님교회”? (1)를 참고해 주십시오.>
<…>이런 괄호 안에 이렇게 작은 글씨로 쓰인 대목은 읽지 마시고, 큰 글씨로 쓰인 설교 본문만을 계속 읽어 가시기 바랍니다.
정 읽어보시고 싶으면, 설교본문을 (몇번) 읽고 난 다음에, 참고로 읽어 보시고요. >
마가복음서 본문을 읽으면서, 지난 2,000년간
기독교의 문제는 “씨의
자람”이 아니고, “무슨 씨를 심어왔는냐?”라는 질문이 먼저 생겼습니다. 곧 “한님나라 씨?”, “사탄나라 씨?”를 심어
왔느냐? 라는 질문이
앞섰습니다.
<지난 주일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
설교에서“선악과”의 뜻을
두 가지
법조문으로 풀어
설명했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의 뜻을 (두 가지
법조문만이 아니고) 네 가지 경우(우리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2000년간 에덴동산 이야기가 어떻게 전수되어 왔는지를 보겠습니다. 인류가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은 고사 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게 만들뿐 아니라, 문제를 알송달송 더 흐리게(혼돈) 만드는 과오를 범해왔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과 이야기가 서양으로 가서 전해온 역사와 문제점
“선악과”라는 이 열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는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당장 먹고싶어 죽을 지경에 빠질 정도랍니다. 이때, 사람 마음은 먹을까 말까 망서리기라도 하지만 (뱀과의
대화), 사람 몸은 당장 달려들어 “죽더라도 먹고보자!”는 식이어서, 훌쩍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에드몬톤에서 선악과 이야기의 전수역사를 이 대목까 말했었는데, 오늘 그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면 이렇습니다.>
“잠시 숨었다가
발각되어 심문을
받습니다. 후에 죽습니다. 이 때 그
슬하에 아들이
둘 있었는데, 형이 동생을
죽입니다. 동생을 쳐죽인 이런
아들이라도 있었기에, 그를 통해서
사람족 후손이
지금까지 내려온
거랍니다.
그런데 이
첫 사람
부부가 이
열매를 먹었을
그 당시에는, 아직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조상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후, 사인이 밝혀집니다. 부인이 죽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마무도
없었으니, 타살은 아니고, 자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죽음은
다 자살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죽음은 잘못 살아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지 말았어야
할 독초나, 쥐약 같은
것을 먹었다든지, 몸과 마음에
무리한 스트레스를
주면서 잘못
살아와서, 죽을 병에 걸려
죽었다 든지가, 다 일종의
자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가 죽은
이유는, “먹지 말라”는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고, 그가 왜 그
말라는 것을
기어이 먹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글로
적어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물론
요즘같이 흔한 출판물이 아니고, 손으로
쓴 것으로 시작됩니다.>
희랍과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이 사본이 서양으로
들어갑니다. 이 무렵 또
한 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처녀의 몸에
하나님의 영기가
임해서 사람이
태어났고, 어떤 일로 죽임을
당했는데(타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는네
얼마 후
다시 온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도 기독교가 2000년간 “게으르기 짝이 없이 잠꼬대만 해 왔다”, “반성의 여지가 많다.”는 정도가 아니고, 잘못 흘러오고, 잘못 흘러가고있은
“인간고의 역사에 공범자”라는 누명을 써서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 이야기도
글로 적어, 앞에 말한
것과 합본되어, 기독교의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쳤고, 어떤 문제가 생겼나?
기독교는 이
이야기들을 주로
성전 벽에
그림을 그려서 가르쳤고, 교리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캐톨릭교에서
파생된 모든
기독교의 경전 이해와, 교리의 기본이 됩니다. <물론 경전이 대중화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수천년 그림으로
가르쳐진 내용은, 경전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
중에, 특별한 이야기들과, 둘째 사람에 대한
것들 중 얼마를 골래낸 것이 그
전부였습니다.
큰 문제는
그 내용이
제한되었다는 것보다, 이 그림들이
이야기의 본뜻까지를
바로 전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문제에 대해 착안한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식으로 2000년 전해진
것들이 성경
이야기들의 본뜻과
같을 확율은
극히 낮습니다. 경전을 직접
읽어볼 수
있게 된
것은 지금부터
얼마 되지
안했습니다. 그야말로 긴긴 암흑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전연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채, 그 본뜻을 찾는
노력도 없이, 교권유지를 위한
교리에 같혀, 수준 이하로
허왕되게, 나돌아 다닌채로 방치
됐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서구에
과학이 급성장하고, 세계 최첨단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서구문명 등에 엎혀서 들왔기 때문에, 기독교 이야기의 질도
짜임새 있는
것으로 보고(오해하고), 맹종하는
데서 생긴
폐단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본뜻이
잘못 이해된, 잘못된 씨가, 마구 확산되는
데서 생길
어려움과 혼돈이
클 것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경전에
담긴 이야기들이
민간신앙으로 전해온
전통 그대로
이어질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속에 담긴
모순에도 아무런
이론적인 작업도 없이, 교리적인 노력만 있었지, 참된 신학적인 탐구가
없이, 적당히 넘어가는 동안, 거짓과 위선이
종교체제 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면죄권
판매로 성당건축비를
충당하려 했던
일 등이겠습니다. 이 면죄권판매 행각은 종교개혁으로 끝났다고 보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금까지도 기독교의 흐름이 “성경의 예언자적 종교”의 혼을 잃업버리고, “네 죄를
사하노라.”는 식의 “성전종교” 일변도로 치달려온 기독교회 성장역사에, 어 두운 그림자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아무도 부인 못할 실예를 하나 더 든다면, 심지어 우주의
자연질서의 법칙을
말하는 과학자를, 잘못된 교리를
근거로해서, 사형에 처하기도
했고, 교리의 부당함을 말하는
성직자를 파문하기도 했던 과오 등입니다.
이 이야기가 서구가 아니고 동양으로 들어왔다면?
만일 이 (기독교)이야기가 서구로 드러가지
않고, 인도문명권이나 중국문명권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그 이야기 안에
내장된 무한한
지혜가, 당시 교권의 절대적인
“세”(권력,권세)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교리에
질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더
짜임새 있고, 멋진 이론체계로
자리잡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인도문화권에서는 이미
있었던 힌두교의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전해온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바탕에서도, 기독교보다 훨신 앞서서, 볼교의 뛰어난
이론체계를 만들어놓았습니다. 현대 과학문명
앞에서도 허구성이
들어나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계에
새로운 발전이
이뤄질수록, 그 이론체계의 심오함이
더 증명되고
덧보이게 되어갑니다. (물론 아직도
불교를 빙자한
사기행각도 있긴 할 겁니다만.)
중국문회권에도 고대부터
전해오던 이야기가
인간의 이성적인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 전수됐을 뿐아니라, 사람의 수신에 대해서, 허황됨 없는 작품을
완성해냈습니다.
문제는, 비 서구인들이, 과학문명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만을 “최고급” 종교로 오인한데서 생깁니다.
겨우 200여년 전부터
급발전한 현대
서구과확문명의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신, 비서구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이,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허구까지도, 제대로 갖춰진 이론
체계이고, 유일무이한 진리요, “최고급”종교로, 오인하게 되면서, 잘못 변종된 씨가
마구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씨비유의 의도까지도
무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서구에서 선악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고작해야 과일
나무 밑에
벌거벗은 남녀가
서 있고, 나무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원죄”라는 말은 2000 동안 일초도 쉴새없이 앵무새처럼 내뱉아오면서도, 선악과를 왜
먹지 말라고
했는지?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
갈 수
없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불행의 원인이무엇인지? 등, 경전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못본채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기껏해야 남녀간의
성관계를 유혹으로
생각하게 하는
결과가 고작이었습니다. 성에 대한
죄의식을 심화시켰습니다. 사람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는
성을 부정하는
삶이기나한 것처럼, 극단적인
문화를 창출하는가
하면, 정 반대로 성개방이란
또 하나의
극단적인 문화로
치닫는 등, 마치 인간의
문제는 성문제
밖에는 없는
것처럼 되어
온 것이
“서구 기독교문화”(?) 풍토였습니다.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마치
남녀 둘만의, 개인적인 문제만을 취급하는
것으로, 본뜻과는 달리, 축소해석을 해버리는 데서
온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오직 성적존재만으로
보는 오류가 기독교이 잘못된
교리중심적인,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발원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몇 가지의 기본적인 욕망들은 각각, 마치 다른 욕망들은 없고, 어떤 한 가지 욕망만 있는 것 처럼, 거의 광적인 행동에 몰입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특정한 한 가지 어떤 욕망에 목숨 걸고 대결하는 식의 금욕주의는 병적인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 몸이 생겨먹은 대로 그 모든 기능과 욕구가 균형을 잃지 않게 사는 삶의 지혜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가르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데서 위선이라는 거짓 “성의”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고, “성의”에 가려 그늘진 곳에 생기게 마련인 고뇌가 일때마다, “네 죄를 사하노라”는 한 마디가 만병통치 약인듯,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역사의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면묜죄권 판매행각이 중세에 끝난
것이 아니고 이런 예식에 숨겨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관계만을
다룬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회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싶다” 마음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할 때, 생기는
(~먹고싶다, ~하고싶다, ~갖고싶다, ~보고싶다, ~듣고싶다,등등) 원초적인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기는 “~싶다”는 마음은
내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싶다”는 마음은 철두철미
자기 중심적이어서, 한치의 양보도
할 능력이
없는 것이
그 본성입니다.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개개인에게 생기는
이 “~싶다”는
마음은 철두철미
반사회적입니다. < 물론
이 개개인의
“~싶다”는
마음이,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한 집단(부족이나 국가)의 “~싶다”로 커지는
경우가 생기지만,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보면, 여전히 적대관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19세기 식민주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국가간의 적대관계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많이 다스려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의, 예를 들면, 특히 조선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네 강국이
각각 한치도
양보할 수
없어하는 네
개의 “~싶다”가 역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서, 온 지구상에서
먹구름장을 띄우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산다는
말은 사회적인
관계를 바로
맺고 산다는
말인데, 이 “~싶다”는 개인주의적인
마음이 에덴동산에서(한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치 아주
어린 애기들이
처음에 하는
모든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애기는 자기의 입
말고, 또 다른 입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커가면서야, 예를 들면, 무엇을 먹거나
할 때, 엄마에게도
먹여주는 행동을
재미있어 할
줄 알게
됩니다.
장난감을 볼
때도, 자기에게 갖고 싶다는
마음이, 꼭 같이 다른
아이에게도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숫한 울음과 싸움을
거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익히게
되는, 길고도 괴로운 길(여정)입니다.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꿔지는
겉과 같은
일대 혁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님도,“어려서는 어린애 짓을
하고, 성장해서는 어린애 짓을
버린다, 젖을 먹다가 커서는
굳은 음식을
먹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유식이 당연한
길이지만, 태어날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한님나라는 “거듭나야만” 체험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개개인이 품는
이“나”의 ~ 싶다가 “우리”의 ~ 싶다”로 넓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가 -> 우리로, 그 우리가 -> 더 큰
우리로, 더 큰 우리가
->
더 더
큰 우리로
넓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사는 나라와 잘 살지 못하는 나라들 사이에 예외없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는 다 밖으로 나가서, 도적질해다가 먹고 산 “해적국가”들입니다. 잘 살지 못하는 나라들은 다 도적질 당한 나라들입니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니고, 안에서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밖에서 들어온 도적에게 몽땅 빼았긴 나라들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마다 100가마의 쌀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 고정된 100 가마의 쌀을 두고, 지배계층이 서로 자기가 더 먹겠다고 파싸움을 합니다. 반면, 해적국가들은 안에 있는 100 가마의 쌀을 그대로 두고,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힘을 합해서 밖을로 나가서, 해적노릇을 해서, 1,000가마의 쌀을 더 갖다 놓고, 푸짐하게 나눠 먹었던 것입니다. 서구의 모든 나라들이 다 이런 “해적나라”들이었습니다. 아세아에서는 딱 한 나라가 이렇게 했습니다. 어느 나라지요? 일본이지요. 한 번 원자탄에 혼줄이 터지고서도, 아직도 해적근성을 못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