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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프레드릭 더글라스를 기억하는 까닭은?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 프레드릭 더글라스
강희정 (rivernwill) 기자


▲ '노예 해방 운동의 선구자'인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만년의 모습이다.
ⓒ The Child's World 프레드릭 더글라스

미국에서 2월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를 기념하는 달(Black History Month)이다. 2월이 되면 미국의 곳곳에서 노예시절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 인권 투쟁의 시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역사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것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을 벌이곤 한다.

이 전통은 카터 우드슨(Carter G. Woodson) 박사가 1926년에 아브라함 링컨과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생일이 들어있는 2월에 기념행사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들이 많은 미국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처참한 노예신분에서 놓여 자유민으로 해방을 누리게 되는 데에 가장 공헌이 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 링컨과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생일이 들어있는 2월을 기념월로 잡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날에도 아브라함 링컨의 업적은 크게 치하를 받고 있는 반면,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 노예해방을 위해 평생을 치열하게 싸웠던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이름은 역사에 묻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메릴랜드 주에서 태어났다. 다른 흑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1817년 내지는 1818년 2월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해리어트는 노예였고 그의 아버지에 대해 알려진 바 없으나 해리어트가 노예로 있던 농장주가 그의 생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노예로 태어난 프레드릭 더글라스

당시 노예들은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으나 가족을 돌보는 일에 노예들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아까워 하는 노예 주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다른 곳에 노예로 팔거나 보내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외할머니가 있는 농장에 보내졌는데, 프레드릭의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밤중에 12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맨발로 걸어 갔다가 잠들어있는 아이 얼굴을 잠시 보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되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프레드릭이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나 그가 그의 어머니를 본 것은 서너 차례 밖에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의 외할머니마저 다른 농장으로 팔려 가게 되어 어린 프레드릭은 비로소 자신이 노예신분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레드릭은 볼티모어 시로 보내진다. 거기서 만난 새 안주인은 프레드릭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후에 그것을 알게된 그녀의 남편이 흑인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불법이라면서 크게 화를 내자 그녀는 그를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글자를 깨우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알게 된 프레드릭은 배움에 대한 욕구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는 심부름을 가는 길에 가난한 백인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가며 그들로부터 공부를 하여 책과 신문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프레드릭은 15살 때에 흑인 교회에 어린 아이들을 모아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


▲ 당시에 직업적으로 '노예를 길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로부터 맞은 흔적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남북전쟁 때 북부군에 참여했다고 한다.
ⓒ Time Life Books 노예 길들이기

그의 주인은 프레드릭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노예 길들이는 사람’(Slave Breaker)에게 보냈다. 그곳에 보내진 노예들은 매일 같이 채찍으로 맞다가 덜 반항적이 되면 주인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당시 직업적으로 노예를 길들이던 사람이 여덟 명의 노예들을 채찍으로 때린 대가로 4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프레드릭은 이 곳에서 채찍으로 길들여지던 중 어느 날 힘으로 맞써 ‘노예 길들이는 사람’을 제압하면서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후에 그는 도망을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했으며 뉴욕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다

당시 백인들 가운데에서도 노예 폐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Abolitionist)이 있었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케 하는 사람들”(The Liberator)라는 신문을 발간하고 있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그를 만난 뒤에 노예제 폐지운동을 위한 연설자가 되어 곳곳을 돌아 다니며 강연을 하게 된다.

연설을 뛰어나게 잘 하는 까닭에 그가 과거에 노예였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따라 프레드릭은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에 이른다. 제목은 “미국인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삶의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이다. 그 때가 1845년이었다.

이 책을 펴냄으로써 ‘도망자’였던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자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프레드릭이 영국에서 만난 두 친구들은 그가 노예 신분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700불이 넘는 돈을 주고 프레드릭을 자유의 신분이 되게 해주었다.

19개월만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자유의 몸이 된 프레드릭은 ‘북극성’(The North Star)이라는 이름의 반노예운동 신문을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1년에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이 벌어지자 프레드릭은 아브라함 링컨을 만나 노예제 폐지를 건의한다.

처음에 링컨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링컨의 목적은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남북을 통합하는 데 있었고 노예폐지를 반대하는 일부 북부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전쟁 와중인 1863년에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한다.


▲ 1855년 '노예 길들이는 사람'이 여덟명의 노예를 채찍으로 때린 대가로 4달러를 받았다고 하는 영수증이다.
ⓒ Time Life Books 노예 길들인 값 지불 영수증

링컨에게 노예해방을 건의하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남부에 있는 노예만을 해방의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북부군이 흑인들도 군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허락하자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흑인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여 많은 흑인들이 북부군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마침내 1865년 4월 9일에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났고, 1866년에 의회는 남부 흑인들에게 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2년 후에는 이 법률을 더 이상 바꿀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 조항을 헌법에도 포함시켜 13번째 수정헌법이 만들어졌다.

1870년에는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도록 하는 14번째 수정헌법이 제정되었다. 남북 전쟁 중에 흑인들을 참전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등 남북전쟁의 종식과 노예해방운동에 앞장 섰던 공로를 인정받아 1877년에 프레드릭은 연방 보안관이 된다.

1895년 2월 2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으나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가슴에 ‘진정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싸우다 암살 당한 마틴 루터 킹보다 1964년에 흑인 인권법을 제정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 신장에 더 크게 기여했다는 발언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 인식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브라함 링컨의 업적에 가려져 역사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이름을 우리의 기억 속에 복권시켜야 마땅하다. 2월에 프레드릭 더글라스를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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