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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언론, '애완견'인가 '감시견'인가
“목사의, 목사에 의한, 목사를 위한 언론”

http://www.newsnjoy.co.kr/rnews/series-1.asp?cnewsDay=20010104&cnewsID=5

지난 12월 19일 MBC 'PD수첩'에서 방영한 “한국의 대형교회”라는 프로그램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초교파적인 단합으로 발족시킨 「한국교회언론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거듭된 방영중지 요청을 무시한 MBC의 처사를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시청거부운동 등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에 나설 뜻을 분명히 하였다. 종교와 언론의 대결, 흔치않은 싸움판이 벌어진 것이다.

그동안 방송에서 기독교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때마다 항변의 소리와 저항의 몸짓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반향은 그리 크지 못했다. 대부분 사이비 종파나 한 두 소형교회를 그 대상으로 삼은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형교회, 그것도 여러 교회를 한꺼번에 도마에 올렸으니 그 파장이 여느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민재판과 다름없는 언론의 횡포”라는 교계측 주장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재판”이라는 언론계 주장의 양보 없는 팽팽한 긴장은 전례 없는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이 어느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양쪽 모두 약점과 함께 상당한 부담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언론을 함께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
사실 이번 방송에서 문제된 대형교회 목회세습이나 교회 재정에 관한 의혹 등은 MBC가 새롭게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일이다. 교계의 개혁적인 단체나 인사들은 대책위의 입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번 기회에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실도 교계 측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MBC 또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추진 중인 언론개혁운동의 대상일 뿐 아니라 만민중앙교회나 금란교회 문제를 다뤘을 때 겪었던 소란의 아픈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또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언론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회의 목탁으로서 존재가치를 지닌다면 교회는 영혼구원과 함께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갖는다. 따라서 “공의가 하수와 같이 흐르는 정의로운 사회건설”이라는 목표는 종교와 언론을 함께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가 된다. 종교와 언론에 이토록 큰 기대를 거는 것은 공권력과는 다른 의미의 막강한 시민동원 능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이 두 권력기관이 상호협력하지 못하고 대결하고 있는 현실은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번 대결이, 앞서 예상한대로, 명확한 결과가 가려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면 이는 종교와 언론 양쪽 모두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고 혼란을 겪는 것은 힘없는 시민들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시민의 자격”으로 이번 사태를 점검해 봐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사람 살 만한 세상 건설의 기대를 져버렸다면 언론과 교회 양쪽 모두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MBC에 대한 교계의 비판은, 한국교회의 긍정적인 면은 무시하고 부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MBC는 목회세습과 재정에 관한 의혹을 거론한 후, 이 부분 모범을 보이고 있는 교회들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일단 공정성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사태에 관해 <국민일보>는 “교회문제는 교회에 맡겨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세속의 방송사가 교회 문제를 거론하는 일 자체가 “오만과 독선”이라고 공격했다. 이번 보도로 어려움을 겪게 된 교계 인사 입장에서 가능한 주장일 수 있으나,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평신도 입장에서는 정반대 의견도 가능하다.

지난 한 해 동안 기독교 관련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면, 목회세습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사태 외에도 <스포츠투데이>의 음란성 논란, CBS 권호경 사장의 부적절한 처신에 따른 파업사태, 기독교 기업 <이랜드>의 노동자 탄압, 부천 모 목사의 목회 실패에 따른 방화, 모 신학대학 부학장 목사의 채권 비리, 목사 사모인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의 금융비리, 그리고 예장통합측 총회장 선거의 금품 수수 비리 등 그 숫자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방송은 이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만 주목했을 뿐 대부분 뉴스의 한 두 꼭지에 소개하거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모두 합쳐도 최근 논란이 된 가수 B양의 동영상 파문만큼도 방송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쪽에 치우친 불공정 보도도 문제지만,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사건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보다 심각한 원초적 왜곡일 수밖에 없다.
 
종교문제에 대한 방송사의 보도 양이 워낙 적은 만큼 그 질에서도 문제가 발견된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할 뿐 그 배후를 파헤치는 본격적인 해설이나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93년 ‘할렐루야기도원’ 김계화 원장이 5천명의 신자들을 이끌고 MBC를 거의 점령했을 때도, 99년에 만민중앙교회가 MBC에 난입하여 프로그램을 중지시켰을 때도, 그리고 98년 금란교회 신자 수백 명이 사옥주변에서 시위를 계속했을 때도, 겉으로 드러난 사건에만 초점에 맞추었지 그 근본적인 원인인 교회 내부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 등에 대해 제대로 비판한 적이 없었다. 목회세습 문제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세습보다 “목사의 교회 사유화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수많은 지적에 어떤 언급도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학자 장석만은 “매스컴의 종교 기사는 단순 사실보도나 ‘높으신’ 분의 하나마나한 소리로 뒤덮여 있고, 가끔 눈길을 끌기 위해 종교적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꾀를 부리기도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강준만 교수는 최근 <인물과 사상>(제16호)의 “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하는 글에서 종교 문제 비평에 대해서 언론은 종교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겸양의 미덕’을 앞세워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차피 민심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과 지식인들마저 피하기만 하는 한국교회엔 과연 어떤 문제들이 쌓여있는지 살펴볼 차례다.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교인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미국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그레니어는 한국을 “부활절 주간의 바티칸을 제외하고는 가장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 기독교는 죽었다”고 탄식하는 목소리도 있다. 모순돼 보이는 이 두 발언 가운데 전자는 한국교회의 화려한 외면, 그리고 후자는 그 내면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놀라운 한국교회의 성장이야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일인만큼, 흔치않은 이번 기회에 사망선고를 받은 한국교회의 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 기독교가 죽었다는 첫 번째 근거는 “한국 기독교에는 교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책위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는 5만여 교회, 10만여 목회자, 그리고 1천 200만 성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진정한 교인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비록 자신이 소속된 교회나 교단의 의견과 판단이라 할지라도 이를 중립적이며 주체적으로 평가하고 형량(衡量)하여 발표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신앙인”을 뜻한다. 중세시대에는 그 누구도 교황청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의 신도들은 교황으로부터의 각종 의견과 명령에 대해 의심할 수 없었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개체’의 역할을 강요받아 왔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벽을 깨뜨린 후, 개신교의 신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의 능력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는 ‘능동적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예수의 피흘림으로 지성소 휘장이 찢긴지 2000년,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교회에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인으로서의 신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담임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성도는 어리석은 양떼”라는 변할 줄 모르는 원칙 아래서 목회자의 의견에 이의를 다는 일은 스스로 왕따가 되는 일이다. 이번 방송 이후 인터넷에 오른 수많은 격려의 글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말할 수가 없어요. 더욱 열심히 싸워주세요” 하는 내용이다. 모처럼 용기를 내 교회 문제를 세상에 알렸던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사랑장로모임’마저 교회측과 협상에 들어가 이번 MBC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교인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도 ‘교인의 우민화(愚民化)’를 한국교회의 첫 번째 치명적 약점으로 들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는 교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없다. 5만여 숫자를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에 교회가 없다는 말은,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신앙인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킴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마치 하나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것처럼 조직되는데, 이때 테이블이라는 공유된 세계는 그 구성원들을 서로 “관계시키면서 공시에 서로 분리하는 이중적 네트웍”을 제공한다. 즉 테이블은 구성원을 관계시킴으로서 공공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서로를 분리시킴으로써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은 마치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놓였던 테이블이 요술같이 사라진 것처럼, 성도들이 이제 더 이상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동시에 어떤 것에 의해서도 관계되어 있지도 않게 되었다. 테이블이 사라졌다 함은 공공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함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자유로움을 잃었음을 뜻한다. 공공의 이익에 무관심하면서도 함께 몰려다니는 부류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아무리 곱게 보아도 ‘무리’, 또는 ‘패거리’라 함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패거리들은 보다 큰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편의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싸우고 또 싸운다. 교계가 모이면 교단끼리 싸우고, 교단이 모이면 교회끼리, 교회 안에서는 소속 단체끼리 다투는 현실은 이렇게 이해된다. 패거리들의 싸움에는 옳고 그름이 문제되지 않는다. 지난해 9월 5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복음과 상황’이 공동 주최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와 대응방안’ 포럼은 시작도 하기 전에 광림교회 목회자와 신도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사태가 유명한 댄싱그룹 HOT의 한 멤버가 음주운전 사고를 냈을 때, 무차별적인 전화공세와 인터넷 항의로 담당 경찰서의 업무를 마비시켰던 10대 팬들의 극성과 어떻게 다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진리는 아닐지라도 의리로 뭉친 집단이라면 함부로 패거리로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눈앞의 손익에 집착하는 패거리는 사안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계속한다.

평소에 서로를 경원시 하던 대형교회들이 오랜만에 한데 뭉친 대책위 구성을, 한국 기독교의 양심이라는 손봉호 교수가 점잖은 말로 “집단이기주의의 표출”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음미해 볼 만하다. 패거리의 또 다른 특성은 우리편이 연관되지 않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을 끄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돈이다. 신성해야 할 교단 총회장 선거에 금권선거가 공공연히 자행되어, “이런 풍토 아래서라면 바울이나 베드로가 총회장으로 출마해도 돈을 쓰지 않고는 낙선할 것 같았다”는 한 전도사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문제의 “한국의 대형교회”를 제작한 최승호PD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프로그램만큼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었고 “절대 다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면서, 이제는 “교계 언론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에는 언론이 없다. 기독교텔레비전을 비롯하여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그리고 수많은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통해 매일 수많은 말(言)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따지는 논지(論旨)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교계 신문과 방송은 선교매체일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언론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형교회의 애완견으로 양육되고 있는 일부 교계언론
교계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살펴보면 육하원칙에 의해 작성된 단순한 행사 보도기사가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소위 스타 목사님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눈부신 활약을 벌였는지”는 알 수 있지만, 죄로 물든 이 땅을 사는 교인들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어려움과 고민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심도 있는 해설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교계언론은 “목사의, 목사에 의한, 목사를 위한 언론”이라는 조롱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번에 보도된 문제들은 세상 언론에 노출되기 훨씬 전에 교계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계 언론에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너무 많은 탓에 보도할 수 없었다. 이는 일부 유력한 교계 언론사가 대형교회에 그 재정을 의존하고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독자도 별로 없는 적자투성이 신문과 방송에 대형교회들이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교단이나 교회가 분쟁에 휘말렸을 때 자신을 위해 짖어줄 애완견으로 양육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감시견(watch dog)으로서의 언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국민일보>는 “교회문제는 교회에 맡기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교계 안팎을 살펴보아 내린 결론은 “한국 기독교에는 자정(自淨)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금품으로 얼룩진 교단 선거를 소위 세상 법정으로 끌고 나간 결과 얻은 사법부의 유권해석이다.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 28부는 예장통합측 대의원 조모 씨가 “1999년 9월 이모씨를 총회장으로 선출한 선거를 무효로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이모씨의 총회장 임기가 이미 끝나 “실익이 없다”고 기각한 뒤 “종교계가 사회에 깨끗한 물을 흘려 보내지는 못할망정 혼탁한 법적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서 “교회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세속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올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이를 처리해야 한다”고 가슴 아픈 충고를 보탰다.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얻을 것은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롱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다.

지금까지 살펴 본 한국교회의 실상은 화려한 외양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동안 ‘승리’와 ‘성장’이라는 지상(至上)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결과 교인도 교회도 잃어버리고 언로(言路)를 막아 자정능력도 잃어버린 끝에 종교인의 최후 보루인 양심마저 잃어버린 처참한 모습이다.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MBC와 대책위의 대결은 2000년 한국판 나단 선지자와 다윗의 대결이다. 그러나 그 결말은 달랐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았다는 목사가 그래서는 안되지,” 방송이 먼저 교회를 질타했다. 그러나 이미 권력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굳힌 교회가 순순히 머리 숙일 리 없다. “저나 내나 뭐가 다른데”하는 생각에 “너는 거룩한 선지자가 아니야. 내 문제에 간섭하지 말아! 그러다 다쳐!” 반격을 개시했다. 나단이 나단답지 못하고 다윗이 다윗답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 평신도는 묻는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 기독교는 무엇으로 살며, 우리는 누굴 믿어야 합니까?”


<전 한세대 신문방송학과 박영근 교수가 기고한 글입니다.>
뉴스앤조이 (2001-01-04 오후 10: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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