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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밟기, 대적 기도 그리고 영적 전쟁의 진실
진짜 적은 부패, 비리, 특권, 거짓, 탐욕, 탄압을 지배 수단으로 삼는 세력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15

입력 : 2010년 10월 28일 (목) 15:19:09 [조회수 : 3891] 한종호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봉은사 '땅 밟기 기도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유사한 사례들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20여 년 전부터 소위 '영적 전쟁'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타났던 부분이다.

악을 소멸시키는 '영적 전쟁'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신앙적 열정은 귀중하다. 그러나 그 열정이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의 생명을 상실하는 위험한 무기가 된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죄로 유혹하는 각종 사회 구조적 현실과 권력, 부패한 문화와 이를 유지하는 자본과의 정면 대결은 외면한 채,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능멸과 적대적 대결이 영적 전쟁의 형태로 선포되는 것은, 그들을 함부로 사단 내지 사단의 하수인으로 취급하는 기독교 제국주의이며, '사랑의 선교'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이탈하는 행위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말을 했다가 화를 자초한 일이 있다. 또한 한때 이 대통령의 고향인 포항의 정장식 시장은 기독교 신자 기관장들의 모임인 홀리 클럽에 가입하고 세계 성시화 명예준비위원장을 하고 시 재정의 1%를 성시화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공표했다가 불교계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세속을 자신의 종교로 지배하려는 의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고 '성시화'(聖市化)를 시도한다면 이는 정복주의적 선교관이 낳은 영적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토록 혼미하게 만들고 어렵게 하는 사연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너무나도 분명한데, 이와 같은 문제는 영적 대결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은 채 타 종교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은, 출발점인 '적의 규정'부터 잘못된 것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구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불교의 영'을 물리치기 위해 불교인들이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는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무리를 지어 무단으로 침입, '대적(對敵) 기도'를 했다고 한다. "불교의 영에 힘입어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전직 대통령들의 비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들 '영적 군사'들이 땅 밟기를 하고 기도를 한 직후부터였다"고 하니, 그러면 '기독교의 영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곤경은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당시 전직 대통령의 비리는 불교의 영과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이들 기독교인들의 영적 전쟁이 비리를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면, 불교는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종교라는 말인가? '하나님나라의 전략 요충지'와 '흑암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 그리고 '전투 중인 전략 요충지'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성지(聖地)와 반-성지(反-聖地)라는 지역적 개념에 묶여 있는 매우 반기독교적 자세이다.

'정당한 전쟁'의 문제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적'을 규정하는 일을 전제로 한다. 그 '적'은 공동체의 선과 안전을 위해 존립을 허락해서는 안 될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언제나 정의를 명분으로 삼는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동원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정당한 전쟁'(just war)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기초가 된다.

그런데 만일 적에 대한 규정이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고한 존재를 적으로 몰아 궤멸시킬 대상으로 만들었으니, 희생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 죄를 저지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적의 규정이 옳을 경우라도 전쟁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바가 그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충분히 적대적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폭력을 동원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이로써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쟁이 형태상 승리로 끝난다 해도 그것은 승리자 자신을 인간 이하로 황폐하게 만들 터이니 자멸과 다름없는 길이다. 나아가 이 전쟁이 공동선 방어라는 명분 뒤에 은폐된 누군가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주도권 행사의 방식이 된다면, 그것은 탐욕적인 점령과 정복의 도구가 될 뿐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일각을 차지하면서 선포되고 있는 이른바 ‘영적 전쟁’의 구호는 이러한 각도에서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일반적 양상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독교는 자칫 영적 전쟁을 앞세워 무고한 영적 생명에 손상을 입히고 영적 폭력을 휘두르는 결과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제국주의의 폭력

1492년 서인도제도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가 만난 토착 원주민들이 노예로 부리기에 알맞다는 관찰을 기록한다. 그의 기독교 신앙과 인간을 노예화하는 일이 전혀 갈등 없이 결합하였던 것이다. 이 완벽하다시피한 모순은 이후 유럽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맹아적 단계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의 뒤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유럽인은 기독교 문명의 세례를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토착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린다. 스페인 군대의 잉카 문명 파괴는 가장 악랄한 경우였다. 유럽의 기독교 문화와 충돌하는 일체의 것은 모조리 사단의 역사로 여기고 멸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로써 이들의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토지를 빼앗고 잔혹한 종족 학살을 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켜 이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복종의 훈련'을 강화하면서 그 모든 행위를 '가나안 정복과 그로 인한 영적 전쟁의 승리'라는 주제로 귀결시켜 나갔다.

기독교도로 개종한 노예에 비해 그렇지 않은 노예는 매우 가혹하게 다뤄졌고, 유럽 백인에게 도전한 노예는 '주인에게 덤벼든 노예'가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도전한 노예'로 규정되어 무서운 집단 린치를 당했다. 흑인 노예의 도전은 사단의 영이 피부가 검은 이들에게 스며들어 일어난 일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을 내쫓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때리고 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정당화시켜 나갔다. 주인에 대한 노예의 저항은 그로써 사단의 역사가 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는 이들 백인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맥락은 후일 KKK단으로 이어진다. 흰옷과 두건을 쓰고 백인우월주의와 기독교 문명의 승리를 외치면서 중앙에 십자가를 세워 불을 지르고 자기들끼리의 동지적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흑인에 대한 린치를 가했던 이들의 내면에 '영적 전쟁의 승리에 대한 열정'이 끓어올랐다는 점은, 종교적 정복주의가 가지고 있는 폭력의 얼굴을 보여 준다.

주지하는바, 선교사들의 비기독교 문명권으로의 진입은 순수한 사명감으로 이루어졌던 경우만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과 결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순수한 선교적 사명감의 경우에도 선교사 자신의 문화적 한계와 신앙적 우월감이 작용하여 제국주의의 형성에 이바지한 점이 적지 않다.

'사단의 영이 지배하는 지역에 대한 영적 전쟁'을 앞세워 비서구 지역 주민의 기(氣)를 종교적 복종의 가르침으로 짓밟고, 제국주의 침략을 '문명과의 만남'으로 호도하면서, 그 의식 세계를 백인화하거나 노예화하는 역할을 담당한 기독교 역사의 기록은 도처에 존재한다. 토착 주민의 역사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아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인 양 가르침으로써 이들의 역사적 기억과 역사의식을 말살해 버리고 주체적 자아를 신앙으로 바로 세우도록 돕기보다는 백인 기독교인을 모델로 삼는 과정을 영적 변화와 성장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인식시켰다. 성서의 메시지와 토착 주민의 역사가 어떤 의미로 연결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는 완전히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며, 선교사의 모국은 이들 토착 기독교 개종자들에게 '영적 성지'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비서구 지역의 역사는 토착 주민의 의식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서구 기독교인의 역사관이 이들의 영적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의 영적 전쟁의 결과는 비서구인의 주체가 껍데기가 되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각 족속 나름의 개성을 학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앙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고 그로써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는 중대한 사건의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압도적인 모습은 서구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편입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서구 지역의 기독교는 자신의 역사적 삶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을 것이며, 거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모습을 서구 기독교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고 묵상하며 감격하는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주의적 선교관은 아시아·아프리카 등지의 고유한 영적 토양을 분쇄해버렸고 프랑스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알제리 인의 정신 상태를 '검은 피부, 흰 가면'(black skin, white mask)이라고 표현했던 프란츠 파농의 지적대로, 자신의 것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자기 비하의 죄의식'을 심어 놓았다. 흑인으로 태어난 것, 아시아인으로 태어난 것,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태어난 것,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쁨이며 각기의 모습 안에서 고유한 섭리가 실현되는 당당한 존재라는 영적 자신감을 병들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된 서구 기독교인에 대한 열등감을 치유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 주체 회복의 과정은 상당한 신학적 토론의 고투를 거쳐야 했다.

보잘것없는 갈릴리 백성들을 그 존재 자체로 적극 인정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인해 멍들어 버린 자아의식을 바로잡아 나가려는 노력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진정한 영적 대결은 다름 아닌, 정복주의적 사고에 기초하여 영적 전쟁을 선포하는 기독교 신앙의 현실과 먼저 벌여야 하는 것임을 의식한 결과이다. 그 기원이 서구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의 본질적 성격이 인간의 존엄과 고유한 영적 세계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것이면 이에 저항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배와 정신적 폭력을 '영적 전쟁'으로 위장하는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배 세력에 맞서서 하신 일이었음을 새삼 발견한 결과였다. 사단은 어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 전쟁의 목표물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예수께서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성지 지역주의'를 타파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하셨으며,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그곳을 성화시키는 능력으로 활동하신다.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그곳이 곧 성지이지, 따로 그런 지역이 있어서 그렇지 않은 지역에 대하여 영적 전쟁을 선포하는 본부로서의 자격과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발상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활동의 근거지를 지역적으로 제한시키는 잘못을 범할 뿐이다. 그런 생각이 파고들 때, 갈릴리 출신의 나사렛 예수를 멸시하면서 신앙의 위계질서를 내세우는 예루살렘파와 같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또한 비서구 지역의 역사 속에서도 활동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신앙적 권위를 일방적으로 또는 독선적으로 강요한 서구 기독교 제국주의와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교만이자 폭력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영적 현실은 황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어떤 특정 지역을 '흑암 왕국의 근거지'로 보는 것은 마치 영적 존재들의 지배 영토가 따로 있는 것처럼 전제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속 신앙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부엌 귀신, 술집 귀신, 사창가 귀신 등을 인정하는 모순을 저지르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 이를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능력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집단적 발언 그리고 현실 운동으로 격파하는 일이다. 가령, 어떤 지역에 사창가가 밀집해 있다면 그것은 그 지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역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 지역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사창가 형성의 구조적 요인부터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누가 왜 그곳까지 들어와서 자신들의 생존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는 사창가 지역과의 영적 전쟁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곳에 와서 몸을 파는 여인들의 삶이 그렇게 된 까닭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목할 때 우리는 한국사회의 경제적 현실, 교육 체제, 직업 구조, 가정 문제, 정치 윤리 등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전반적 현실들이 기독교 신앙의 사회 윤리를 기초로 하여 변화하기를 바라고 요구하며 이를 위해 실질적인 움직임을 벌여 나갈 때, 사창가 형성의 사회적 기초는 상당한 정도로 허물어질 것이다. 또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사창가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이들 방문자의 삶에도 우리의 눈을 돌리도록 한다. 환락가를 찾는 이들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어 그곳에 갖다 쓰는가 하는 문제는 보지 않은 채, 특정 지역의 현상적 성격만을 주목해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악은 다른 곳에서 저질러지고 그 악의 일부분을 이곳에서 뜯어 먹을 뿐이라면 우리의 영적 안테나는 정녕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우리의 영적 안테나는 정녕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성서는 영적 전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철저하게 '예언자 전통'에서 찾는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짓밟는 사건과 세력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발언'하기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며 특히 하나님나라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고 강렬하게 반응하게 한다. 교회의 권세가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의로움이 충만하기를 부르짖는다. 교회의 권세가 중심이 될 때 정복주의는 주도권을 쥐게 되며, 거기에서 인간의 욕심과 편견, 지배욕이 '정당한 영적 전쟁'으로 포장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 문명의 수호라는 구호는 종교적 사기이기가 십상이다. 그것이 파괴해 버린 인류의 귀중한 자산이 너무도 많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 전쟁의 선포자'라는 자격을 내세우기보다는 도리어 영적 전쟁의 대상으로서 더 깊이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부자가 되어버린 교회만큼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가 어디 있는가? 부정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고 권력의 우산 아래서 자기 몸을 불린 교회만큼이나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가 어디 있는가? 타락한 문화를 생산해내는 자본 자체를 질타하지 못하는 교회에서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어떤 영적 변화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실로, 하나님의 의로움이 기준이 될 때 인간을 죄로 이끌고 가며 고통을 주는 '진짜 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적'은 인간의 영적 위엄에 상처를 내며, 인격적 권리를 짓밟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정체가 은폐된 그 누군가'이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영적 전쟁은 이러한 세력과 존재의 정체를 세상에 그대로 폭로하고 이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이 나라의 분단, 부패, 비리, 특권, 변절, 거짓, 탐욕, 탄압, 미혹을 지배의 수단으로 삼는 세력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영적 전쟁은, 결국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사단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사단의 근본적인 역사(役事)를 저지하는 일은 방지한 채, 엉뚱한 곳에서 우리의 신앙적 열정과 능력을 조잡한 수준으로 소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수함이 우리의 신앙적 사명이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이 사회에 종교로서의 기독교 정복주의적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그 생명력의 충만을 이루는 선한 싸움-그 싸움으로 우리가 거칠어지거나 공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겸손하고 온유하며 아름다워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은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종호 / 목사·<기독교사상> 편집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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