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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저는 여전히 1991년도에 살고 있어요”2012.09.28 19:25



ㆍ‘유서대필 사건’ 그후 21년
ㆍ“제게 남은 시간 얼마 없어…무죄판결 못 보고 갈 수도 있어 절박”

“꼭 1년에 한번 꼴로 기자와 만나요. 후유증이 또 있을 거예요.”

21년 흘러 온 사건을 다시 맞닥뜨리자 그는 힘들어했다. 옛 악몽을 떠올릴 때마다 몸살이 도졌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오후 7시 일산 호수공원의 해저문 서쪽 하늘을 응시하는 얼굴에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야윈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기자와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1년 터울이고, 지난해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만 아니라면 견디고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저물 때마다 힘들고 아파요. 제 몸 상태라면 (무죄 판결을) 못보고 갈 수 있으니까….”


▲ ‘생의 고통’ 몸으로 옮겨와 간암 투병
2009년 재심 결정…대법 3년째 침묵


1991년 ‘유서대필 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씨(48·사진)는 말도 표정도 절박했다.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동료의 자살을 도운 파렴치한이라는 누명을 쓴 채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21년. 생의 고통이 몸으로 옮겨진 것일까. 그는 지난 5월 간암세포 제거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했다. 당장 수술받을 수 있는 몸이 안돼 본격적인 항암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생명이 위태롭지만 그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다. 대법원이 답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서울고등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고 검찰이 항고한 뒤 벌써 3년째다.

“대법원은 본안을 건드리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검찰이 대법원에 낸 항고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안 내용이에요. 이것은 ‘요건 불비’라고 봐요. 대법원이 그 판단을 지금 3년 넘게 미루고 있는 겁니다.”

항암 투병 소식이 알려진 뒤 재심을 촉구하고 그의 쾌유를 바라는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그는 “관심은 있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1994년에 제가 출소하자마자 언론에 부탁한 것은 단신처리하지 말고 길게 봐달라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한 기자가 추적해 지금까지 왔으면 많은 콘텐츠가 모이고 책 2~3권은 쌓였을 겁니다.”

한숨을 한번 쉬고 그가 이어간 말은 “그런데 다들 단편적으로만 보도하다가 끝나더라”였다. 검찰의 재항고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게 힘이 되지만, 그간에 쌓인 아쉬움과 서운함도 많았던 것이다.

“제게 시간은 빨리 안 흘렀어요. 저는 여전히 1991년도에 살고 있어요.”

벗지 못한 누명은 또 하나의 암덩어리였다. 그의 악몽도 거기서 시작되고 다시 멈췄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와 단련 때문일까. 그는 대화 내내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언론이 자신을 ‘동정’의 시선으로 조명하는 것도 극도로 꺼렸다.

“많이 누워서 지내고, 밖에 나가면 죽을 만큼 힘든 건 사실이에요. 병이 있으니까…. 하지만 언론이 저를 자꾸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으니까요.”

몸 상태를 물었더니, “컨디션은 그날그날 오르락내리락해요. 오늘은 괜찮은 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자택이 있는 일산에서 만나 사무실, 호수공원으로 옮겨 이어진 대화는 처음에 암 환자의 일상 얘기로 시작됐다. 

▲ 작년 7월 직장 근무 중 각혈 후 졸도
간에 악성 종양…지난 5월 절제 수술
지금 상태 좋지 않지만 안달복달 안해


▲ 대법원서 차라리 기각시킨다면
싸움이라도 한판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냐
검찰에 할 말 있지만 법정서 밝힐 것


-출근은 매일 하는 건가요.

“플라스틱 원료를 수입하는 무역회사인데요. 매일 출근하지는 않아요. 일주일에 두세번 들러서 한두시간 머물러요. 수술받고 나서 몇달째 제대로 출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간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 전에 징후는 없었나요.

“지난해 7월 사무실에서 일하는 중에 갑자기 속이 안 좋았어요. 뭔가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입으로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어요. ‘왜 이러지?’ 하면서 피범벅이 된 화장실 바닥을 휴지로 닦고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졸도했죠. 119구급차에 실려 한강성심병원까지 갔고 거기서 또 피를 쏟았어요. 머리가 핑핑 돌았어요. 한번에 1.2ℓ씩 피를 쏟았대요. 간경변에 의한 위정맥류였어요. 정맥류를 지지는 간단한 수술을 하고 10일 만에 퇴원했고 이후 3개월에 한번씩 피검사와 CT촬영을 했어요. 올 1월까지는 이상이 없었는데 4월 검사 후 의사 표정이 어두웠어요. 간에 1㎝ 정도의 혹이 2개 보이니 MRI를 해보자고 해요. 악성으로, 암이었어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길래, 제가 ‘자릅시다’ 했죠. 5월23일에 수술했어요.”

-수술 경과는 어땠나요.

“의사가 경과가 좋다고, 밥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수술 후 이틀 만에 또 피를 토했어요. 이번엔 위출혈이었어요. 내시경을 넣어 지지는 과정에서 제가 피를 많이 흘린 터라 자꾸 정신을 놓으니까 외과 담당의가 ‘여기서 돌아가신 분을 한둘 본 게 아니다. 정신 차리면 살고 정신 잃으면 죽는다’고 해요. 그 소리만 겨우 알아듣고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그게 끝나니까 흉부외과에서 X-레이 검사 결과 폐에 물이 꽉 찼다며 ‘숨을 잘 못쉬겠죠?’해요.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관으로 물을 빼냈어요. 3주 후 퇴원했는데 2~3일 지나니까 또 어지러워요. 응급실에 갔는데, 이번엔 하혈했어요. 지져놓은 정맥류가 또 터진 거예요. 그렇게 5~6월은 내내 병원에서 지냈어요.”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1차 수술 후 병원을 옮겨 서울대암병원에서 재검을 받았는데 결절이 20개 있대요. 아직 확진은 아닌데 의사는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다’고 해요. 6월까지 계속 피가 터졌던 터라 외과에선 당장 손(수술)댈 수 없다 하고 그 외의 처치들은 결절이 작아서 못한대요. 의사는 ‘수술하는 게 근본적 치료방법이 아니니까 장기를 바꾸세요’라고 권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일단 추적치료를 하기로 한 거예요.”

74㎏이던 체중은 5개월 새 9㎏이 빠졌다. 그나마 몸의 저항력을 키우는 보조치료 차원에서 요즘 메가비타민주사를 맞았더니 밥을 좀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는 초연해보였다. “안달복달해봐야 소용없으니까”라고 했다.

“간암 생존율을 잘 모르겠어서 주위 의사들에게 물어봤죠. 대다수가 치료나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한 분이 아주 드라이하게 대답해주더군요. 제 나잇대의 재발 확률은 70%이고, 재발시 3년 내 사망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요. 5년간 생존하면 완치라고 하는데 완치율은 5%도 안된다고 해요.”

어찌될지 모른다는 듯 그 지점에서 그는 웃어버렸다. 21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1991년 5월8일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부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은 현장에 남겨진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며 김씨의 자살 방조 혐의로 강씨를 기소했다. 나중에 뒤집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 감정 결과를 증거로 삼았고, 법원은 강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다. 


-김기설씨 분신의 배후로 지목된 것을 언제 알았나요.

“김기설씨의 분신은 8일 오전 9시45분쯤 TV뉴스에서 처음 접했어요. 바로 사무실로 뛰어나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참했어요. 그런데 직후부터 뭔가 이상했어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검찰에 불려가고, 참고인으로 간 후배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어요. 제가 배후로 지목된 건 5월18일 강경대의 장례식날 석간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유서는 김기설 본인이 쓴 게 아니라 전민련에서 같이 근무하던 K모씨가 쓴 것으로 알려졌다’고 씌어 있더라고요.” 

-충격이 컸겠어요. 당시 시인 김지하씨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쓰고,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공격해 파장이 컸지요.

“(배후로 지목된) 첫 느낌은 외려 ‘웃긴다’는 거였어요. 이건 뭐 맥락도 없고…. 필적 보면 금방 알 텐데. 그러곤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도 쉬었죠. 조직사건으로 엮지는 않는구나 생각했어요. 안동대 김영균씨가 5월1일 분신했을 때 검찰청에서 제일 먼저 한 게 배후 수사였든요. (청와대에서) 오더받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없어도 만들라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분신배후가 안되니까 조직사건으로 엮어 왕창 잡아들였죠. 5월10일 윤용하씨(민주화운동직장청년연합 회원)가 분신했을 때도 검찰은 배후수사한다고 난리였어요. 그리고 배후가 있다는 이야기를 안기부를 통해 김지하나 박홍에게 의도적으로 흘리자 그 인간들이 떠든 거예요. 죽음의 굿판? 어둠의 세력? 하면서요.”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이 수련이 덜 돼 아직도 당시 기억을 떠올릴 때 말이 곱지 않다고 했다.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과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다가 자진출두할 때 진실이 밝혀질 것이란 믿음은 있었나요.

“반반 정도로 생각했어요. 재판이 진행될수록 판이 이상해진다고 생각했죠.”

-검찰 수사과정에서 강압은 없었습니까.

“이틀씩 잠을 안 재우는 건 기본이고 의자에 앉지도 못하게 해 선 채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검사들이 바통터치해 심문하는데 별 질문은 없어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마약 수사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욕만 해대고 ‘운동권 새끼들이 빨갱이나 뽕쟁이랑 똑같다’는 이야기만 반복했어요. 지쳐 죽을 만하면 주임검사 신상규가 들어와 취조하는데 창틀에 맥주를 10개 이상 쭉 깔아놓고 질문해요. 자기는 배고프면 맥주 마신다며 뽕쟁이들 수사할 때도 그런대요. 취기가 오르니까 말이 거칠어지고 주먹으로 때렸어요. 취조받던 곳이 11층이었는데 살짝 열어놓은 문 사이로 보이는 맞은편 방에는 포승줄, 수갑, 쇠사슬이 벽에 죽 걸려있었어요. 저한테 ‘널 달아매겠다. 4시간이면 자백할 거다’라고 협박했었죠.” 

-당시 수사관이나 검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아직도 술 많이 드세요? 폼이란 폼은 다 잡으시더니 펀치력은 좀 세지셨어요?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법정에서 하고 싶어요.”

-3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어떤 생각이 가장 많이 들던가요.

“대전교소도였는데요. 생각 안 하려고 애썼어요. 신문도 일부러 안 봤고요. 밖의 일을 잊기 위해 뭔가 집중할 게 필요했죠. 일본어 사전 한권을 다 외운 후에 한의학을 공부했어요. 그것도 외울 게 많거든요. 감방에서 실력을 다진 박사급 수감자가 있었죠.(웃음). 공부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한 것이죠.”

강씨는 1994년 8월에 만기출소했다. 3개월 후 1991년부터 그를 기다려온 약혼자 이영미씨와 결혼했다. 생활은 고됐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1년여 일하며 틈틈이 번역을 하고 막노동·학원관리직·벤처기업 일도 해봤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 월급을 떼이기도 했다. 아내는 두 아이를 출산하고 과외를 하며 생계를 도왔다. 아내와의 결혼은 돌아가신 장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장인어른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월남해 거제도에 계셨던 분이세요. 반공사상이 투철하신 분이죠. 그런 분의 생각을 바꿔놓은 게 검찰이에요. 91년 당시 여자친구 집에도 수사관들이 들이닥쳤어요. 학원강사였던 아내는 검찰의 등쌀에 직장에서도 잘렸어요. 머리채를 잡힌 채 검사실로 끌려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검찰이 집까지 찾아와 난리를 치니 장인어른이 한판 붙으신 거죠. 그날 장인어른이 아내를 불러 앉히고 ‘너 그 사람 배신하면 안된다’고 했대요. 그리고 그날 칡 등을 넣어 술을 직접 담그셨는데 제가 출소해서 처음 찾아뵐 때 3년간 묵힌 그 술을 꺼내 따라주시더라고요.” 

유서대필 사건은 16년이 흐른 뒤에야 진실의 실마리가 풀렸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1991년 당시 국과수가 감정한 문건들을 3개 사설감정기관에, 또 새로 발견된 강기훈씨의 필적들을 국과수와 7개 사설감정기관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유서와 강기훈씨의 필적은 다르다는 일치된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고,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 직후 검찰은 항고했다. 2009년 9월21일 사건을 접수한 대법원은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결정을 미룬 채 침묵 중이다. 

-진실화해위 결정과 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나왔을 때 심경이 어땠나요.

“진실화해위 결정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거의 판결문에 준한 요건을 갖춘 내용이어서 상당히 고무됐어요. ‘한걸음 갔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그게 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으로 이어지긴 어려울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런데 1년8개월 후 고법이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판결을 뒤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죠. ‘반쯤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법원이 사건 본안까지 세세히 건드리고 진실에 가깝게 신판례를 적용했거든요. 하지만 이게 대법원에 이렇게 오래 머물러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대법원이 결정을 왜 미룬다고 생각하세요.

“선배들이 한 거니까요. 법의 정신은 실종되고 자기들 이익이 먼저인 거죠.”

-대법원을 향해 하고싶은 말이 많을 듯해요.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잖아요. 제 몸 상태로는 더 오래 끌면 못 보고 갈 수도 있고요. 제가 세상에 없어서 동생이 대신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제가 마무리짓고 가려는 이유이고 저로선 아주 절박해요. 이 정도 이야기하면 대법원도 귀가 뚫려 있는 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을 거예요. 마음같아선 ‘차라리 기각을 시켜라, 싸움이라도 하게’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지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잖아요.”

삶을 뿌리째 뒤흔든 민주화운동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학(단국대 화학과 82학번)에서도 민주화추진위원장과 삼민투위원장을 맡아 제적과 수배를 받았고, 85년 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때 구속되기도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생이 그리 긴가요? 끝판이 안 좋아서이지, 저는 제 신념을 따른 거예요.”

그런 그도 부모 이야기를 묻자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목소리도 떨렸다. 강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가난과 전쟁으로 초등학교밖에 못 마친 어머니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권태평씨는 아들이 구속되자 곧바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몸 담고 구명운동에 나섰다. 옥바라지를 하며 쓴 수기 <너를 위한 촛불이 되어>를 1994년 발표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2005년 70세에 성공회대 사회과학대에 입학했다. 만학의 배경을 “데모만 하는 아들의 속을 알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2007년 담도암이 간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 숨을 거뒀다. 당뇨를 앓던 아버지도 장기부전으로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평생의 제 멘토셨어요. 자식들의 이야기를 폭넓게 공감하셨고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품으려고 하지 않았죠. 어머니가 어느날 그러세요. 오랫동안 다니시던 교회의 지인들에게 제가 구속된 후 도와달라고 했는데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분이 그러더래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야지, 대드니까 그런 거다. 그리곤 뭘 도와달라고 하느냐. 난 자식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 워낙 가까웠던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칼에라도 베인 것처럼 쓰리고 서러우셨나봐요. 감옥으로 면회온 어머니께 제가 필요한 원서를 잘 받아적지 못한다며 짜증을 부렸던 일이 있어요. 두고두고 후회돼요. 어머니는 면회하시면서 제 앞에서 한번도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어요.” 

-추석은 어떻게 보낼 계획이세요.

“부모님 성묘 가야죠. 저희집 근처에 모셨어요. 동생들(남동생은 전남대 교수, 여동생은 변호사)은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지방에서 일산을 오르내리며 고생이 컸던 터라 이번 추석은 그동안 못간 사돈댁에서 보내라고 했어요.”

2시간쯤 지났다. “한바탕 얘기를 쏟아놓으니 마음이 휑하네요. 이제는 대법원에 물어봐주세요. 오래 기다릴 수도 없고 답이 있기는 있을까요.” 이 말을 끝으로 그는 호수공원을 걸었다. 운동 삼아 아주 천천히 걷는다고 했지만, 몇걸음도 떼지 못하고 멈춰섰다.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국가권력과 암덩어리와 싸우다 지친 그는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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