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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족벌 언론'이라면 한 번 가져보고 싶다"
[화제의 책]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권력과 싸우는 기자들>
기사입력 2009-04-18 오전 7:59:54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조지타운에 사는 한 아줌마는 늦은 밤에 잠이 안 와 응접실로 나와 불을 켰다. 그리고 커튼을 열고 맞은 편 건물을 바라보는데, 한 사무실에만 불이 켜져 있고 남자 몇 명이 분주히 움직이는데 모습이 수상해 보였다. 직감적으로 도둑으로 생각하고 '911'로 전화를 걸었다.

현직 대통령 닉슨과 왜소한 이류 신문 <워싱턴 포스트>의 길고도 무서운, 그리고 처절한 싸움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앞 건물은 워터게이트 호텔이었고, 불이 켜진 사무실은 19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전국위원회 사무실로 쓰는 곳이었다.

1972년 6월 16일 이날부터 닉슨이 사임한 1974년 8월 9일까지의 2년여는 <워싱턴 포스트>는 물론 미국의 전 언론이 역사상 가장 긴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긴장감을 느꼈던 당사자는 끝까지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닉슨 자신이었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면서 수천 권의 책과 각종 영화로 만들어진 정치적 사건도 드물 것이다. 그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고, 중요성 못지않게 '딥 스로트(Deep Throat)' 같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극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핵심은 부패한 정치 권력에 맞서 언론이 제4부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국민의 '배울 권리'를 위해 스스로 2주 만에 설계를 마치고 건립한 버지니아 대학이다. 또 하나는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할 것이다."라는 말로 국민의 '알 권리' 강조한 일이었다. 국민이 교육받지 못하고, 언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을 정부가 검열해서는 안 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이러한 제퍼슨의 철학은 200여년의 미국 역사를 관통하면서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현실화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회한 정치인이 훼손시킨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언론이 바로 잡은 것이다.

워터게이트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인으로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을 지휘했던 벤자민 브래들리의 영문 자서전 를 읽은 것은 책이 출간된 직후인 1997년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 15년차 기자였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언론이 과연 이런 일도 할 수 있는가 하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혔었다. 간접 경험이었지만 정말 값진 것이었고, 직접 실천해 보고 싶은 경험이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반드시 읽혀져야 한다는 생각에 번역 출판 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서평을 쓰게 됐다.

<프레시안북스>에서 이번에 나온 벤자민 브래들리의 자서전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A good life : Newspapering and Other Adventures)>는 늦었어도 반가운 책이다. 영문 제목 '좋은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공한 언론인이 걸어 온 삶의 궤적을 통해 미국 언론의 실체는 물론 정치·사회 등 언론의 환경에 대해서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금상첨화인 것은 당시의 주인공 우드워드와 번스틴의 평전인 알리샤 셰퍼드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Woodward and Bernstein : Life in the Shadow of Watergate)>도 같이 번역돼 나왔다는 점이다. 이 두 책은 워터게이트를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입장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서 언론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두 책의 번역자가 오랜 동안 기자 생활하며 필명을 날렸던 언론인들이어서 용어에서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한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 책들에 덧붙여 또 다른 주인공인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이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을 더 한다면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한 완벽함을 얻을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을 쏜 기자들

▲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알리샤 C 셰퍼드 지음, 차미례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의 저자 셰퍼드는 방대한 자료 및 주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드스틴(우드워드+번스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그려냈다. 우드스틴은 셰퍼드의 이 책으로 역사의 기록자에서 다시 한 번 역사의 기록이 됐다.

셰퍼드는 우드스틴이 초년병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하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할 수 있었던 잠재력에 관심을 가졌다. 우선 사주였던 그레이엄의 자서전에 묘사된 두 사람을 살펴보자.

"처음부터 우드워드는 뛰어났다. 침입 사건 취재를 위해 누구를 법원에 파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반면에 1966년 가을부터 <워싱턴 포스트>에서 일한 칼 번스틴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글은 잘 썼지만 불성실한 근무 태도는 그의 유명한 부리부리한 눈만큼이나 사회부에서 악명이 높았다.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에 그를 투입하는데 장애가 된 것은 벤 브래들리가 그를 해고하기 직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 번스타인을 구제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수도권 부장 해리 로젠펠드였다. 그는 번스타인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열심히 취재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주 그레이엄의 평가는 우드워드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지만, 번스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셰퍼드는 보다 기자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밥 우드워드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5년간의 해군 복무를 마친 후 1970년 <워싱턴 포스트>를 찾아가 2주간의 수습 생활을 했다. 당시 그는 수도권 부장 로젠펠드 밑에서 일했다. 그러나 2주 후의 평가는 취재는 잘 하는데 도대체 기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우드워드는 퇴짜를 맞고 인근 메릴랜드 주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기자로 첫 발을 내딛는다. 거기서 기자로서의 근성과 끼를 발휘한 그는 1971년에 <워싱턴 포스트>에 경력기자로 들어가 이듬해 워터게이트 취재팀의 일원이 된다.

매릴랜드 대학을 중퇴한 번스틴도 다른 신문사를 전전하다 1966년 <워싱턴 포스트>로 자리를 옮긴다. 기자들이 부르는 원고를 타이핑하는 카피 보이에서 출발한 번스틴은 기자로 승진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다닌 어느 신문사에서도 '망나니' 같은 호칭을 달고 다녔지만 기사 하나만은 탁월하게 썼고, 여러 차례 수상 경력도 쌓았다. 그 점을 눈여겨 본 <워싱턴 포스트> 간부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대통령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드워드는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깔끔한 모범생이었고, 번스틴은 머리 안 감은 더스틴 호프만처럼 지저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기자로서의 '끼'가 넘친다는 사실이었고, 이러한 '끼'가 어쩌면 취재 기자로서는 지루하게 이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을 만나 한없이 분출됐다는 것이 셰퍼드의 인물평이다.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은 영문 제목 'Life in the Shadow of Watergate'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워터게이트 이후 세계적인 명사가 된 우드스틴의 활동과 개인적인 생활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연속극의 결말처럼 모범생 우드워드는 무려 12권에 달하는 논픽션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워싱턴 정가와 언론계에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고, '망나니' 번스틴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취재 수첩을 고가에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이 책은 워터게이트의 최대 미스터리인 '딥 스로트'가 세상에 드러나는 과정을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히 보여준다. FBI의 2인자 출신인 마크 펠트가 33년 만에 잡지 <배니티 페어>의 특종에 의해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은 마침내 대단원이 마감 된다. 그레이엄은 자서전에서 '딥 스로트'의 정체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도 몰랐고, 철저히 우드워드와 브래들리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사주와 기자가 무릇 어떠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풋내기 기자들이 대통령을 꺾기까지는…

▲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벤 브래들리 지음, 김영배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2년차 우드워드와 6년차 번스틴에게 누가, 어떻게 그 험하고 긴 취재 여정을 맡겼는가도 당연히 드는 의문 중 하나다. 그것은 벤자민 브래들리라는 뛰어난 편집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브래들리는 사실성과 객관성이 부족한 기사는 두 사람에게 몇 십번이고 다시 쓰게 했지만, 어느 순간에도 신뢰를 놓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모함과 공격을 뚫고 끝까지 같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때가 덜 묻은 신참들이 기득권에 매몰된 고참보다 그런 새로운 유형의 대형 사건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 브래들리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이류 신문이었던 <워싱턴 포스트>를 일류인 <뉴욕 타임스>의 반열에 올려놓기로 결심을 하고 거기에 적합한 인물로 브래들리를 선정, 1965년 자회사였던 <뉴스위크>에서 불러다 편집국장에 앉혔다. 1968년에 편집인이 된 그는 이후 무려 23년간을 그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브래들리는 그레이엄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고, 용병에서도 커다란 재량권이 있었기 때문에 선봉장을 신참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백악관 표현대로 삼류 절도 사건에서 대형 사건으로 커지자 공을 탐낸 전국부가 담당 부서인 수도권부에 일체의 권한을 넘기라며 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브래들리는 수도권부와 두 사람을 끝까지 고수했다.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브래들리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1991년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을 떠나 같은 회사 경영인이 되는 날까지의 기록이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펜타곤 페이퍼 사건과 워터게이트를 거치면서 브래들리라는 그레이엄의 베팅이 어떻게 <워싱턴 포스트>를 일류 신문으로 탈바꿈시켰는가 하는 부분이다.

우드워드는 처음에 브래들리를 무지하게 무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했다. 브래들리가 다가오면 몸이 떨렸다고 했다. 그 무서움은 언론인으로서의 기사에 대한 사실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엄중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워터게이트가 진행되면서 모두 무서워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에서는 혹시 정부가 부랑자를 시켜 우드워드나 번스틴의 호주머니에 마약을 집어넣고 바로 연행해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고 레너드 다우니 2세는 미국의 한 언론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회고했다. 그는 브래들리에 이어 <워싱턴 포스트> 편집인으로 17년 동안 일했다.

다우니 2세에 따르면 1974년 한 미군 병사가 헬리콥터를 훔쳐 타고 백악관 잔디밭에 내리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편집국은 비상이 걸렸고 퇴근했던 다우니 2세는 다시 불려나가게 됐다. 이 때 그의 부인이 같이 나갈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워터게이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해 있던 닉슨이 워싱턴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워싱턴 편집국 간부들부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연행해 갈 것이고, 그 같은 일에 대비해 부인이 따라나서겠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다우니 2세의 이러한 증언은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이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사실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브래들리는 2명의 신참을 이끌고 사실성과 객관성이라는 기사의 가장 근본을 가지고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 나갔다. 조그마한 실수만 나와도 끝장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는 워터게이트 기간 동안 기사의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기사를 최소한 한 명의 최고 편집 책임자가 읽고 승인을 할 것, 둘은 다른 매체의 워터게이트 기사는 반드시 하나하나 재확인을 한 다음에 기사화할 것, 셋은 어떤 일련의 사실들이든 최소한 두 개의 독립된 취재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1972년 11월 선거에서 닉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자 <워싱턴 포스트>는 거의 좌절할 지경이었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자 닉슨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워싱턴 포스트>에 대한 보복이었다. 닉슨의 한 측근은 신문 에디터들을 모아 놓고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브래들리를 표현했다.

"벤 브래들리는 이제 자신이 미국 저널리즘의 건강한 주류를 오염시킨 오만한 엘리트 무리들의 리더가 되었음을 알게 됐을 것입니다. 만약 브래들리 그의 패거리들과 더불어 간접 정보와 가십과 소문을 저녁 삼아 즐기던 조지타운의 칵테일 파티장을 한번이라도 떠나보았다면, 비로소 진정한 미국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 백악관에서는 독립적인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악관에 있는 그 누구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FBI의 조사를 확인했습니다."

밤낮 없이 기사를 썼지만 사태는 <워싱턴 포스트>에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1973년 5월에 이르자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브래들리는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진이 빠졌다. 워터게이트 말고는 가족 생활도 없이 살았다. 위험부담이 크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전쟁을 벌이는 판이었다. 패배하면 신문의 명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고 우리 모두 새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할 판이었다. 편집증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과 개인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고 판단해 5000달러를 들여 전화선을 샅샅이 점검했지만 도청 징후는 없었다."

그러나 극적이 반전의 순간은 머지않아 찾아 왔다. 닉슨의 보좌관이었던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대통령이 말하고 듣는 모든 것은 모두 녹음된다고 증언한 것이었다. 녹음 테이프에는 모든 진실이 들어있을 터였다. 법원 명령에 의해 제출한 테이프는 18분 30초가 지워져 있었다. 그로써 닉슨은 종말이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어." 닉슨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에게 말했다.

이런 족벌 언론이라면…

마지막으로 워터게이트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이다. 벤자민 브래들리가 없었으면 우드워드와 번스틴이 없었겠지만, 캐서린 그레이엄이 없었다면 아마 브래들리도 없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어려서는 아버지 유진 마이어의 손을 잡고 <워싱턴 포스트>를 들락거렸고, 커서는 직접 <워싱턴 포스트>에서 일한 경험도 있어서 신문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면서 성장했다. 억만장자 사업가인 아버지 마이어는 1933년에 파산경매에서 인수한 <워싱턴 포스트>에 직접 기사도 썼는데, 영국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 부인의 밀애를 처음으로 폭로한 기사가 그의 작품이다. 마이어는 망해가는 신문을 인수한 후 사재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으면서 제대로 된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에 힘썼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캐서린 그레이엄이 남편의 불행한 죽음 후인 1963년부터 <워싱턴 포스트>를 지휘하게 된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사실 가장 용감했던 사람은 그레이엄이었다. 앞부분에서 브래들리가 푸념했듯이 워터게이트 보도가 실패하면 그와 2명의 신참들은 다른 곳에 직장을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아버지부터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운명이었다.

1971년 봄 <워싱턴 포스트>는 월남전의 허위를 파헤친 <펜타곤 페이퍼>의 보도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회사에 백악관이 기사를 빌미로 보복을 가해 온다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몰랐다. 보도 여부를 놓고 회사 간부들이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레이엄은 다른 곳에서 회의 결과를 전하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는 부정적인 분위기가 더 압도적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은 프리츠 비브라는 <워싱턴 포스트> 이사회 의장이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전화를 걸어 그레이엄에게 여러 가지 정황을 설명하면서 "저…, 저라면 아마도 하지 않을 것 같네요."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오케이, 갑시다. 보도합시다."라고 외쳤다.

이 결정은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엄청난 용기를 불어 넣었으며, 마치 워터게이트를 위한 사전 연습 게임 같이 훌륭히 치러졌다. 그레이엄 자신도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겪으면서 정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 감각을 익히게 됐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다음 경기는 워터게이트였고 결과는 승리였다.

이후 <워싱턴 포스트>는 <뉴욕 타임스>와 나란히 불리는 위치에 올랐고, 캐서린 그레이엄은 미국 대통령보다 만나기 힘든 인물이 됐다.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그레이엄을 보면서 미국인들이 붙여준 별명이 별로 아름답지 않은 '볼시 워먼'(Ballsy Woman)이다. 의역하면 '철의 여인'이고 직역하면 '×알 달린 여인'이다.

현재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은 그레이엄의 아들인 도널드 그레이엄에 이어 손녀인 캐서린 웨이머스가 맡고 있으니, 한국식 표현으론 4대에 걸친 족벌 언론이다. 그러나 이런 족벌 언론이라면 우리도 한 번 가져보고 싶다.
/김상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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