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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와 ‘사탄’의 탄생

반공은 신사참배의 원죄를 씻어내기 위한 한국 교회의 몸부림…한국전쟁으로 증명된 사탄, 이후 교권다툼의 무기로 사용하기도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전쟁 같은 60년을 살아낸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기 전까지 한국 사회를 규정한 다양한 요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변수가 ‘반공’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워 반드시 꺾어야 할 적이었고, 그를 위해선 인권도 민주주의도 웬만한 정도의 국가 폭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한 열렬한 반대를 정체성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산주의에 피해 입은 서북 지역이 주류


한국 교회의 보수성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축적돼왔다. 한국 개신교를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한 가장 큰 두 변수는 ‘신사 참배’라는 원죄와 동족끼리 피 흘린 3년간의 ‘전쟁’이었다.


강인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기독교와 역사> 24호에 발표한 논문 ‘해방 이후 4·19까지의 한국 교회와 과거 청산 문제’에서 “만약 반민특위가 조기에 무력화되지 않고 교단의 현직 지도자들을 줄줄이 소환해 재판정으로 보냈다면, 그리고 가공할 3년간의 전쟁이 친일파 청산과 관련된 모든 논란을 일거에 덮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남한의 개신교는 시민사회에서 고립돼 심각한 정체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정통성이 없는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어쩌면 영원히 씻어지지 않을지 모를) 고통스런 과거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더 크고 흉악한 ‘사탄’을 끌어내야 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였고, 그들은 6·25라는 비극을 일으킴으로써 사탄임을 몸소 증명해냈다. 반공에 대한 한국 교회의 혐오는 공산주의를 사탄 또는 적(敵)그리스도로 등치하는 ‘사탄론’, 한국을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으로 꼽는 ‘선민의식’과 결합해 폭발력을 얻었다. 그들의 교의는 단순했고, 그만큼 대중 호소력도 높았다. 공산주의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서북 지역 기독교도들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점이나 한국에 기독교를 이식한 남장로회·남침례회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 자체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한국 기독교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도 한국 교회의 보수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한국 교회에서 서북 지역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1938년을 기준으로 볼 때 평안북도(8만5822명)와 평안남도(7만9229명)의 기독교 신도 수는 전국의 1, 2위를 다툴 정도로 교세가 컸고,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자리매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두 거두 박형룡(1897~1978)과 한경직(1902~2000)도 이 지역 출신이었다.



보수적인 한국 교회는 반공을 앞세우기만 한다면 독재와 전쟁과 1980년 5월의 학살과 타협하는 일도 불사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한국 교회는 공휴일 제정·적산 불하·군종 제도·포로수용소 선교·기독교식 국가 의례 등 특혜를 입었다.

‘예장’ 교권다툼 중에 제기된 색깔론


그러는 사이 교회는 정교 유착에 길들여져갔다. 그들은 5·16 군사 쿠테타에 대해 “이번 5·16 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개선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1961년 5월29일 한국기독교연합회 성명)라 했고,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긴박한 우리나라 상황으로 보아 현 정치 체제는 김일성 유일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한국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 <크리스챤신문> 1975년 7월26일)이라고 칭송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정교유착의 상징은 1968년부터 연례행사로 정착된 대통령 조찬기도회였다. 1980년 8월6일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치러진 조찬기도회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규식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군사정권기 한국 교회와 국가 권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광주의 숱한 인명을 학살하고 정권 찬탈에 성공한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한국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과 굴종의 기록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정치와 종교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정교유착을 일삼았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들이대며 민주화를 바라는 교회 내 혁신 세력들을 억눌렀다.

문제는 교회의 보수세력이 반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여러 갈래로 쪼개는 교권 다툼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여겨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박형룡 박사의 ‘합동’과 한경직 목사의 ‘통합’으로 갈라서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갈등의 시작은 1957년 보수적 신학의 지도자였던 박형룡 박사가 학교(총신대)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뇌물을 먹이려다 사기꾼에게 속아 3천만환이라는 거액을 날린 이른바 ‘3천만환 사건’이 불거지며 시작됐다. 이 사건으로 박형룡은 학교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보수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NAE·전국복음주의협의회)은 이듬해인 1958년 부지 매입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학 논쟁을 일으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려는 반대파 에큐메니칼(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연합운동) 쪽과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WCC 쪽은 중공 승인, 공산국가와의 공존을 미국 정부 쪽에 건의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보수파들의 눈에 WCC는 ‘용공’이었고, 그에 가입하려는 에큐메니칼 쪽은 불순분자들이었다. 그 갈등 이후 한국의 ‘장자 교단’은 1959년 경기노회 총회 부정 선거 사건을 거치며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갈래로 찢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무서운 속도로 산업화하고 있었고, 한국 교회도 성장을 제일로 아는 물량주의적 가치관을 내면 깊숙이 체화했다. 한국 교회의 최고 목표는 ‘양적 성장’이었다. 이는 해마다 목표를 세워놓고 되풀이되는 전도대회와 ‘절대 배가’라는 구호 속에서 현실화된다. 신도가 늘어난 뒤 필요한 것은 새 ‘성전’ 건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들에게 거액의 헌금을 요청했고, 이를 믿음의 척도로 삼았다. 그로 인해 축적된 몇몇 대형 교회의 부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했을 빈자나 약자와 공유되지 못했고, 부자세습이라는 불협화음을 낳았다.


사회는 변하는데 수구로 퇴락해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는 일반적인 사회 논쟁과 달리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숨지고 부활한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결국 하나라는 것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관계없는 견해 차이들로 서로를 ‘이단’이라 욕하고 ‘사탄’이라 정죄해왔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속에 한국의 보수 교회는 사회의 민주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반공과 친미의 논리에 갇힌 ‘수구’로 퇴락해갔다. 1970년대까지 시대를 바라보는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인식이 크게 달랐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2007년 그 차이는 점점 건너기 힘든 절망적 간극으로 변하고 말았다.

2003년 이후 한국의 주류 교회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반공·친미 기도회를 여는 등 공세적인 모습으로 사회 참여에 나서고 있다. 2004년 10월4일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김한식 목사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존경하는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미 동맹의 약화를 가슴 아파했고, 베트남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이라크 전쟁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개정 사립학교법을 재개정하라며 머리를 깎았다. 구교형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은 “역대 정권들에게 특혜를 받아온 교회들이 교회와의 관계를 객관화하려는 김대중 정부 이후 많은 소외감을 느꼈고, 노무현 정권 들어 단행된 사학법 개정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한국 교회가 이상 모델로 여기고 있는 미국 교회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점이나, 보수적 ‘자기 체험’에 갇힌 대형 교회 목사들이 최근의 사회 변화를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분석들도 있다.

그렇지만 절망의 극한 속에 희망은 있다. 김진호 한백교회 목사는 “대형 교회들이 본격적인 세력화에 나서면서 일정 부분 사회적인 검증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강단 위의 설교와 대중을 향한 정치 연설은 다르다.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목사들의 언행이 이제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와중에 보수적인 목사들도 사회 변화를 일정 부분 학습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도 변할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좀 걸려야 할 것 같다.” 김진호 목사가 말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교회와 사회와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출구가 막혀버린 진보 교회
신자수 감소하자 진보적인 중소형 교회들만 직격탄 맞아

한국 교회의 주류가 보수 일색이라는 데는 이견을 달 수 없지만, 군사독재 정권에 탄압받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 주요 사건으로는 △강희남 목사 구속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도시산업선교회 사건 등이 있다. 1988년 2월29일에는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에 균열을 일으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선언’이 있기도 했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그에 대한 반발로 최근 들어 서울시청 앞 ‘기도회’를 기획·주도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이 1989년 12월 설립됐다. 현재 한국 교회는 보수 중심으로 재편돼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올 출구가 막혀 있다.

이는 한국 교회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는 2005년 현재 861만6438명으로 1995년보다 15만 명 줄어들었다. 1985∼95년에 230만 명이 늘어난 것에 견주면 놀라운 감소세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중소형 교회들이었다. 이미 탄탄한 물적 토대를 갖춘 보수적 대형 교회들은 신자 감소 수를 견딜 만한 체력을 갖추고 있다. 교회의 위기 앞에서 진보적 교회들의 목소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7/01/0210030002007011206430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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